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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의 핵무기를 제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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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의 핵무기를 제거하라

-북핵문제 앞에서 통일의 전망을 생각한다 (2006년 10월)


   

함경북도의 한 야산 지하갱도에서 핵실험이 있었던 지난 10월 9일 이후, 한반도 주변 정세는 요동을 멈출 줄 모르고 우리 마음의 지각 또한 여진에 몸살을 앓고 있다. 며칠 동안 일과 공부가 손에 잡히질 않았는데, 이와 달리 시민들이 보여준 침착한 반응은 꽤 인상적이었다(그 증거로 주식시장이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식의 보도를 읽는 마음은 씁쓸했지만). 이 외현적 태평함이 내면적 무관심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편집증에 사로잡힌 보수언론이 떠들어대듯 “안보불감증” 따위는 더더욱 아닐 거라 믿는다. 거기에는 어떤 긴장된 "관조"가 있다. 그것은 제3자의 관망이 아니며 이해당사자의 계산적 사유와도 다른 어떤 것이다. 

라깡은 코기토에 반대하여 “나는 생각하는 곳에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는 곳에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존재하는 곳에 사유가 있다면, 들뢰즈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앎 없는 관조(contemplation without knowledge)”라고 부른 절대적 내재성의 사유가 그에 가장 근사하리라. 핵실험 뒤에 봇물처럼 터져 나온 보도나 전문가들의 논설들을 보면서 새삼 느낀 거지만, 우리는 북핵문제나 통일문제를 바라보는 민중적 시각, 보다 정확히 말해 그렇게 명명되는 사태들에 내재한 민중적 관조의 운동을 너무 오래 살피지 않았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장래를 판단하고 결정할 어떤 주체적 힘도 갖지 못한 채, 이 소식 저 정보에 일희일비하며 미국-일본이나 중국, 러시아의 발언에 조바심어린 촉각을 곤두세울 뿐이다. 이런 갈팡질팡은 정부 차원에서도 그렇고 개인의 수준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체와 타자, 그리고 사랑


남의 결정에 따라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없다. 이 얘기를 듣고 사랑에 빠졌다가 저 말을 듣고 사랑을 접는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닐 것이다. 사랑은 그럼 주체적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다름 아닌 ‘내가’ 사랑하는 것이란 점에서 주체적이고, 나의 감정과 행동들이 철저히 ‘사랑하는 너’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주체적이 아니다. 사랑은 눈에 띠든 안 띠든 내게 어떤 요동, 운동, 행동을 불러일으키며, 춤과 춤추는 사람이 그러하듯,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 요동, 운동, 행동으로부터 분리될 수도 없고 스스로를 분간해내지도 못한다. “사랑에 눈이 멀다”는 말은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사랑은 주체적이라기보다 나를 주체로 만든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이것은 상대―사랑 속에 있는 다른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하여 이런 사태는, 이성복의 시(詩)를 빌자면,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표현될 수밖에 없다. 나와 너 없인, 너와 나 없인 '그것'(사랑)도 없지만, ‘나’로도 ‘너’로도, 심지어 ‘나와 너’로도 환원되지 않는 이 사랑은 앞서 “살아있는 관조”의 운동이라 부른 어떤 절대적 내재성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 같다. ‘나’와, 내가 너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나’, 그 둘 속에 깃든 ‘너’―주체와 다른 주체의 관계를 사랑으로 이끄는 이 그리움의 공통존재를 주체의 외심적(extimate) 타자라 불러볼 수 있다면, 우리를 주체적으로 만드는 이 사랑은 나와 너의 ‘하나됨’(통일)이 아니라 ‘나’(주체)와 또 하나의 ‘나’(주체)가 ‘너’라는 그리운 타자를 함께 품는 것이고, 그 타자의 운동 속에 ‘나’를 열어놓는 것이다. 참된 통일 또한 그러해야 한다면, 지나친 비약이 될까?


통일은 하나 됨이 아니다


통일은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구호에 휩쓸려선 안 되고, 합리적 계획과 냉철한 절차에 따라, 또 때론 과감한 투자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는 말은, 원론상 옳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참된 통일의 전망을 가진 자가 아니라 비용을 최소화한다는 원칙하에 북한 접수 계획을 수립하는 관료나 인수합병에 나서는 투기자본가의 어투와 너무 닮아있다. 사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우리가 상상하는 유일한 통일은, 겉으로 말이야 어떻게 하든, 결국 남한에 의한 북한의 흡수합병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북한과 대등한 상호 주체적 연대나 교류를 한 번도 진지하게 고려해본 바가 없었던 것이다. 통일을 대비한 인프라 구축이든, 연민어린 구호든, 적대적 반북감정이든 이 위계적 시선에선 차이가 없다. 가난하다고 약자인가? 핵실험은 이 물음에 대한 다른 주체(북한)의 악에 바친 대답으로 들린다. “NO!” 

우파들의 소위 “퍼주기” 운운하는 역겨운 언동은 제쳐두고라도, 도대체 통일이 민족 대단결이라는 낡은 구호 이외에 다른 어떤 공동체적 전망을 열어줄 수 있는지, 혹은 어떤 민중적 전망 속에서 실현되어야 하는지 좌파들은 거의 고민하지 않았다. 한반도에만 남아있는 냉전적 적대의 경계를 어떻게 허물어야 좋은지에 관해 현실적 책략들을 제출했던 것은 시장경제론자들이었지 꼬뮤니스트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대중 정부 이래의 “햇볕정책”이 이룩한 성과를 폄훼할 뜻은 조금도 없지만, 도대체 그 햇볕이 어떤 태양에서 나오는 것인지에 대해 이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것은 자본인가, 민족적 동질감인가, 아니면 어느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타자로서의 ‘민중’인가? 


“통일은 다 됐어”라는 말


   

북한 핵실험 기사를 읽던 나는 문득 “통일은 다 됐어”라는 문익환 목사의 말을 떠올렸다. 문목사가 1989년에 임수경씨와 함께 평양에 다녀온 후 수감되며 한 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것은 그때도 그랬지만, (북한이 핵실험에 나서고 한반도 긴장이 극에 달한) 지금은 더더욱 뜬금없는 소리로 들린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고 통일이 아주 물 건너 가버리는 것은 아니겠으나 핵무기의 존재가 통일에 장애가 됐으면 됐지 도움을 줄 리는 없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핵실험은, 애석하지만, 통일의 시간표를 무기한 연기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게 상식적인 계산이리라. 그렇다면 “통일은 다 됐어”라는 그 자기확언은 이제 냉소나 아이러니에 불과한 걸까? 아니면 북핵문제나 통일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을 열어야 한다는 뜻일까?


국제사회가 당장은 대북재제와 핵무기 불용을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지만, 이미 핵실험에 성공한 마당에 북한의 핵 보유라는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란 어려울 것이다.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을 보유한 국가를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데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단 점에서, 미국의 대북한 군사행동의 가능성은 오히려 낮아졌고 군사적 위협과 경제적 봉쇄를 통해 김정일 정권의 붕괴를 추진해온 미국의 전략은 향후 수정이 불가피할 것 같다. 이제 북한의 위상은, 그들이 의도했던 바대로,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 보인다. 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핵무기를 먹고사는 나라는 없다(지금으로선 재앙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핵수출이 아니라면). 따라서 핵은 북한으로서도 무거운 짐이다. 스스로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한 나라는 아직 없다지만, 나는 북한이 그 최초의 사례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선택이 가장 큰 변수이겠으나 한반도 비핵화라는 과제를 질질 끌수록 미국이 치러야할 대가는 더 커지며 미국이 그 비용을 (어떤 식으로든) 남한에 전가할 가능성도 아주 높기 때문에, 우리는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 폐기와 봉쇄해제를 좀더 강력히 요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정세변화는 통일문제에 어떤 방향 전환, 전망 전환을 요구하는 것인가? 단적으로 말해, 북한의 핵 보유와 더불어 (평화적이든 아니든) 흡수통일의 전망은 멀어졌고 참된 통일의 전망은, 역설적이게도 보다 가까이 다가와 있다. 이제부터의 실천에 달렸겠지만, 우리 앞에는 통일에 대해 훨씬 더 성숙한 태도를 연마할 기회가 막 열린 셈이다. 



우리 마음의 핵부터 제거하자



핵무기의 재료인 플루토늄은 핵 발전시 우라늄이 붕괴하고 남은 찌꺼기가 연료봉에 달라붙은 것이라고 한다. 핵 발전소는 핵의 평화적 이용임에 틀림없지만, 그러한 이용 자체가 자연이라는 타자에 대한 폭력적 착취일 수 있다는 생각은 쉬 떠오르지 않는 진실이다. 그러한 부주의의 대가는 핵무기라는 방식으로 회귀하는 “억압된 타자”이다. 통일이 북한이라는 타자에 대한 '부정,' 혹은 평화적 '이용'이라는 공리주의적 발상에 묶여있을 때, 그 대가로 우리가 받게된 나쁜 소식이 바로 “핵실험”이었던 것도 마찬가지이다. 

북한이 핵을 버려야 한다는 원론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북한 자신도 한반도 비핵화 원칙의 폐기를 선언한 적이 없고 오히려 그 반대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참된 관계의 회복으로서의 통일, 또 그러한 민중적 통일의 전망 속에서의 핵문제 해결이다. 무엇보다 북한을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서 인정해야 하며, 남과 북의 두 주체 사이에 민중적 ‘너’, 영원한 ‘너’로서의 민중이라는 공통의 그림, 그리움이 깃들게 하는 일이 필요하다. 신뢰와 사랑, 공통운명에의 믿음이라 해도 좋다. 그것은 우리 마음의 핵무기와 핵발전소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그때 비로소 “통일은 다 됐어”라는 안으로부터의 선언이 보다 분명하게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통일은 바로 그러한 과정으로서만 참된 것이리라.



-2006년 10월 연세대학원신문






* 2006년 가을에 <연세대학원신문>에 실었던 글을 다시 펴보았다. (이 글은 교수신문에도 게재됐었다)

북핵 문제가 드디어 한반도에서의 종전과 평화정착이라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결의 실타래를 풀어가고 있다. 

너무나도 감격스럽다!!! 

풀어야할 문제들이 산적해있고 예상치 못한 여러 문제들도 돌발할 것이다. 

하지만 대세는 돌이킬 수 없고, 

우리가 그 흐름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가고 있기에 

큰 걱정은 되지 않는다. 


* 12년 전 저 글을 쓸 때 품었던 생각들이 그다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면서 

공부하고 생각하는 자로서 보람을 느끼고 있다.

내 글이 --비록 독자가 거의 없었겠지만-- 사람들을, 시대를, 그리고 나 자신을 오도하지 않았음에 작은 자부심을 갖게된다.  


