네 마음의 핵무기를 제거하라

|

네 마음의 핵무기를 제거하라

-북핵문제 앞에서 통일의 전망을 생각한다 (2006년 10월)


   

함경북도의 한 야산 지하갱도에서 핵실험이 있었던 지난 10월 9일 이후, 한반도 주변 정세는 요동을 멈출 줄 모르고 우리 마음의 지각 또한 여진에 몸살을 앓고 있다. 며칠 동안 일과 공부가 손에 잡히질 않았는데, 이와 달리 시민들이 보여준 침착한 반응은 꽤 인상적이었다(그 증거로 주식시장이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식의 보도를 읽는 마음은 씁쓸했지만). 이 외현적 태평함이 내면적 무관심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편집증에 사로잡힌 보수언론이 떠들어대듯 “안보불감증” 따위는 더더욱 아닐 거라 믿는다. 거기에는 어떤 긴장된 "관조"가 있다. 그것은 제3자의 관망이 아니며 이해당사자의 계산적 사유와도 다른 어떤 것이다. 

라깡은 코기토에 반대하여 “나는 생각하는 곳에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는 곳에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존재하는 곳에 사유가 있다면, 들뢰즈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앎 없는 관조(contemplation without knowledge)”라고 부른 절대적 내재성의 사유가 그에 가장 근사하리라. 핵실험 뒤에 봇물처럼 터져 나온 보도나 전문가들의 논설들을 보면서 새삼 느낀 거지만, 우리는 북핵문제나 통일문제를 바라보는 민중적 시각, 보다 정확히 말해 그렇게 명명되는 사태들에 내재한 민중적 관조의 운동을 너무 오래 살피지 않았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장래를 판단하고 결정할 어떤 주체적 힘도 갖지 못한 채, 이 소식 저 정보에 일희일비하며 미국-일본이나 중국, 러시아의 발언에 조바심어린 촉각을 곤두세울 뿐이다. 이런 갈팡질팡은 정부 차원에서도 그렇고 개인의 수준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체와 타자, 그리고 사랑


남의 결정에 따라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없다. 이 얘기를 듣고 사랑에 빠졌다가 저 말을 듣고 사랑을 접는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닐 것이다. 사랑은 그럼 주체적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다름 아닌 ‘내가’ 사랑하는 것이란 점에서 주체적이고, 나의 감정과 행동들이 철저히 ‘사랑하는 너’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주체적이 아니다. 사랑은 눈에 띠든 안 띠든 내게 어떤 요동, 운동, 행동을 불러일으키며, 춤과 춤추는 사람이 그러하듯,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 요동, 운동, 행동으로부터 분리될 수도 없고 스스로를 분간해내지도 못한다. “사랑에 눈이 멀다”는 말은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사랑은 주체적이라기보다 나를 주체로 만든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이것은 상대―사랑 속에 있는 다른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하여 이런 사태는, 이성복의 시(詩)를 빌자면,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표현될 수밖에 없다. 나와 너 없인, 너와 나 없인 '그것'(사랑)도 없지만, ‘나’로도 ‘너’로도, 심지어 ‘나와 너’로도 환원되지 않는 이 사랑은 앞서 “살아있는 관조”의 운동이라 부른 어떤 절대적 내재성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 같다. ‘나’와, 내가 너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나’, 그 둘 속에 깃든 ‘너’―주체와 다른 주체의 관계를 사랑으로 이끄는 이 그리움의 공통존재를 주체의 외심적(extimate) 타자라 불러볼 수 있다면, 우리를 주체적으로 만드는 이 사랑은 나와 너의 ‘하나됨’(통일)이 아니라 ‘나’(주체)와 또 하나의 ‘나’(주체)가 ‘너’라는 그리운 타자를 함께 품는 것이고, 그 타자의 운동 속에 ‘나’를 열어놓는 것이다. 참된 통일 또한 그러해야 한다면, 지나친 비약이 될까?


통일은 하나 됨이 아니다


통일은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구호에 휩쓸려선 안 되고, 합리적 계획과 냉철한 절차에 따라, 또 때론 과감한 투자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는 말은, 원론상 옳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참된 통일의 전망을 가진 자가 아니라 비용을 최소화한다는 원칙하에 북한 접수 계획을 수립하는 관료나 인수합병에 나서는 투기자본가의 어투와 너무 닮아있다. 사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우리가 상상하는 유일한 통일은, 겉으로 말이야 어떻게 하든, 결국 남한에 의한 북한의 흡수합병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북한과 대등한 상호 주체적 연대나 교류를 한 번도 진지하게 고려해본 바가 없었던 것이다. 통일을 대비한 인프라 구축이든, 연민어린 구호든, 적대적 반북감정이든 이 위계적 시선에선 차이가 없다. 가난하다고 약자인가? 핵실험은 이 물음에 대한 다른 주체(북한)의 악에 바친 대답으로 들린다. “NO!” 

우파들의 소위 “퍼주기” 운운하는 역겨운 언동은 제쳐두고라도, 도대체 통일이 민족 대단결이라는 낡은 구호 이외에 다른 어떤 공동체적 전망을 열어줄 수 있는지, 혹은 어떤 민중적 전망 속에서 실현되어야 하는지 좌파들은 거의 고민하지 않았다. 한반도에만 남아있는 냉전적 적대의 경계를 어떻게 허물어야 좋은지에 관해 현실적 책략들을 제출했던 것은 시장경제론자들이었지 꼬뮤니스트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대중 정부 이래의 “햇볕정책”이 이룩한 성과를 폄훼할 뜻은 조금도 없지만, 도대체 그 햇볕이 어떤 태양에서 나오는 것인지에 대해 이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것은 자본인가, 민족적 동질감인가, 아니면 어느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타자로서의 ‘민중’인가? 