And

멘붕시대를 살아가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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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림보, 생의 수용소에서 벗어나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셉션 Inception>(2010)에는 ‘림보(limbo)’라는 이름의 기이한 세계가 나온다. 림보는 ‘꿈 속의 꿈 속의… 꿈’이다. 두 개의 거울을 마주세우면 거울이 서로를 반영하면서 거울 속에 안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미장아빔(mise-en-abyme)의 이미지가 나타나는데, 이 영화에서 림보는 그러한 ‘반영의 반영’의 연쇄가 종국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마지막 꿈의 씨앗 같은 세계로, 거기서는 꿈과 현실의 이분법이 사라지기 때문에 자력으로는 깨어날 수 없고 림보에 침입한 타자의 도움에 의해서만 벗어날 수 있게 돼있다. 그런 점에서 림보는 천국과도 같은 무저갱이다. 어떤 이에게는 지옥 같은 악몽의 무한반복일 수도 있다. 원래 림보는 가톨릭교회의 용어로 사후세계의 한 형태, 지옥의 변방이나 가장자리, 문턱 등을 뜻한다. 이교도 성인(聖人)들이나 세례를 받지 못해 원죄를 씻지 못하고 죽은 아이(infant)들처럼 천국에는 못 가지만 지옥이나 연옥에 보낼 수도 없는 이들이 보내지는 곳으로 메시아가 최후의 심판을 행할 때 구원될 수 있다고 한다. <인셉션>에서는 약간 다른 양상으로 림보가 그려져 있다. 주인공인 콥의 아내는 모든 것이 자신의 마음에 꼭 맞고 둘의 사랑도 변치 않는 무시간적 림보에 들어가 있는데, 이 림보는 어찌 보면 자본이 자가 증식하며 모든 곳을 틈새-―미래와 과거가 그것에 의해 분절되는 시간의 틈새도, 존재의 틈새인 부정성도, 삶의 틈새인 죽음도, 관계의 틈새인 타자성도-― 없이 메워버리는 세계, 그저 행복과 발전의 물증 같은 상품들로  모든 틈새가 메워지는 바로 우리시대와 닮아있다. 콥은 이런 림보에 갇히지 않기 위해, 그의 작업장인 꿈속에 들어갈 때면 꼭 ‘토템’이라는 불리는 팽이를 지니고 간다. 그것은 자신이 손수 만들어 세상에 단 하나뿐인 팽이이고 늘 지니고 다니기에 그것의 모양과 감촉은 물론이고 무게까지 섬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꿈인지 현실인지 의심될 때 이 팽이를 돌린다. 팽이가 멈추지 않고 계속 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자기 바람대로 이뤄지는 꿈의 감옥, 림보에 갇혀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팽이가 꿈꾸는 자의 의지나 욕망과 무관하게 제 회전을 다하고 쓰러진다면, 그것은 현실이다. 팽이 토템은 오직 그만의 것이지만, 그것의 존재이유는 소유자의 의도, 희망, 의지, 꿈 등과 무시하고 제 회전을 다하는 것이다. 팽이의 회전은 물론 자연필연적 법칙에 따르는 것이지만, 꿈속에서는 사뭇 다른 의미가 덧붙여진다. 그것은 주체의 꿈에 속하지 않는 타자적 사물, 현상계 안에 침입해 그것의 꿈을 깨트리는 물자체와도 같은 실재이며, 주체가 받아들인 타자적인 것, 이를테면 그가 선택한 유한성(운명)이다. 그것은 왜상(anamorphosis)처럼 꿈의 아름다운 그림을 일그러뜨린다. 주체의 세계 내부에 들어온 저 바깥의 사물은 우리를 자폐적 꿈 바깥으로 깨고나오게 강제하는 꿈의 구멍이자 간극이기도 하다. 나는 후쿠시마가 그 끔찍한 외상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발전과 성장 시스템에 구멍을 내는 사물이며, 타자에 대한 그리움(과거)과 기다림(미래)의 능력을 상실한 채 자기 안으로 함몰해버린 인류―-그런 타자 없는 주체는, 타자성도 주체성도, 부끄러움마저도 없는 괴물로 변하며, 사실 후쿠시마 원전과 세계의 모든 핵발전소와 핵무기들은 그 괴물스런 존재의 똥이다-―에게 ‘세계’의 종말을 고지하는 타자, 그리하여 이 세계와 우리들의 시간의 끝에 우리를 끌어다 세우는 어떤 힘이라고 생각해본다. 


시간이 끝 대신 림보를 갖게 되는 것은 역사의 유한성이 사라지면서 무의미한 증식과정이 되는 것이고, 인생으로 따지면 죽음이라는 경계가 사라지면서 육체를 둘러싼 희비극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예술작품으로 따지면 근원(Ursprung)이 폐색되는 것이며, 연극 즉 행위된 것(drama)으로 따지자면, 행위의 시종이 없고 형상화와 의미화가 거듭 유산되는 사태이다. 그런 세상에선 무대와 생활이 구별되지 않고, 게임과 삶이 분별되지 않고, 사람과 아바타가 식별불가능해진다. 경계라는 이름의 타자성이 사라지면 애정은 초월성 없는 물질적 행위로 만연하면서, 에로스의 장소가 모든 곳에 확산되어 사실상 무효화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아감벤이 “예외가 상례가 되는 비(非)식별역”이라고 부른 곳, 그 외양이 안락하든 비참하든 본질상 생의 수용소(camp)인 곳에 갇히게 된다. ‘수용소’라니 너무 심한 얘긴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시적, 통시적 집단자살의 나라―-전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진행 중인 고령화 추세와 그보다 심각한 양상으로 추락 중인 출산율은 현세대와 미래세대의 통시적 집단자살이 아닌가-―는 ‘안락사의 수용소’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교육을 인적 자원 관리로 공식화하고, 그 인적 자원의 개발 및 활용을 재벌이 교육기관에 직접 지시하는―-‘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육성하라’―- 이 시대는 ‘노동 수용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미디어가 미와 욕망의 기준을 매분, 매초마다 들이밀어 압박하고 대중들이 그 모델에 맞추기 위해 살을 자르고 뼈를 깎는 온갖 의료시술에 몸을 내줘야 하는 이 성형과 미용의 광풍-―얼짱, 몸짱, 꿀벅지, 초콜릿복근 심지어 엉짱까지-―은, 비록 그것이 자발성의 외양을 하고 있다고는 해도, 일종의 ‘미적 생체실험’이 아닌가. 우리는 끊임없이 긍정하며, 무언가를 해대야 하는 조증―-자본의 미친 순환운동의 내면화-―으로 존재의 모든 틈새를 메워야 직성이 풀릴 것처럼 산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 우울증을 앓다 자살을 기도한다. 


바틀비 Occupy 후쿠시마


우리 의식을 점령한 저 “~하라”는 (자기 자신처럼 여겨지는 내면의) 무한한 긍정성의 명령에, 우리는 필경사 바틀비(Bartleby)처럼 정중한 거절을 표해야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 거절은 분명 이 세계로부터 탈퇴하는 자의 몸짓이다. 하지만 우리는 바틀비의 탈퇴를 통상적인 방향과 정반대로 이해해야 한다. 바틀비의 ‘부정(not to)’의 ‘긍정(prefer)’―I would prefer not to―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나아간 자,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간 자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악몽 같은 (“~하라”는 명령으로 가득한) 림보 상태에서 실재의 삶으로 깨어나는 자의 몸짓이기 때문이다. 질식사해가는 것은 우리이며 바틀비는 이 림보로부터의 해탈자인지도 모른다. 그의 소통불가능한 말과 태도는 누군가에 대한 명령도 아니고 심지어 자기에게 하는 명령이나 권유도 아니다. 그것이 소통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바틀비가 아니라 우리의 소통 관념이 틀려먹은 탓인지도 모른다. 나의 의도를 전달하고 상대의 의도를 전달받고 그 중간에서 적절히 타협한다는 장사꾼 식의 소통―실은 소통이 아니라 ‘협상’― 밖에 모르는 소위 시민사회적, 부르주아적 소통 관념의 한계 안에서만, 바틀비의 말이나 태도가 한없이 답답한 불통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사실 바틀비는 소통을 거절한 바가 없고 다만 자기의 존재를 지켰던 것뿐이다. <인셉션>에서 주인공이 지니고 있던 ‘토템’인 팽이처럼, 바틀비도 자기 생의 고유한 회전을 하다가 멈춰 섰던 것뿐이다. 그의 운명이 슬픈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의지나 의도가 어쩌지 못하는 존재의 필연성을 몸소 계시함으로써 우리가 ‘삶이라는 꿈’에 중독되지 않게 해준다―그런 중독의 결과는 “살아남은 자의 뻔뻔함”이다―는 큰 각성의 효력을 발휘한다(우리는 바로 그런 존재와 더불어 사는 법을 이제부터라도 배워야 하지 않는가. 누군가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다만 자기로 머무는 어떤 존재. 우리의 구성적 세계의 관점에서는 빈자리처럼, 검은 구멍처럼 보이고 왜상이나 흉터처럼 여겨지는 것―삶의 현실이 거기서 꿈을 들이쉬고 내뱉는 빈자리를 자신의 존재로 점거한 바틀비는, 소유와 건설과 상품생산과 소비라는 실정적인 세계 구성 행위와 그 행위의 산물들로 꽉 막혀버린 우리시대의 자기 폐색(閉塞)에 하나의 구원적 지점이 되지 않는가. 바로 너희 자신을 점거하라, 너의 존재가 이 림보 상태에 빠진 세계의 구멍이 되게끔 살아라! 우리는 어떻게 지금의 우리 자신이 될 것인가라고 니체는 물었다. 내 생각에 이에 대한 답은 “현존재(터-있음)가 되어라!”이다―물론 니체의 답은 ‘영원한 재귀의 운명애’를 사는 초인쯤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현존재는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간 연쇄 가운데 한 지점으로서의 현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현존재의 Da는 저기/여기(t/here) 사이를 나누는, 과거와 미래를 나누는 비시간적 시간이며 비-장소적 장소이다. 한마디로 ‘없는 곳’이며, ‘없는 시간’이다. 없는 것의 있음, 없는 채로 있음. 그것이 터-있음이며, 나는 그것을 우리가 구성적으로 봉합한 대지로서의 세계(Welt)의 봉합선이 터진 자리에, 증상의 원인인 트라우마의 자리에 머물러 있음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현존재로서의 바틀비는 무인지대(無人地帶)인 후쿠시마 원전에 사는 인간―-실제로 거기에는 아무도 살 수 없다―-이며, 아우슈비츠의 ‘무슬림’이다. 

  

운명이 없는 세계는 꿈에서 꿈으로 이어지다 림보라는 출구 없는 고독에 감금된다. 어쩌면 동물들은, 인간이 죽음을 죽는 것처럼, 꿈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삶에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메타의 경계선이 없다. 그래서 동물의 생은 우리가 자신의 삶을 대하듯 그런 대상-구성적 삶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런 대상적-구성적 삶의 일부이자 외부인) 꿈도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저 동물들의 꿈-삶처럼 꿈과 현실의 경계인 메타성과 타자성을 상실해가고 있는데,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우리 생활의 체제 자체가 자기 바깥과 한계를 지워버린 채(성찰성의 조건을 막아버린 채) 자가-재생산(auto-poiesis)이라는 일차원성의 미몽에 빠져 익사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미친 자본주의에게 공황이 재앙인 채로 축복이듯이, 우리의 문명에게 후쿠시마는, 틀림없이 악몽 같은 재난이지만, 그렇게 재난인 채로 축복일지 모른다. 

우리는 후쿠시마라는 저 검은 구멍을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 회화사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문명사의 가능성의 조건을 가리키는 ‘성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저것은 인간의 한계, 지성의 한계, 과학과 이성의 한계, 인류의 죽음충동을 고지하는 것이며, 삶 안에 들어와 있는 죽음 자체가 우리 눈앞에 놓여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완고하게 점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스럽다(sacer).” 여기서 “성스럽다”는 것은 우리가 후쿠시마를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우상화하거나 초월적인 인격신이 우리의 탐욕에 내린 벌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 물론 아니다. 다만 저 종말의 기표가 우리의 문명을, 지난 수십년 어쩌면 수백년 동안 갇혀있던 자본증식의 꿈, 성장과 개발의 림보로부터 깨어나도록 강요하는 운명적 힘이자 그로부터 새로운 타자적 이행을 실현해야할 구멍, 상징적 진리가 없는 실재(the Real)에 직면하게끔 강요하는 토템(운명)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후쿠시마 이후 비로소 우리의 집합적 삶의 시간들이 미래와 진보라는 신화가 아니라, 회광반조(回光返照)하는 자의 시선에 비친 세계 속을 흐르는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나타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인간은 원래 이런 종말의 시간―그게 얼마나 길지는 아무도 모른다―을, 아니 시간의 끝을, 목적 없는 사랑의 시간을 살게끔 피조(被造)되었다는 것을 후쿠시마라는 이름의 재난이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  



계간 <문학동네> 2012년 여름호에 기고한 글

And

멘붕시대를 살아가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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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무치의 전성시대


우리에게 미래가 없어졌다는 것은, 그처럼 ‘단순히 경기전망이 어둡다거나, 잘 살게 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거나, 신분상승의 기회가 구조적으로 막힌 계급사회가 고착되었다거나, 자연환경이 황폐해져 불안하다거나, 인심이 나날이 각박해진다거나 하는 등등의 얘기가 아니다. 아니, 그 모두가 맞는 말이지만 보다 심층적인 문제가 있다.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만남이 없이는 시간의 구조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죽음을 통해 주어진 미래, 사건의 미래는 아직 시간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는 미래, 사람이 수용할 수 없는 미래는 시간의 한 요소가 되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현재와 관계를 맺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두 순간의의 결합은 어떠한 것인가? (…) 미래와의 관계, 즉 현재 속에서의 미래의 현존은 타자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상황에서 비로소 실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상황은 진정한 시간의 실현이다. 미래로 향한 현재의 침식은 홀로 있는 주체의 일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관계이다. 시간의 조건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 속에 그리고 역사 속에 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 강영안 옮김, 시간과 타자, (문예출판사, 1996) 92~3쪽.)


 요컨대 시간은 타자의 현상이다. 시간, 특히 미래는 주체가 유한성 가운데 끝나는 한계 너머 타자의 터이다. 나는 미래를 살 수 없다―나는 현재만을 살 수 있다. 미래는 오직 타자의 땅이(이며, 그것은 없는 땅a-topos이)다. 그런데 왜 주체는 미래를 외면할 수 없는가? 타자를, 또한 타자의 터인 미래를 (가져다쓰지 않고) 남겨두는 것은 주체에게 왜 중요한가? 타자가 없이는 주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자를 제거하는 것은 곧 주체를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이것은 사랑의 교훈이기도 하다. 고로 미래가 없다는 것은 타자(의 터)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며, 이제 주체도 없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 과정을 역으로 되짚어보면, 한국에 미래가 없어진 까닭은 주체의 실종, 그리고 그에 따른, 혹은 그에 앞선, 타자의 소멸에 기인함을 알 수 있다. 

누군가 곧장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지난 한 세대는 타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 관용 등이 어느 때보다 목청 높여 외치지 않았던가. 주체의 패러다임에서 타자의 패러다임으로, 주도적 사상의 방향이 바뀌지 않았는가.’ 그것은 포스트모던 사상의 주체 비판이 가진 커다란 실수였다. 이들은 주체와 타자의 (종합 없는)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했다―결국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했다. 주체는 타자 혹은 비동일자와 ‘시차적인 변증법’의 관계에 놓여있다. 주체라는 종이의 앞면을 찢어버리면 타자라는 뒷면도 함께 찢어진다. 주체는 타자를 담는 한에서만, 타자와 외밀한(extimate) 관계를 맺는 한에서만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죽음’이라는 타자성을 상실할 때, 삶도 함께 잃어버리게 된다는 역설을 일깨워준다. 


“죽음의 미래는 우리에게 미래를 규정해준다. (…) 만일 현재에서 모든 기대를 제거해 버린다면 현재와의 어떠한 공통 본성도 미래는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미래는, 미리부터 존재한 영원의 품속에 안겨 있는, 그래서 우리가 그곳에서 가져올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미래는 절대적으로 다르고,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바로 이렇게 볼 때 참된 시간의 현실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현재 안에서는 미래의 등가물을 절대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거머쥘 수 있는 가능성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레비나스, 같은 책, 96쪽)

 

미래가 없다는 말은, 물론 관용적인 표현이다. 그것은 뭔가 긍정적인 기대를 할 수 없다거나 사정이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는 말을 더 강도 높게 하는 것이다. 미래란 말을 문자 그대로 시간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거기엔 두 가지 해석 가능성이 남는다. 미래를 맞이할 주체가 없어진다는 게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발 딛고 있을 장소나 세계 자체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두 경우 모두 결과는 같다. 미래가 없는 곳엔 무(無)가 남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이해는 곧장 이상한 물음을 불러일으킨다. 미래란 원래 없는 것이 아닌가, 없음으로써만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언제나 현재를 살 뿐이고 미래를 산다는 것은 그저 관용적인 표현(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를 현재의 삶의 동력이자 방향타로 삼는다는 뜻)이지 우리가 어떻게 미래를 살 수 있는가. 그러니 미래란 현재와의 연속성을 갖는 한에서만 직관할 수 있고, 따라서 현재나 주체와 완전히 절연된 것으로서의 미래, 요컨대 절대적 타자로서의 미래란 본디 없거나 있다하더라도 우리와는 모든 면에서 무관한 것, 따라서 없는 셈 쳐도 상관없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생각은 칸트의 ‘물자체’나 규제적 ‘이념’ 같은 용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런 것들을 부인하는 사회, 다시 말해 ‘죽음’과 같은 타자의 자리, 주체가 자신을 근본적으로 다른 자로 환승시킬 수 있는 이행의 자리를 지워버릴 때, 그런 시대는 삶도 죽음도 아닌 이상한 비식별(非識別, indiscernable)의 영역에 스스로를 차폐(遮蔽)하게 된다. 그렇게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주체-타자의 변증법, 최소한의 간극을 메워버릴 때, 인간에게서는 부끄러움(shame)이 사라지고,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전성시대가 열리게 된다. 바로 타자적 미래를 팔아치운 한국사회처럼 말이다.  


"사도마조히즘은 양극 시스템으로, 즉 무한한 감수성(마조히스트)이 그만큼 무한한 무감동(사디스트)과 마주하고 주체화와 탈주체화가 양극단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고유하게 속하지 못하고 부단히 순환하는 시스템으로 나타난다. (…) 규율과 쾌락의 무구별(이때 두 주체는 순간적으로 합치한다)이 바로 부끄러움(shame)이다. 그리고 성난 가학자가 재미있어 하는 피학자에게 ‘말해 봐, 이래도 안 부끄러워?’하면서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끄러움이다. 즉, ‘너는 네가 네 자신의 탈주체화의 주체인 것을 깨닫지 못하니?’" (조르조 아감벤, 정영문 옮김,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새물결, 2011) 163쪽)


부끄러움이 이처럼 내가 나 자신의 탈주체화의 주체인 것을 깨달음이라면, 부끄러움이 없는 시대에는 어떤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사도마조히즘적 정치상황, 즉 권력자들의 사디스트적 패악과 그들에 대한 국민들의 마조히스트적 지지가 부단히 순환하는 이 빌어먹을 시스템에는 과연 ‘함께 썩어가는 자들의 동류의식’ 이상의 것이 있으며, 이는 미래라는 시간의 증발과도 상관된 문제다. 이명박 정권이 집권기간 내내 드러내온 후안무치함은 저들을 권좌에 올려놓은 한국사회가 타자의 자리인 간극, 자기를 타자화할 수 있는 반성의 간극, 그리움과 기다림을 향유할 시간의 간극, 주체-타자의 변증법적 관계 속에 스스로를 이행시킬 자기지양의 힘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음을, 그 모든 능력을 자본의 무한한 자가-증식 과정 속에 매몰해버렸음을 가르쳐준다. 이제 무엇이 이 악몽의 순환고리를 깨트려줄 것인가? 나는 ‘후쿠시마’가, 지구적인 금융공황과 더불어, 한국사회와 한국이 그중 한 고리를 이루고 있는 자본주의적 지구문명에 예기치 못했던 단절을 가져오게 되리라(그렇게 돼야 하리라), 그럼으로써 우리가 상상했던 모든 것들과 다른 시간, 다른 세계가 그 단절을 통해 우리 앞에 열리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비록 우리가 우리인 채로는 거기에 들어설 수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오직 희망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희망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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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붕시대를 살아가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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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타자’ 그리고 이행의 문턱


‘멘탈 붕괴’는, 다른 유행어들이 그렇듯이, 그 시대의 증상들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이며 집합적인 직관의 표현이다. 그래서 ‘멘붕’이란 말도 개인적 상심이나 실망과는 차원이 다른 어떤 것을 가리킨다. 집합적 의식으로서의 멘탈은 합의된 상징이나 의식이 아니라 그러한 상징을 하부에서 지탱해온 집합적 무의식에 연동돼 있다. 게다가 ‘멘붕’은 타인이나 외부적 사태에 원인을 두는 게 아니다. 나나 우리의 근간을 흔드는 체험, 혹은 (멘붕이 일어나기 전까지) 믿는다는 의식조차 없을 정도로 믿었던 어떤 것이 무너질 때가 ‘멘붕’의 순간이다. 그때 우리는, 그것에 기반해서 우리 자신이 구축됐던 어떤 선험적 구조가 더 이상은 작동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런 것이 ‘멘붕’의 상황이다. 따라서 멘붕은 자기와의 결별의 시간이며 주체의 이행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의 멘탈(근본 정동)에서 다른 멘탈로의 이행이 이행하는 자에게 결코 연속성을 보장하진 않는다/못한다는 점이다. 붕괴하는 멘탈이 얼마나 근본적인 층위의 것이냐에 따라 불연속과 단절의 정도는 대단히 심각한 것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무너지는 세계 위에서 하고 있는 성찰이나 기획들은, 새로운 멘탈에 기반을 두고 형성될 자아나 세계에 관해서는 무능하고 무용한 것일 수 있다. 우리의 반성은 이행된 세계의 구성적 일부로 전혀 전달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새로운 세계가 밑거름으로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죽음과 폐허들일지도 모른다. 요컨대 멘붕을, 하나의 세계―정신적이든 실제적 세계든―의 몰락을 수반하는 이행(기실 혁명은 그런 불연속이지 않겠는가)은 하나의 소멸과 다른 하나의 생성이지, 하나가 여기서 저기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건너기가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지금의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것은 건설에의 새로운 의지가 아니라 종말에 임하는 자의 윤리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행, 무의 심연 위에서 이뤄지는 주체 소멸과 타자 생성이라는 이행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마치 죽어가는 자에게 주어진, 자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세계에 무엇을 건네줄 것인가라는 물음처럼 들린다. ‘내가 무엇을 (해)줄 수가 있나요, 그럴 필요는 있습니까? 저 무의 심연 너머에서 도래할 자들(타자들)이 나와는 어떤 척도도 공유하지 않을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바로 여기가 우리가 타자에 대해서, 또한 타자적인 것으로서의 미래에 대해서 절박하게 사유하기에 알맞은 때와 장소인 것 같다. 우리가 왜 점점 미래에 대한 감각을 잃어왔는지, 어떻게 미래나 타자에 대해 잘못 생각해왔는지, 그렇게 미래와 타자를 유실하는 가운데 어떻게 우리의 주체를 망쳐왔는지 생각해보기에 적절한 때, 그게 또한 ‘멘붕’의 시대다. 


대한민국, 증발하는 미래와 휘발하는 현재


“대한민국이란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 이것은 냉소적 발언도 아니고 예언자풍의 과장도 아니다. 그것은 현 정부의, 아니 IMF의 구제금융과 함께 신자유주의 사회개조 프로그램도 받아들인 1997년의 경제위기 이래로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운영하는 핵심 정책기조―시장을 향해 국가를, 사익을 위해 공익을, 발전적으로 해체하라!―를 일상적 화법으로 번역해놓은 것일 뿐이다.3) 눈치 빠른 한국 국민들은 그런 요점을 재빨리 간파했고 신속히 대응했다. 어떻게? 국가가 아니라 자본에, 정치가 아니라 경제에, 공적 덕성이 아니라 사적 이익에, 사람이 아니라 자산에, 불투명한 인격이 아니라 눈에 띄는 외모에, 사람들을 돕는 실력과 경험이 아니라 자신의 상품성을 드러내는 스팩과 자격증에, 아날로그가 아니라 디지털에 그리고 역사가 아니라 미래에, 선물(膳物)이 아니라 선물(先物, future)로서의 미래에… 올인함으로써! 