“통일은 다 됐어”라는 말


   

북한 핵실험 기사를 읽던 나는 문득 “통일은 다 됐어”라는 문익환 목사의 말을 떠올렸다. 문목사가 1989년에 임수경씨와 함께 평양에 다녀온 후 수감되며 한 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것은 그때도 그랬지만, (북한이 핵실험에 나서고 한반도 긴장이 극에 달한) 지금은 더더욱 뜬금없는 소리로 들린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고 통일이 아주 물 건너 가버리는 것은 아니겠으나 핵무기의 존재가 통일에 장애가 됐으면 됐지 도움을 줄 리는 없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핵실험은, 애석하지만, 통일의 시간표를 무기한 연기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게 상식적인 계산이리라. 그렇다면 “통일은 다 됐어”라는 그 자기확언은 이제 냉소나 아이러니에 불과한 걸까? 아니면 북핵문제나 통일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을 열어야 한다는 뜻일까?


국제사회가 당장은 대북재제와 핵무기 불용을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지만, 이미 핵실험에 성공한 마당에 북한의 핵 보유라는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란 어려울 것이다.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을 보유한 국가를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데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단 점에서, 미국의 대북한 군사행동의 가능성은 오히려 낮아졌고 군사적 위협과 경제적 봉쇄를 통해 김정일 정권의 붕괴를 추진해온 미국의 전략은 향후 수정이 불가피할 것 같다. 이제 북한의 위상은, 그들이 의도했던 바대로,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 보인다. 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핵무기를 먹고사는 나라는 없다(지금으로선 재앙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핵수출이 아니라면). 따라서 핵은 북한으로서도 무거운 짐이다. 스스로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한 나라는 아직 없다지만, 나는 북한이 그 최초의 사례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선택이 가장 큰 변수이겠으나 한반도 비핵화라는 과제를 질질 끌수록 미국이 치러야할 대가는 더 커지며 미국이 그 비용을 (어떤 식으로든) 남한에 전가할 가능성도 아주 높기 때문에, 우리는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 폐기와 봉쇄해제를 좀더 강력히 요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정세변화는 통일문제에 어떤 방향 전환, 전망 전환을 요구하는 것인가? 단적으로 말해, 북한의 핵 보유와 더불어 (평화적이든 아니든) 흡수통일의 전망은 멀어졌고 참된 통일의 전망은, 역설적이게도 보다 가까이 다가와 있다. 이제부터의 실천에 달렸겠지만, 우리 앞에는 통일에 대해 훨씬 더 성숙한 태도를 연마할 기회가 막 열린 셈이다. 



우리 마음의 핵부터 제거하자



핵무기의 재료인 플루토늄은 핵 발전시 우라늄이 붕괴하고 남은 찌꺼기가 연료봉에 달라붙은 것이라고 한다. 핵 발전소는 핵의 평화적 이용임에 틀림없지만, 그러한 이용 자체가 자연이라는 타자에 대한 폭력적 착취일 수 있다는 생각은 쉬 떠오르지 않는 진실이다. 그러한 부주의의 대가는 핵무기라는 방식으로 회귀하는 “억압된 타자”이다. 통일이 북한이라는 타자에 대한 '부정,' 혹은 평화적 '이용'이라는 공리주의적 발상에 묶여있을 때, 그 대가로 우리가 받게된 나쁜 소식이 바로 “핵실험”이었던 것도 마찬가지이다. 

북한이 핵을 버려야 한다는 원론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북한 자신도 한반도 비핵화 원칙의 폐기를 선언한 적이 없고 오히려 그 반대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참된 관계의 회복으로서의 통일, 또 그러한 민중적 통일의 전망 속에서의 핵문제 해결이다. 무엇보다 북한을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서 인정해야 하며, 남과 북의 두 주체 사이에 민중적 ‘너’, 영원한 ‘너’로서의 민중이라는 공통의 그림, 그리움이 깃들게 하는 일이 필요하다. 신뢰와 사랑, 공통운명에의 믿음이라 해도 좋다. 그것은 우리 마음의 핵무기와 핵발전소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그때 비로소 “통일은 다 됐어”라는 안으로부터의 선언이 보다 분명하게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통일은 바로 그러한 과정으로서만 참된 것이리라.



-2006년 10월 연세대학원신문






* 2006년 가을에 <연세대학원신문>에 실었던 글을 다시 펴보았다. (이 글은 교수신문에도 게재됐었다)

북핵 문제가 드디어 한반도에서의 종전과 평화정착이라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결의 실타래를 풀어가고 있다. 

너무나도 감격스럽다!!! 

풀어야할 문제들이 산적해있고 예상치 못한 여러 문제들도 돌발할 것이다. 

하지만 대세는 돌이킬 수 없고, 

우리가 그 흐름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가고 있기에 

큰 걱정은 되지 않는다. 


* 12년 전 저 글을 쓸 때 품었던 생각들이 그다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면서 

공부하고 생각하는 자로서 보람을 느끼고 있다.

내 글이 --비록 독자가 거의 없었겠지만-- 사람들을, 시대를, 그리고 나 자신을 오도하지 않았음에 작은 자부심을 갖게된다.  


And
prev | 1 | 2 | 3 | 4 | ··· | 27 |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