3) 물론 지극히 역설적인 상황이긴 하다. 정부가 국가를 해체하는 주도세력이라니! 하지만 반국가적 성격을 띠는 정부―공적규제를 ‘투자유치’라는 이름으로 철폐하고, 공공서비스와 인프라시설들을 ‘효율성’이라는 미명 하에, 마치 적산불하(敵産拂下) 하듯이, 자본가계급에게 민영화, 아니 사유화(privatization!)시켜주며, 정부의 일은 자산을 지켜주는 경찰업무와 자본을 위한 서비스로 이해하는 정부―라는 이 신자유주의적 역설은 “국가기구는 계급지배의 도구이다”라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는 역설이 아니라 실은 ‘정상적’(?)인 사태다. 국가를 ‘국민 모두의 것(res publica)’이라고 여기는 공화주의적 이념은 자본주의 하에서는 현실이 아니었으며, 노골적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 아래선 상징적 질서조차 아니게 된다. 

 

그런 약삭빠름이 이제 자신들의 뒤통수를 치며 등을 떠밀고 있다. 몇 가지만 따져보자. 자산증식에 올인했던 국민들, 가령 레버리지(leverage) 신화―부채도 자산이다!―를 믿고 주식이나 아파트, 뉴타운 등에 차입투자(투기!)를 했던 이들은 2008년 월스트리트 금융위기 이후 다수가 ‘신용불량’과 ‘하우스푸어’로 전락 중이다. 가계부채가 1000조원이 넘는데 임금이 오르지도 않고 경기가 살아날 기미도 없으니 갚을 길이 막막하고 부패만 창궐할 수밖에 없다. 매달 빚 갚고 먹고사는 일도 빠듯한 처지에, 질적으로 다른 가치나 새로운 삶의 방향에 손을 대는 일은 언감생심이다. 이들에게 무슨 미래가 있을까. 그럼에도, 수백만의 중소 자영업자들(자칭 타칭 ‘사장님’들)은 글로벌 무한경쟁에서 대기업의 생존과 이익증대를 위해 노동유연화(비정규직 양산) 정책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최저임금으로 알바생을 채용하는 이점을 누리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들 중 팔할이 가게 문 열고 3년 안에 파산한다. 자영업의 다른 이름은 ‘파산자 양성업’이다. 그래도 ‘살 놈은 산다’는 소리를 해가며, 더 넓은 무대에서 더 세게 경쟁해야 한다는 초인간적 깡다구를 자랑하는 민족이 대한민국 사람들이고, 이 나라에선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이상한 애국주의가 ‘정부는 시장에서 손 떼고, 규제는 다 풀고, 기업지원은 늘려라’는 요상한 시장주의와 맞물려 잘도 돌아간다. 이런 조건에서 출산이 늘 리는 만무해서, 우리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과 가장 급격한 고령화 속도, 가장 높은 자살률이란 기록들을 줄줄이 꿰차고 착실히 사라져가고 있다. 그 위로 삼성과 현대 그리고 한류 아이돌의 별들이 빛나니 가끔 쳐다보면서 위안을 삼으시라고, 언론에서는 주구장창 떠들어대고…. 

오늘날 보통의 대한민국 국민이 돈과 탐욕의 노예는 아니다. 다만 빚의 노예다. 우리는 미래를 돈과 맞바꿨다. 그런데 ‘모두가 부자가 되고, 주가가 5000을 달성할 것’이라는 집권당의 약속과 달리, 그래도 ‘경제 하나는 살리겠지’라는 태만한 기대와 달리, 경기가 하강 국면을 급격히 미끄러지면서 투자금이 수익이 아니라 손실이 되어, 감당하기 힘든 부채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왔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미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넘치게 갖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희망이 아니라 절망의 안색을 한 미래가, 우리 눈앞이 아니라 등 뒤에 들러붙어 있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들, 특히 궁민(窮民)들에게는 별스런 미래가 남아있지 않다. 너무 많이 가져다 써버린 것이다. 심지어 4대강 개발이니 뭐니 하며 후대의 미래까지 죄다 돈으로 바꿔버렸고, 후쿠시마 사고가 터진 후에도 계속 짓겠다는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는 최근 드러난 부실하기 짝이 없는 운영 실태로 보건대, 2만년 후의 인간과 생명체들의 미래까지 몽창 인출해다가 투기판에 날릴까 두려울 지경이다. 


얼마 전 뉴스에서 용산 개발이 본격화된다는 뉴스를 보았다. 화면에서 개발 후의 모습을 담은 조감도를 보았는데, 거인처럼 둘러선 최첨단 초고층 건물과 호텔, 쇼핑센터, 아파트, 공원들 사이로 한강에서 이어지는 수로가 있고 그 위로 요트와 유람선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어려서 본 21세기 미래도시의 경관과 흡사했다. 30조를 들여서 몇 년 내에 완공할 예정이란다. 두바이가 망하고 코앞의 송도 신도시 일대가 완성도 되기 전에 쇠락해가는 꼴을 볼 때, 얼마나 실현 가능성이 있는 꿈인지 난 모르겠다. 그런데도 용산 재개발 지역은 서울에서 유일하게 아파트값, 땅값이 오르는 지역이다. 의심 따위는 접고, 용산지역이 조감도가 고스란히 곧장 걸어 나온 듯한 휘황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다 해도, 나는 그게 하나도 좋아보이질 않는다. 그건 역사와 기억과 사람 냄새가 말끔히 지워진 진공으로 나를 질식시키거나, 혹은 테마파크의 동화 속 건물들처럼 뒷맛이 아주 황량한 가면성(假面性)을 엿보인다. 우리는 거기서 ‘남일당’과 거기서 불타 죽은 철거민들의 분노나 원한, 남겨진 소망 혹은 영혼의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엔 기억의 주체들이 과거와 상봉해 상대를 어루만지며 시간을 보낼 어떤 자리가 없다. 자본의 위용을 구현하는 새 용산의 청사진은, 테마파크는 연극의 무대장치처럼, 앞으로는 꿈을 발산하지만, 그 얄팍하고 경박스런 외양 뒤로 쓸쓸하고 무거운 허무를 감추고 있다. 용산에 지어질 최첨단 호텔과 쇼핑몰들은 북한이 선전용으로 지어놓은 아파트와 정반대인 것 같지만, 실은 동일한 본질을 갖는 풍경이다. 두 곳 모두 사람이 살면서 환경과 생기를 주고받는 게 아니라, 생명 없는 과장된 외양이 삶을 짓누르고 인간을 지워버린다. 거기서는 돈이 많든 적든, 다 뜨내기처럼 보인다. 머물 수 있지만 살 수는 없는 곳, 살아도 호화로운 감옥 독방이나 다를 바 없는 곳― 둘 다 선전시설에 불과하다. 하나는 당과 사회주의 이념이라는 추상물을 위해 사람이 봉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돈이라는 추상물의 증식을 찬미하기 위해 사람이 봉사하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생명을 빨아들인 물신이 무한 증식하는 곳, 거기서는 역사가 기억을 잃어버리고 일회용품처럼 변한다. 


과거는 지나간 것들, 이젠 없는 것들, 타자들의 나라다. 우리는 과거를 그것이 타자일 경우에 한해, 타자로서만 가질 수 있다. 그렇게 타자와 만나는 능력을 기억이라고도 부르고, 추억(그리움)이라고도 부른다. 그렇기에, 과거를 간직할 능력을 갖지 못하거나 타자와 접촉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미래다운 미래도 경험하지 못한다. 미래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타자의 땅이기 때문이다. 타자가 없는, 타자성을 모르는 자들에게 미래는 그저 현재의 기대의 연장일 뿐이고, 현재의 청사진을 실현할 공간일 뿐인 것처럼 보인다. 타자를 타자로서 만나는 능력이 없으면, 미래는 설레임이나 예감이나 희망으로 다가서지 않는다. 타자로서의 미래는, 또한 과거의 타자성은 그렇게 현재의 주체에게 자신들과 함께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을 요구하고 그 방법을 숙련시킨다. 어떤 능력인가? 현재 안에, 주체 안에 타자의 자리를 마련하는 능력과 방법이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 그들의 부재를 통해 우리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듯이 말이다. 그렇게 부재하는 어떤 것과, 그것이 없는 채로 지금 여기서 만나는 사랑의 기예(그리워할 줄 알고, 왠지 모를 예감에 설레며 기다릴 줄 아는 능력)가 또한 시간을 사는 기예이고 힘인데, 이제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그 ‘타자의 자리’를 돈으로 채우고 상품으로 메우는 것으로, 투자와 회수의 전략, 생산과 소비의 기술로 대체해왔던 것이다―이것이 자본의 시선이고 자본의 감각이며, 우리 앞에 그토록 현란한 물질적 풍요와 기술적 힘을 과시했다가, 어느 날 공황이라는 이름과 함께 거품처럼, 가증스런 사기꾼처럼 사라져버리는 자본의 존재 방식이다. 가장 뼈아픈 상실은 바로 이것―주체와 타자의 변증법적 연애술을 우리가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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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붕시대를 살아가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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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붕시대’를 살아가기

―증발하는 미래와 도래하는 타자 사이에서


‘멘붕’시대


이른바 ‘멘붕’의 시대다. 총선 이후 멘탈 붕괴와 무기력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주위에 여럿 있다. 나도 아주 예외랄 순 없다. 설상가상, 아니 ‘넘어진 놈 짓밟고 가는 발길’처럼 통합진보당의 부정선거와 당권파-비당권파 진흙탕 싸움이 우리 위를 덮친다. 적어도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진보’라고 여겼던 이들에게는, 저것이 적대적 외부세력의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고 우리가 믿었던 것)의 발길질이라 더 통탄스럽고 혼란스럽다. ‘도대체 멀쩡한 건 어디 있는 거지?’ 피아(彼我)를 식별할 수 없는 전장 한복판에 무방비로 서있는 듯한 요즘이다. 


‘멘탈(mental) 붕괴’라는 말이 여기저기 쓰이며 유행어가 된 것은 우리가 ‘실제로’ 멘붕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멘붕’이라는 가벼운 유행어로 실제로 일어나는 붕괴를 가리는 중인 것이다. 가장 훌륭한 가면은 바로 그 사람 자신의 얼굴을 본뜬 가면이어서, 아무도 그 가면 뒤에 그가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가 ‘현실사회’라 믿는 상징계가 무너지는 사건들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멘탈 붕괴’라는 재미있는 조어는 상징계 붕괴라는 상징화될 수 없는 외상적 체험들을 가리킴으로써, 가린다. 상징계의 깨어진 파편에 삶이 베이거나 그 잔해더미에 깔려 압사하기 전까지는 ‘멘붕’이라는 말로, 가까스로, 우리의 자아를 보호하고 위로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 멘붕 상태야”라고 말할 수 있는 동안엔 실제로 멘탈이 붕괴하는 사태는 막고 있는 셈이니까. 하지만 위로나 보호, 치유 같은 말들로 감당할 수 없는 사태들이 ‘멘붕시대’의 저류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 같다. ‘맨틀(mantle) 붕괴’가 바로 그것이다. 지진(地震), 해일, 지각변동, 기후의 발작과 생태환경의 급속한 악화―이런 자연의 격변을, ‘멘탈 붕괴’라는 심리의 격변과 운을 맞춰 ‘맨틀 붕괴’라고 불러봄직 하다. 2012년, 우리는 ‘멘붕’과 ‘맨붕’이 동시에 진행되는 시간을 지나고 있다. 문명사와 자연사의 동시적 격동―정말 심상치 않다. 게다가 그것이 전(全)지구적 현상이다. 이런 글로벌한 동조현상은 사상 초유의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한편에선 하늘―민심과 문명―이 무너지고, 다른 한편에선 땅이 무더지는 듯한 이 지구적 이중격변이 너무나 심상치 않기 때문에,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불길한 느낌들을 애써 의심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그런 불안을 꺼내놓지 않으려 주의를 기울인다. 까딱 잘못하면, 종말론 팔아먹는 사이비 광신도나 우울과 무기력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으로 보일게 뻔하잖은가. 그러나 건강한 생활인의 가면을 쓴다고 해서, 마그마처럼 들끓는 불안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 불안의 가장 밑바닥에 ‘후, 쿠, 시, 마’라는 네 글자가 있다. 

후쿠시마를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탁 막힌다. 거기에 어떤 생각을 던져 넣어보아도 아무런 말도, 형상도 되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도무지 ‘생각’이란 것이 진전되질 않는다. 후쿠시마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묘한 경험을 하곤 한다. 한편으로는 이런 저런 불길한 공상과 근거가 빈약한 잡념들이 뒤엉키며 칡덩굴처럼 자라나지만, 그 배후에서 하얀 구멍 같은 것이 점점 커지며 지우개처럼 따라붙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 저런 정념들 모두를 텅 비워버린다. 그것은 폭설이 모든 풍경을 하얗게 지워버리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캄캄한 어둠보다, 절망보다 더 무거운 무색(無色)의 압도적 공허. 그 무게 아래서는 비통함이나 공포마저 무릎이 꺾인다. 생활상의 온갖 근심으로 노심초사하던 사람에게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말기 암 선고가 그와 같을까. 모든 무게 있는 것들을 압살하는 제로의 중량.  


후쿠시마 이후


2011년 3월 일본 동북부(도호쿠) 지역의 앞바다에서 진도 9의 강진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발생한 엄청난 쓰나미가 후쿠시마 현의 해안지대를 쓸어버렸으며 2만 명에 가까운 목숨을 앗아갔다. 하지만 이 자연적 재해에 문명적 재난이 포개어지면서 문제는 아주 복잡한 것이 되고 말았다(이 복합성이야말로 앞으로 인간이 겪게 될 모든 재난의 성격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모델이다. 이미 인간은 자연과 문명이 구분되지 않는 세계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진에서 발생한 해일은 해안가에 위치한 원자력 발전소(후쿠시마 원전 1, 2, 3호기)를 파괴했고, 대지진과 쓰나미보다 더 묵시록적인 충격을 던진 것은 원전의 냉각장치가 고장 나고 연료봉이 녹아내리면서 격납고가 폭발하는 등 원자로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엄청난 양의 방사능 물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쏟아내기 시작했다”고 썼다. 왜내면 방사능 유출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보도에 따르면, 사고 원전은 지난 해 여름쯤 통제력이 일부 회복돼 냉각장치가 가동되면서 방사능 유출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도 원전이 정상화된 것이 전혀 아니며 기껏 원전의 완전 폐기를 위한 준비 절차를 진행하고 있는 수준이다. 녹아내린 연료봉은 원자로 바닥에 고여 핵반응을 일으키며 엄청난 고열을 내고 있는데 만약 원자로 바닥이 뚫고 토양으로 스며들기 시작하면 이러한 인류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어떤 재앙으로 이어질지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다. 게다가 원전 근처의 엄청난 방사능 수치 때문에 소수의 인원만이 죽음을 각오하고 접근해 짧은 시간만 작업을 하고 나올 수밖에 없는 형편이어서 작업 속도도 더디고 언제 완료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보이지 않고 냄새도 없고 잘 느껴지지도 않지만, 몸을 관통하며 치명적 내상을 입힌다는 방사능은 대류를 타고 서울에 내려앉기 전에, 먼저 불안과 우울증이 되어 나를 잠식해갔다. 죽을까봐 두렵거나 건강이 상할까 염려가 되어 그런 게 아니었다. 그것은 촛불시위 때의 광우병 위험과 비슷했다. 그때 내가 느낀 분노와 불안은 미국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리거나 프리온이 내 뇌에 스폰지처럼 구멍을 숭숭 뚫을까 하는 염려나, 건강을 망쳐 수명이 짧아지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나를 뒤흔들던 것은 ‘공적인 감정’이었다.1) 


1) 이때 공적(公的)이라는 것은 공화국이라고 할 때의 public이 아니다. 그것은 김지하가 쓰는 “天地公事”라는 개념의 그 “公”이다. 이 “공적 감정”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나, 즉 신체를 넘어선 나, 또한 나를 넘어선 우리, 우리의 자식들과 후손들, 억압된 조상의 기억 그리고 다른 생명들과 함께(共) 동참해 느끼는 감정이다. ‘公的 감정’은 ‘共的 감정’이며, 원래 감정(affect)은 감각과 달리, 개인이나 신체로 환원되지 않는다. 공적 감정은 ‘타자의 고통을 함께 겪는다’는 뜻의 compassion에 가깝다. 그것은 감각의 텔레파시이며 그 텔레파시는 시공(時空)이라는 경험적 조건을 초월한다.   

 

2011년 봄, 나는 “이제 지옥문이 아가리를 벌렸다”고 썼다. 지옥의 숨결과 악취(방사능)가 흘러나오는 거대한 구멍…. 아우슈비츠의 지하 가스실로 끌려가는 유태인들처럼, 아무런 희망도 없는 텅 빈 눈빛의 인간들과 지상의 뭍 생명들이 거대한 행렬을 이루고 발을 질질 끌며 그 구멍으로 삼켜지듯 걸어 들어가는 끔찍한 이미지가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심약한 인간으로 살아오지 않았다. 소중히 품었던 희망들이 맥없이 무너지고, 보기 흉하게 꺾어지는 것을 드물지 않게 보아온 나는―누군들, 어느 세대인들 그런 상처가 없으랴마는― 더 이상 낙천적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람시가 “이성의 낙관주의”라 불렀던 어떤 것을 지키고자 했었다. 후쿠시마는 그것을 뺐어갔다. 미래를! 희망을! 사람들이 사랑하며, 미워하며, 다투고 배우고 화해하며, 울고 웃으며, 새끼를 낳고, 기르고, 일하고, 놀고, 늙고 천천히 이별과 슬픔의 뜻을 음미하며 죽어가는 그런 세상.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니라,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런 모든 드라마들이 펼쳐질 어떤 무대, 신의 품과 같은 어떤 대지…. 후쿠시마 이후로 나는 더 이상 그런 것을 전제할 수 없게 돼버렸다. 너무나 당연하기에 믿는다는 생각조차 가질 필요가 없었던 삶의 지평이 갑자기 꺼져버렸다. 후쿠시마에 벌어진 악마의 아가리, 저 검은 구멍은 세상의 영구성과 생명의 지속성에 대한 믿음을 제일 먼저 집어삼켰다. 그런 경악스런 박탈의 느낌 속에서, 나는 세상이라는 생명들의, 삶들의 공동지평의 실존을 처음으로 강하게 느꼈다. 파괴되고 오염되면서 돌이킬 수 없이 상실되고 있는 그것―임박한 종말 앞의 세상. 그것이 아주 구체적인 느낌과 이미지들로 스멀스멀 피어올라 짙고 검은 안개처럼 나를 잠식해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종말에 관한 생각들을 부인하고, 묵시적 이미지들을 억압하고, 불안해하는 자신을 야단치고, 비웃고, 빨리 생활의 다른 장면들로 관심을 돌리라고 채근하고, 마지막엔 ‘그 모든 게 네 생각처럼 된다하더라도 너는 저주받은 카산드라처럼 아무것도 바꿀 수 없노라고 설득하면서,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를 수가 있었다. 불안이 진정되거나 일상적 삶의 안정이 복구된 것은 아니고, 그럭저럭 별일 없는 척하는 연기가 가능하게 된 수준이었다. 나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다소간은 태연하게 이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에 약간 놀랐다. 다들 나와 비슷한 과정을 겪어서 그런 척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 생각이나 감정이 터무니없이 과장된 것이었는지,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과장된 것이든 아니든, 불안은 마음 바닥에 수시로 출렁이는 캄캄한 물처럼 고여 있다. 후쿠시마 이후, 가슴 속에 불길한 우물 하나가 생겨났고, 나는 무서워하면서도 가끔 그 우물로 다가가 바닥이 없는 그 캄캄한 암흑의 깊이를 들여다본다. 무저갱(無低坑).   


죽음을 대신하는 단어들이 있다.2) 어떤 이에게는 병명(病名)일 테고, 어떤 이에게는 누군가의 이름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외상적 사건을 가리키는 어떤 단어이고 기타 등등이다. 후쿠시마는 인류에 내려진 사형선고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제 인류의 죽음을 대신하는 한 단어가 되었다. 다자이 오사무 단편소설에 나오는 알 수 없는 소리 “쾅, 쾅, 쾅”처럼, 그것은 모든 주체적 행위와 감정들을 일순 무(無)로 돌려버린다. 무기력과 권태를 뒤에 남기고서. 하이데거나 레비나스 같은 철학자들은 무기력과 권태를 존재자의 자기정립의 근본음조나 기분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런 자기정립의 시간과 여력이 남아있을 것인가?


2) 실은 ‘죽음’이라는 말 자체가 죽음을 대신하는 단어다. 우리가 ‘죽음’이란 말에 이렇게 저렇게 부여하는 의미나 느낌이나 상상 그리고 그에 대처해 만들어낸 모든 제도적 장치들―종교에서 상조보험에 이르기까지―은 사실 죽음 그 자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며, 다만 공허(the Void) 앞에 선 우리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가르쳐주는 데만 유용할 뿐인지 모른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말들 전부가 사물이나 사태들과 전혀 다른 태생을 갖는다. 말들은 각각 그 말들이 가리키는 어떤 사물이나 사태와 대면하고 있지만 등 뒤에서 그 말을 묶고 있는 끈들은 사물이나 사태가 아니라 다른 말들에 엮여있다(어쩌면 사정은 사물이나 사태 쪽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결국 말과 사물은 무연(無緣)하고 그렇기에 서로 어긋나고 미끄러지면서 세미오시스 같은 의미화 운동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또 한편으론, 이 모든 말들과 저 모든 사물 및 사태들이 마치 자명하게 엮여있기나 한 것처럼 여기는 한에서--라캉이 '누빔점'이라 부른 어떤 작용이 있는 한에서-- 언어라는 사태가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말들 전부를 꼭두각시처럼 끈으로 묶어 조종하는 어떤 주체가 있을까? 또한 사물과 사태들 전부를 묶는 끈의 네트워크를 조종하는 어떤 주체가 있을까? 그 두 주체(서로에겐 무연한 타자)가 마치 한 몸인 양 호흡을 맞춰 움직여야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이 언어라는 현상이 이정도로 실효적일 수 있지 않겠는가? 혹은 오른손으로는 말들의 네트워크 전체를, 왼손으로는 사물과 사태의 네트워크 전체를 움직이며 그때그때 그것들을 만났다 떨어졌다 하게 함으로써, 언어라는 현상을 성립시키는 하나의 신적인 꼭두각시 조종사―우리는 그것을 (말과 사물의 관계를 주제하는) ’주체-타자’라고 불러보자. 지금 말로 옮길 수 없는 공백, 혹은 트라우마적 사태에 직면해 ‘붕괴’를 겪고 있는 ‘멘탈’은 바로 그 꼭두각시 조종사(‘주체-타자’)의 마음(몸)을 가리킨다. 덧붙이자면, 말과 사물 양편의 주인(대표)을 붙여놓은 모양새인 이 ‘주체-타자’는 인간문명으로도 자연사물로도 전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제3의 중간적 존재이다. 아마도 그것은 ‘말하는 동물’, ‘문명적 자연’ 등등의 모순적 결합으로, 모순적 결합이기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어긋남과 갈등의 운동으로 간주돼야 할 것 같다. 이 ‘주체-타자’라는 존재의 운동방향이 급선회할 조짐―우리가 ‘멘붕’이란 말로 가리(키)는 어떤 것은 바로 그런 변동이 아닐까?  

 

발 아래선 맨틀붕괴가 일어나고 후쿠시마에선 ‘노천 방사능 발전’이 계속되고 있다. 머리 위에선 하늘―민심이라는 집합적 멘탈―이 산산조각 난 채 떨어져내려 아무데서나 부패해 간다. 천지간 어디에 몸을 두어야 하나? 미친놈처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쳐야 하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신발과 모자라는 문명의 상징들을 썼다 벗었다하면서, 오지 않는 고도(Godot)를 기다려야하나? 어쩌면, 광신자의 말처럼, 이 모든 재난(disaster)은 문 앞에 당도한 천국이 우리에게 마음을 돌리라고, 삶의 방향을 돌리라고 요구하는 전회(轉回)의 노크 소리―쾅, 쾅, 쾅―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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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의 생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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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零度)의 생 앞에서

 


이런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요즘 들어 ‘0’만큼 중요하고 긴급한 주제는 없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인간 문명 전체가 0으로 환원될 위기 앞에 서있다는 얘기는 광신에 사로잡힌 종말론자의 기우만은 아닐 것이다. 삶이 무화(無化)되는 죽음의 문제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에게만 심각하고 의미 있는 문제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0과 관련해 세 가지 차원의 사유를 동시에 전개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는 수학적 0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사에 있어서 0의 의의이며, 마지막으로 정치사회적 차원에서 0의 가능성이다.  

 

 

수학적 영(0)

 

수학적 0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 심오함을 다 캐낸 사람도 아직 없는 것처럼 보인다. 0은 자릿수 개념을 통해 10진수 체계를 성립시켰다. 1부터 9까지의 자연수는 0이라는 표기를 덧붙여 반복됨으로써(1, 10, 100…) 무한히 확장돼 나갈 수 있고, 이 편리한 표기법은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 같은 사칙연산을 보편화시킬 수 있었다. 0 덕분에 위치--1의 자리, 10의 자리, 100의 자리…--에 의한 수 표현이 가능하고 그로 인해 셈이나 수의 기록도 편리해진 것이다. “없는 것을 숫자로 0이라 하자. 값이 없는 자리를 0으로 하자.” 이처럼 평범해 보이는 발상이 수학에, 또한 수학을 사용하는 문명 전체에 엄청난 발전을 가져왔다. 0의 발견은 상상 속에나 존재했던 엄청난 크기의 수들을 현실적인 계산 가능성의 세계로 끌어내리는 역할을 했다(0의 발견자로 추앙되는 브라마굽타는 7세기 경 인도의 천문학자였고, 당시 천문학자는 신의 뜻을 살피는 사제이기도 했다. 결국 0은 신이 인간에게 자신의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열어준 작은 문(門)과도 같은 것인지 모른다).

 

 

 

 

비어 있는 자리를 나타내는 숫자, 또는 아무것도 없음을 나타내는 숫자인 0은 무(無)와 무한(無限)이 포개진 숫자이기도 하다. 어떤 수에 0을 더하거나 빼도 그 수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0을 곱하면 모든 수는 0이 되며, 0으로 나누면 어떤 수든 무한이 된다. 0은 얼마나 기묘한 평등함을 가져오는 것인가. 0은 모든 수를 무로 환원시키고, 어떤 수에든 영원의 가능성이 잠재돼 있다는 복음--아무리 천한 자에게도 하나님의 은총이 깃들어 있고, 아무리 하찮은 미물에게도 불성이 잠재돼 있다--을 전한다. 그리하여, 차이와 위계로 이뤄진 수들의 실정적이고 무한한 체계는 0에 의해 가시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0에 의해 무화되기도 한다.

그것은 산술적이고 양적인 평등을 넘어서는 평등,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공(空)함을 깨달은 자 앞에 나타나는 어떤 새로운 평등, 즉 무등(無等)의 지평 열어 보인다. 0 -- 이 찌그러진 원환(圓環), 타원처럼 보이는 작은 기호에, 어쩌면 인간 사유의 모든 형이상학적 과거와 탈(脫)형이상학적 미래 전체가 응결돼 있는지도 모른다.
 

수학사에는 무한에 대해 탐구하다 미쳐 죽은 사람들이 여럿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집합론의 창시자인 칸토르다. 칸토르는 ‘무한을 셀 수 있다, 무한에도 종류가 있고 크기가 있다’는 것을 입증한 사람이다. 마치 0을 셈 안에 들여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 고대 인도인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칸토르의 사상은 당대의 수학자들에게 지극히 위험하고 불합리한 사고방식으로 비난을 받았다. 실제로 칸토르의 집합론은 수학이 논리적으로 완전무결한 체계가 될 수 없다는 괴델의 증명을 불러들였다. 괴델에 따르면, 완성된 증명의 체계 안에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입증할 수 없는 적어도 하나의 명제가 필연적으로 들어있다. 과감한 비약을 시도해도 좋다면, 우리는 괴델의 증명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진술을 끌어낼 수 있다. 수나 명제로 이뤄진 이성적 체계 안에는 그 이성이 증명할 수 없는 적어도 하나의 항이 반드시 존재하며, 이 항이야말로 이성의 체계가 자신을 정립하면서 망각한--니체가 ‘기원에 대한 망각’이라 부른-- 어떤 근원적인 것의 흔적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성 안의 타자’라고 불러볼 수 있다. 7세기 무렵 사제이자 천문학자였던 브라마굽타가 산술 체계 안에 0이라는 숫자를 도입해준 덕분에, 그리고 그것이 800년의 세월 동안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에 도달한 덕분에 건축될 수 있었던 근대 수학의 장엄한 성채는, 무이자 무한인 0이 그 현기증 나는 위력을 드러내자 안으로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0은 인간 이성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신이 보낸 ‘트로이의 목마’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대학자도 0이라는 이상한 숫자를 멀리하라고 경고했었나보다.

 

 

정치-사회적 영(0)

 

우리는 0이 지닌 위험함--모든 질서를 뒤흔들기 위해 찾아오는 '없지만 있는' 어떤 힘, 혹은 음성 언어 상으로는 식별되지 않지만 표기할 경우 오자(誤字)로 식별되는 디페랑스(differance)의 'a' 같은 것--을 수학사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정치사회적 0의 존재, ‘없지만 있는’, 혹은 ‘있지만 없는’ 어떤 사람들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알쏭달쏭한 말이지만, 처음부터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펼쳐보라. 거기 마치 처음 보는 듯 낯선 동창의 얼굴을 하나쯤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있었던’ 어떤 사람의 얼굴. '아, 이런 애가 나랑 1년, 2년, 어쩌면 3년 내내 곁에 있었던가?!' 여기서 공포영화적 상상력까지는 한 발짝만 더 나가면 된다. 만약 그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10년 전 앨범에서도, 20년 전 앨범에서도 발견된다면…. 이 유령 같은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런데 모든 공포영화는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현실을 반영한다. 때문에 그 익숙하고도 낯선(unheimlich) 존재에게는 반드시 사연이 있고, 그 사연은 집단의 폭력--폭력에 대한 묵인이나 무관심이 거기 포함된--과 상관적인 경우가 흔하다. 요컨대 그는 공동체의 희생양의 현신이다. 다시 인도로 한번 돌아가 보자.   

 

 

 

 

인도의 엘리베이터엔 ‘0층’ 있다고 한다. 우리는 지상의 첫 번째 층을 ‘1층’으로 표기하지만 인도인들은 ‘0층’이라고 쓴다. 0이라는 숫자를 발견한 고대 인도인들의 후손답다. 브라마굽타가 0을 발견하기 이전에도 0, 그러니까 무(無)의 개념을 알고 있는 문명들은 많았다. 중국인들은 재산을 양수로, 빚을 음수로 계산해 재산과 빚이 똑같을 때는 0(‘없음’)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며, 마야인들은 0을 자릿수로 쓸 줄도 알았다(가령 22와 202를 구분하기 위해 0과 비슷한 모양의 숫자를 써넣었다). 앞서 말했듯이, 인도인들의 진정한 기여는 0을 하나의 숫자로 보고, 수와 계산의 체계 안에 0을 도입했다는 점에 있다. 그러니까 0은 이전과 달리 그냥 ‘없음’을 가리키는 표기가 아니라 하나의 숫자로서 수와 계산의 체계 안에서 작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0의 도입과 더불어, ‘있다’와 ‘없다’만이 아니라 ‘없는 것이 있다’는 모순적 개념이 논리적 체계 안에 들어온 것이고, 무(無)의 작용을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이 0과 함께 열린 것이다. 그런데 인도에는 0층만 있는 게 아니다. 가장 밑바닥, 0층의 사회적 존재들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인도의 카스트(계급제도)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넷으로 구분되지만 카스트에 끼지도 못하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불가촉(不可觸) 천민들이다. 인도 이외의 많은 사회가 오랫동안 계급적 구조를 가져왔다. 네 개의 계급적 위계가 있다는 것은 인도만의 특이함이 아니다(유교문화만 해도 사, 농, 공, 상이라는 직능으로 표기된 네 개의 위계적 신분 구별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엄격히 말해, 우리가 계급 제도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다고 여긴다면, 그건 아주 순진한 생각이리라). 인도의 특이한 점은 불가촉 천민이라는 ‘계급 외적 존재’를 사회 안에 공식화해 들여놓은 것이다. 이것은 계급구조를 지극히 안정적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계급제도의 모든 스트레스를 ‘액받이’해주는 어떤 집단이, 마치 입시교육의 모든 스트레스의 ‘액받이’인 왕따처럼 가까이에 있으므로--, 그와 반대로 계급구조 자체를 무화시켜버릴 위험도 내장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계급 구조의 일원인 어떤 사람이 불가촉 천민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나와 우리 모두는 불가촉 천민이다, 우리는 모두 0도의 존재들이다’라는 놀라운 통찰에 도달하고, 그런 급진적 통찰을 제도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계급적 위계 전체를 상대적이고 우연한 것으로 뒤흔들어버린다면?!

 

 

정신사의 영(0)

 

 

나는 숫자의 체계에 0을 도입한 것과 계급의 체계 안에 불가촉천민이라는 계급 외적 존재를 들여놓은 것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둘 사이에는 어떤 구조적 유사성이 엿보인다. 불가촉 천민 같은 존재들을 사회 안에 상존시킨다는 발상은 지극히 위험하고 역겨운 짓이지만, 어쩌면 그와 정반대의 가능성을, 인간의 정치사회적 체제 안에 일종의 시험대를 들여놓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 인류의 정신사에 0을 도입한 또 하나의 위대한 이름이 역시 인도와 관련돼 전해지는 것이 순전히 우연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는 싯다르타, 즉 부처이다. 원래 0은 순야(sunya, 空)라는 인도어에서 유래했는데 이 말은, 아시다시피 불교--특히 대승 불교--의 중심 어휘이다.  

 

 

부처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 즉 색계(色界)에 공(空)의 차원을 들여놓았다, 혹은 공의 차원을 발견했거나 깨달았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모든 있는 것들은 없는 것이며, 없음은 그냥 없음으로 치부해 무시할 어떤 것이 아니라 ‘있는 없음’으로 간주해 성찰되어야 한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는 실정적 세계--색은 색이고 공은 공이며, 색과 공이 전혀 별개의 자리에서 따로 놀던 세계--는 여기서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그것을 설립한 경계와 함께, 영영 잃어버린다. 있음과 없음을 가르는, 기존에는 의식되지 않던 경계에 대한 반성적 사유가 나타난다. 사실 싯다르타는 계급 제도의 최상층에 속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깨달은 자인 부처는 계급 제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가촉 천민과 그 구조적 위상이 동일하다. 그 둘은 모두 계급제도의 0도를 사는 자이다. 어떤 면에서, 부처가 힌두교에 가한 충격은 예수가 유대교에 가한 충격과 동일한 성격을 지닌 것 같다. 예수는 하나의 정치사회(polity)가 존립하기 위해 폭력적으로 배제한 희생양들의 무고함을 증언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희생양과 동일한 존재로 만듦으로써(십자가 위의 예수), 신이 바로 그 0도의 삶을 견디는 자들에 깃들어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인간적 세계 바깥에서 절대적 타자로 존재하던 유대교적 신은 그 종말을 고하게 된다.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법 바깥의 존재(法外人), 호모 사케르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불가촉천민’과 유사한 정치사회적 존재의 기이한 계보를 서구의 정치와 법, 형이상학의 역사를 관통해 추적하고 성찰해오고 있다. 이 사유의 기획에는 ‘호모 사케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데, 고대 로마법의 용어인 ‘호모 사케르(Homo Sacer)’--직역하면 ‘성스러운 인간’--는, 인도의 불가촉천민처럼, 시민이 그를 죽여도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는 자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들은 우리 주위에서 살아갈 수 있지만, 그 정치사회적 의미는 0인 존재이기에 그를 죽여 없앤다 해도, 그 행위에 살인이라는 범죄를 씌울 수는 없는 것이다. 호모 사케르는 있지만 없는 자--마치 불법 이주 노동자들이 국법이라는 의무와 권리의 체계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듯이--이고, 생물학적으로 살아있어도 죽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생명이다. 가령 뇌사자의 장기를 합법적으로 적출할 수 있다면, 뇌사자는 인공 호흡기로 생물학적 생명을 유지하고 있더라도, 살아있는 법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범주에서는 제외돼 있어야 한다. 끔찍한 일이지만, 납치된 불가촉 천민들의 장기를 적출해 매매하는 일이 인도에서 종종 일어나고 있다.

 

 

 

 

이 ‘0도의 존재’들은 우리의 정상적인(normal) 정치 사회적 세계가 그 위에 세워진 어떤 끔찍한 기초에 대한 고통스런 성찰로 우리를 이끈다. 칸토르와 괴델이 아름다운 이성적 수학 질서에 일으킨 분란, 또는 창발적 혼란과 비슷한 어떤 것이, 여기서 아주 위협적인 형태로 우리 자신의 "건전한" 정치사회적 상식을 겨눈다. 우리, 이 ‘아름더러운’ 질서의 정규적 일원들을 향해서 ‘너는 저 0도의 사람들과 무슨 관계인가?’라는 물음을 강요한다. 그 물음은 사소하지 않으며, 한가한 것도 아니다. 지젝이 말했듯이, 호모 사케르는 더 이상 사회의 어떤 소외된 집단이나 노숙자처럼 특정한 처지에 있는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법적인 질서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들과 호모 사케르를 구분하는 일은 사람들을 서로 다른 두 부류로 구분하는, 단순히 ‘수평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점차로, 어떻게 ‘동일한’ 사람들이 다른(중첩부과된superimposed) 두 가지 방식으로 다루어질 수 있는가하는 ‘수직적인’ 구분이 되어간다. 요컨대, 법의 차원에서 우리는 합법적인 주체인 시민으로 간주되나, 법의 외설적인 초자아 보충(super-ego supplement)의 차원, 텅 빈 무조건적 법의 시선 아래서는, 우리 모두가 호모 사케르로 취급된다.” (실재의 사막)

 

 

근원적 양극화에 관하여

 

양극화 시대라고한다. 한때 ‘20대 80 사회’라는 표현이 있었지만, 이제는 훨씬 더 과격한 표현이 공감을 얻고 있다. 지금은 ‘1% 대 99%’의 사회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란 이름으로 한 세대를 휩쓴 저 자본주의적 양극화의 격류는 지금이라도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점점 더 악화--‘0.1% 대 99.9%…’--될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자들에게 기부를 유도하거나 세금을 강화하고, 복지 제도를 재정비하고, 비정규직 차별을 철폐하는 등의 조치들을 단행해 다시금 중산층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로 복귀(?)하려는 시도를 하고자 한다. 일단은 다행스런 반작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보다 발본적인(radical) 차원에서 생각해보지 않으면, 같은 문제가 반복될 뿐이며, 언뜻 달라진 듯한 외양 속에서 문제가 보다 심각하게 악화될 수도 있다.

 

 

 

 

나는 ‘20 대 80’이라는 경제적 구분, ‘1% 대 99%’라는 정치적 구호 보다 아래에서 ‘0과 1’, ‘무와 유(有)’, ‘무로 간주되는 어떤 존재들’과 ‘유(有)와 유의 증식으로 여겨지는 어떤 허상들--가령 화폐와 자본이라는 신용체제의 물신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곧 닥칠 선거처럼 시급한 현안에 비해 무척 한가한 짓거리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긴급해 보이는 이슈들 아래에 도사린 거대한 메트릭스를 고려한다면, 그것이 결코 한가할 때 차 한 잔 마시며 사색할 그런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현실적 유(有)들 아래서 또한 위에서 잠재적 무인 0을 발견하는 것, 초월적이고 이행적인 무인 0의 의미를 급진화시키는 것….    

 

 

0의 자리를 점령하라

 

슬라보예 지젝은 지난 해 ‘월스트리트 점령(Occupy Wall-Street)’ 시위대 앞에서 짧은 연설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은 농담을 소개했다.

동독의 한 기술자가 시베리아로 장기 출장을 가게 됐다. 떠나기 전, 공산당의 서신검열을 걱정한 그는 친구와 미리 약속을 해뒀다. ‘파란색 잉크로 쓴 편지 내용은 진실이고 빨간색 잉크로 쓴 것은 거짓이니 믿지 말게.’ 몇 달 후 친구는 편지를 받았다. 파란색 잉크로 쓰여진 것이었다. ‘여긴 정말 좋은 곳이야. 시장엔 식품과 좋은 물건들이 가득하고 극장에선 좋은 서방의 영화를 상연한다네. 아쉽게도, 딱 하나 구할 수 없는 게 있는데, 빨간색 잉크일세.’

지젝이 이 농담에 덧붙인 논평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사는 꼬라지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원하는 모든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있(고 스스로에게도 그렇게 말해 왔)다. 그런데 그 동독 기술자의 파란색 편지에서처럼,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이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천국에 없는 게 딱 하나 있다. 뭘까? 이 체제 자체를 의심할 자유, 이 체제를 벗어나 살 자유--빨간색 잉크다!

그는 ‘월스트리트를 점령하고 있는 당신들, 당신들의 행위들은 우리 모두에게 그 빨간색 잉크를 선물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쩌면, 이제 우리가 고민하고 실천해야할 그 빨간색 잉크--기성의 체제에 붙들리지 않는 ‘사자 같고, 바람 같고, 연꽃 같고, 무소의 뿔 같은’ 자유와 행위--는, 동독 기술자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모든 파란색 문장들을 허위로 만드는, 혹은 무화시키는, “여기에는 빨간색 잉크가 없다네”라는 파란색 문장처럼, 0이라는 기표 아닌 기표로 우리 앞에 내내 놓여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무크지 <CONTURE> 2012 Vol.2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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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주어를 찾아서-<나꼼수>돌풍의 정치적 무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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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주어를 찾아서
--<나꼼수> 돌풍의 정치적 무의식

2007년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이명박 씨는 선거일을 코앞에 두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적이 있다. BBK 주가조작 사건에 연루돼있다는 의혹을 부인하며, 만약 그게 사실로 밝혀진다면 후보를 사퇴하거나 나중에 대통령이 돼서라도 책임지고 물러나겠다고 공언해온 터였는데, 자신이 BBK를 설립했다고 말한 광운대 강연 동영상이 투표일 직전 언론에 공개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이 후보의 대변인이었던 나경원 의원은 기자들을 모아놓고, 한국현대사에 길이 남을 놀라운 변명을 내놓았다. “(그 동영상에는) BBK를 설립했다는 말만 있지 ‘내가’ 라는 주어가 없다.” 뻔뻔한 거짓말이었다. 뉴스에 보도된 동영상을 보면 이명박 씨는 분명 “저는 요즘 BBK라는 회사를 설립하고…”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부에는 주어가 없다

당장의 매를 피한답시고 얼떨결에 내뱉은 저 “주어가 없다”는 변명이야말로 향후 이명박 정권의 행태와 대한민국의 상태를 요약해주는 문장이라 할 만하다. 취임 초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대폭적 수입개방 결정은 검역주권 상실이라는 문제와 광우병 불안을 자극하여 ‘촛불시위’라는 국민적 반발을 촉발시켰지만, ‘광우병 사태’라 명명된 이 ‘주체(주어) 없는 과정’은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끝난 것인지 아직도 미스터리하다. 이듬해 용산에서 폭력적 재개발에 항의하던 철거민이 경찰의 무리한 진압 과정에서 여섯 명이나 불타죽는 참사가 발생했지만, 정권은 1년이 다 되도록 사건을 방치했다. ‘여기 사람이 있어요’ 라는 비명에 대해 ‘거기에 나는 없어요’ 는 무책임한 응답을 보냈던 셈이다. 다음 해, 백령도 앞바다에서 천안함이 침몰해 장병 46명이 한꺼번에 수장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책임지는 군 장성이나 정치인은 하나도 없었고, 납득할만한 원인규명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파란색 매직으로 ‘1번’이라고 쓰여진 ‘어뢰’가 추정되는 주어(주체)의 잔류물로 제시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주어는 없다’의 또 다른 버전―“주어(북괴)는 지금 여기엔 없다”―에 불과하지 않은가. ‘4대강 살리기’로 이름을 바꾼 대운하사업도 ‘주어 없음’의 예외가 아니다. 물경 24조의 혈세가 투입됐고, 앞으로도 매해 8천억 이상의 유지비가 소모되며, 장차 한반도의 기후까지도 바꾸게 되리라는 이 대공사는 완료됐다는 지금까지도 왜,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된 것인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하며, 누가 어떻게 뒷감당을 할지 역시 아무도 모른다. 국정을 이렇게 운영해도 되는가. 누구 말마따나 ‘동네 구멍가게도 이따위로 하지는 않는다.’ 대한민국은 지난 4년간, 비리 기업이 ‘이중장부’를 만들 듯, ‘이중정부’로 운영돼왔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게 아니고선 4년 내내 계속돼온 이 이상한 대한민국―‘주어(주체) 없는 통치’―을 이해할 길이 묘연하다. 그렇다면 진짜 정부, 사람들이 ‘가카의 정부’라고 부르는 ‘이면(裏面)정부’ 는 도대체 어디에 숨겨져 있는 것일까? 도대체 원하는 게 무엇일까(Che Vuoi)?


나꼼수, 주어를 찾(아주)다


올봄, 라디오 프로그램 하나가 소리 소문 없이 입을 열었다. 이전 같으면 ‘해적방송’이라 불렸음직한 이 팟캐스트(podcast: 스마트폰용 인터넷 라디오방송)는 정치토크쇼라는 형식을 통해, 촛불시위 이후 오래 비어있던 공동체의 언어적-정치적 무의식에 ‘다이렉트’하게 접근해가면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돌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매회 다운로드 횟수가 600만 이상이고, 청취자 신뢰도도 85%에 달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분량까지 합하면 거의 1천만에 육박하는 청취자들이 이 프로그램에 귀를 기울인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게다가 공중파 라디오처럼 그냥 듣고 끝나는 게 아니다. 트위터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나 오프라인 토크 콘서트와 맞물리면서 청취자들이 이 프로그램의 몸통으로 참여하고 있다. 사실 프로그램 자체만 보면, 마포의 싸구려 스튜디오에서 네 명의 논객―각자의 개성과 자질, 기백 등은 출중하다―이 두어 시간 웃고 떠든 내용을 자력으로 편집하고, 자비로 서버에 올려, 무료로 다운로드 받게 하는 게 전부다. 청취자들은 이처럼 빈 데가 많은 소스를 자신의 상상력과 추리력, 기부금과 자원노동으로 채우며 그 성장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 같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셀프 서비스다. 어떤 콘텐츠도 이 ‘소셜 셀프(사회적 자아)’의 동기를 유발하지 못하면 네트워크에서 성공할 수 없다. 돈으로 처바르고, 알바 풀어서는 SNS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얘기다.




불과 반년 만에 이 프로그램--“능력에 따라 참여하고 욕망에 따라 분배받는 무상의 언어-공동체”--의 정치적 영향력은 (무상급식 찬반투표와 시장선거 등에서) 집권여당을 울게 만들고, 조중동과 방송3사의 기를 꺾어 놓을 정도로 커졌다. 이 프로그램의 제목은, 앞서 말한 사정에 따라, 정확히 ‘주어를 찾아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즉 “나는…”으로 시작한다(이 방송의 첫 토크 주제가 ‘BBK 총정리’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주어 없음’이란 신비한 베일 뒤에 있는 자, 저 숨은 “이면정부”의 위용은 어떤 것일까? 의미파악이 불가능한 사물(‘쥐’)이거나 지시대상 없는 순수한 기표인 ‘가카’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베일을 걷어내자 눈앞에 나타난 것은, 경악스럽게도, 동화 속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우스꽝스럽고 적나라한 나체였다. “…꼼수다.” 고작 꼼수! 큰 타자는 없고, 큰 타자의 구멍(주권자의 공백)을 들락거리며 끝없이 자산을 쟁여 모으는 어떤 ‘꼼꼼한’ 생명체의 ‘애잔한’ 생활상이 엿보일 뿐이다. 4천만의 국가쯤은 한낱 ‘수익모델’ 정도로 보시는 가카의 호연지기와 똥폼?품위와 국격 드립?을 잔뜩 잡은 우스꽝스런 인간 군상, 아니 ‘경제 동물들(economic animal)’의 정부. 거기서 우리를 압도하는 것은 인격이나 카리스마가 아니라 몇 천억, 몇 조를 오가는 돈의 액수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게 다 일까? 어쩌면 우리가 ‘주어 없음’의 베일 뒤에서 본 것은 ‘가카’라는 거울에 비친 대한민국의 적나라한 얼굴은 아닐까. ‘후쿠시마 이후’에도 원전을 지어 팔겠다는 나라. ‘용산참사 이후’에도 재개발 이익에 눈이 벌건 국민들이 있고, ‘쌍용차와 한진중공업 이후’에도 기업과 수출만이 살길이니 노동자는 닥치고 죽으라는 정부가 있고, 월스트리트와 두바이가 무너져도 오류는 ‘복지 포퓰리즘’에 있지 ‘금융투기’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언론들이 여전히 목청이 제일 큰 나라. 전국 1등 하라고 수년간 아들을 고문하는 엄마와 성적조작이 들통 날까봐 패닉상태에 빠져 엄마를 살해한 아들과 그렇게 죽이고 죽은 모자(母子)가 시체 썩는 악취 속에 8개월을 함께 보내도록 방치한 아버지가 있고, 누구도 그런 참극이 ‘남의 가족일일 뿐’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나라. 이 지경인데도 그런 끔찍한 기사 옆에 “시장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한미 FTA로 ‘대한민국 성공신화’를 이어가자”는 논설이 태연히 실리는 강심장과 냉혈한들의 나라…. 쥐-이십(G20) 의장국, 아! 대한민국.


알려지지 않은 알려진 것, 무의식


주어(주체)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BBK동영상에는 분명히 발화행위의 주체(이명박이라 불리는 어떤 신체)가 있다. 하지만, 당시 이명박 후보 측의 말 같잖은 변명을 인정해준다면, 거기서 들리는 말들의 발화의 주체(주어인 ‘나’)는 없다. 이명박 씨가 입을 껌뻑거리고, 그 입에서 어떤 말들―“저는 최근에 BBK라는 회사를 설립하고…”―이 나오는 게 우리 귀에 들리는데, 입의 주인과 말의 주체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우리 귀에 들리는 저 말들은 대관절 누구의 것인가? 이명박 씨에게 유령이 붙어서 한 말인가? (내가 입을 열어 말을 시작했는데, 내 귀에 그것이 내 말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어떤 목소리가 하는 말로 들린다고 상상해보라. 그것은 얼마나 기괴한(uncanny) 상황인가?) 사실 이런 상황은 상식선에서 간단히 정리될 수 있다.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는 사기꾼!” 이 한마디면 족하다. 그런데 문제가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고, 왜 이런 장황한 재구성과 분석을 늘어놓아야 하는 딱한 지경에 이르게 됐는가? 그처럼 빤한 사기를 국민 전체가 ‘알지만 모르는’ 척했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알지만 모르는 것―그것은 정신분석학이 ‘무의식’이라 부르는 것이 아닌가.

2003년 3월 도널드 럼스펠드는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의 관계에 대해서 조금은 아마추어 철학자다운 이야기를 했다. “알려진 알려진 것들(known knowns)이 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들이다. 알려진 알려지지 않은 것들(known unknowns)이 있다. 다시 말해서, 알지 못함을 알고 있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알려지지 않은 것들(unknown unknowns)이 있다. 즉 알지 못함을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가 잊지 말고 덧붙여야 하는 것은 결정적인 네 번째 항목이다. “알려지지 않은 알려진 것들unknown knowns”, 즉 알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들. 이는 바로 프로이트적인 무의식이다. 라캉은 이를 “그 자신은 알지 못하는 앎”이라고 말하곤 했다. (지젝, 박대진 외 옮김, 이라크, 19쪽)

말한 사람이 있고, 그가 내뱉은 말이 있는데 그 둘을 결합시켜줄 ‘주어’(누빔점point de capiton의 기능)가 종적을 감춘 이 놀라운 ‘BBK동영상 사건’이 대선이라는 국가적 정치과정을 통해 묵인(?認)되었을 때, 다시 말해 국민들이 나서서 ‘주어’가 사라지도록 ‘세탁’을 해주었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가? ‘대한민국’이라는 상징계에 국민들 자신에 의해 억압되거나 부인되는 거대한 (‘주어 없음’의) 구멍?언어적-정치적 공동체의 트라우마?이 나타나게 된다. 이명박 집권 이후 발생한 모든 미스터리한 사건들은 바로 그 거대한 상징계적 간극(gap)으로부터 쏟아져 나온 것들이며, 그 트라우마적 간극으로의 반복적 회귀이다. 예컨대, 2008년의 촛불시위를 생각해보라. 그것이 안전한 쇠고기를 요구하는 ‘생활정치’형, ‘웰빙요구’형 시위였다면, 어째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우리가 대한민국의 주권자다!”라는 선언이 첫날부터 중심 구호로 나타났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촛불시위대의 구호는 사실 뜬금없는 것이 아니라 심층적 차원에서 정확한 원인과 목표를 갖고 있었다. 시위참여자들은 자신들의 단적인 선언과 시적인 몸짓을 통해, 자신들을 그 자리로 불러 모은 공동체의 거대한 언어적-정치적 구멍(무의식)을 메우거나 전치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2011년의 <나꼼수>가 그 단적인 선언과 시적인 몸짓을, 이번엔 정치적 수다와 소설적 언어로 바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명박 정권과 보수언론은 한국사회의 주요한 위험이 “알려지지 않은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를테면 간첩, 종북, 좌빨, 괴담 등등―이라고 주장하지만 <나꼼수>를 들으며 우리는, 주요한 위험은 오히려 “알려지지 않은 알려진 것들”, 즉 (‘저들’의 비리와 탐욕을 비웃는) 우리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는지조차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인된 믿음들과 가정들이 아닐까 자문해보게 된다. 이 부인된 믿음과 가정들―대한민국 국민들이 그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통제하지 못하는 그 무엇―이야말로 BBK 사건, 4대강 사업, 천안함 사건, 저축은행 비리, 한미 FTA 날치기 등등을 관통하는 숨은 동력이고 원흉이다. 





<나꼼수>의 웃음소리 안의 <나꼼수> 이상의 것


 

세상의 삶은 자주 비극처럼 느껴지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스꽝스러워 보일 때도 많은데 그것은 ‘느낀다’는 것과 달리 ‘생각’이란 것이 사람을 그가 속한 세상과 잠시 떼놓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리’는 사유와 웃음의 조건이다. 내가 <나꼼수>를 들을 때 놀랐던 점은 거기서 다뤄지는 사안들 하나하나가 실은 매우 심각하고 분통터지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진행자들이 이를 풍자의 도마 위에 올려놓고 왁자지껄한 웃음으로 칼질할 줄 안다는 점이었다. 그 웃음소리는 진행자들의 타고난 기질이 아니라 ‘가카’와 ‘그들만의 대한민국’에 대한 숨길 수 없는 ‘거리감’과 ‘경멸’에 뿌리를 둔 것이기 때문에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 향락이 될 수 있다.

헤겔은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은 언제나 두 번 반복된다고 말했고, 마르크스는 거기에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반복된다는 유명한 주석을 달았다. 역사는 왜 그런 식으로 진행되는가? “인류가 자신의 과거와 즐겁게 결별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그렇다면 이 반복은 객관적 사실의 차원이 아니라 주체의 역사적 태도, 주체의 자기-전환이라는 진실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해야 할 것 같다. <나꼼수>라는 이행기 대상(transitive object), 혹은 '대상 a'--‘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무의식)의 자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대한 열광 속에서 대중들은 낡은 대한민국과 국민적 정체성으로부터 빠져나와 새로운 세계로 이행해가는 것 같다. 그것은 공간적 이동이 아니라 주체의 자기-전환 과정이다. <나꼼수>와 천만 애청자들의 웃음소리 안에서 우리가 식별해내야 할 것은 (<나꼼수>가 정치를 팬덤(fandom)화한다거나 새로운 우상이나 되지 않을까 하는 기우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치권력과 기득권층 그리고 저들의 욕망(‘부자들의 나라’의 ‘성공신화’)의 제단에 자신의 삶과 이웃의 몸을 제물로 바쳐온 우리들 자신을 향해 명랑하고 단호한 어조로 “역사적 몰락”을 요구하는 어떤 충동의 목소리이다. 그 소리를 <나꼼수> 풍의 어투로 한번 써보자.
 
“쫄지 마, 씨바! 큰 타자는 없다잖아. 문재인이나 안철수가 중요한 게 아냐, 우리가 기다려온 주어는 너와 나, 우리 자신이라니까. 부(富)는 은행에 쌓고 가난은 민중에 뿌리는 FTA 매트릭스, 노 땡큐! 우리는 이제 ‘자본의 사회주의’라는 현실-이데올로기의 사막을 ‘삶의 공산주의’라는 희망의 실재로 점령(occupy the Real)하련다. 끝!”


<연세대학원신문> 2011년 12월호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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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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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부탁해"
―생명관리시대를 탈주하는 사랑과 생을 생각하며

후배들과 술을 마시다 고양이 얘기가 나왔다. 요즘은 주변에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대체로 비혼(非婚) 독신여성들이다. 그들이 고양이에 쏟는 애정은 대단해서 마치 자식을 돌보듯 한다. 가족들이 기르는 애완동물은 보통 개이고 혼자 사는 여성들이 기르는 애완동물은 십중팔구 고양이다. 집을 오래 비워도 얌전히(?) 지내는 동물이 고양이 쪽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고양이의 행동, 성격, 외모, 특히 크고 신비로운 눈동자 등이 그들을 열광시키는 모양이다. 순정만화 주인공의 과장된 큰 눈을 닮았나? 아무튼 후배 중 하나가 집에 일찍 들어가야 한다기에 왜냐고 물었더니 엊그제 고양이 중성화 수술―정확히 말해 ‘자궁적출 수술’―을 해주어서 곁에 있어야 한단다. 나름대로 큰 수술이어서 아직 육체적, 정신적 충격이 남아있을 거라고 걱정을 한다. 나는 ‘자궁적출 수술’이라는 말에 꽤 충격을 받았다. 여성이 그런 수술을 받는 경우는 자궁암이나 뭐 그런 치명적인 병에 걸린 경우뿐이고 수술 뒤에 남는 정신적 상처는 상상을 초월할 것 같다(수컷 고양이 중성화 수술은 생식능력을 제거하는 ‘거세’이리라). 그렇지만 사랑하는 애완동물에겐 아무렇지 않게 그런 수술을 한다. 심지어 ‘수술해준다’는 시혜적 표현을 쓴다. 마치 쌍꺼풀 수술이나 포경수술이라도 해준 것처럼…. ‘해준다’니 누구를 위해 그 고양이의 자궁을 떼어낸단 말인가?




그런 일이 비인간적인지는 모르겠으나 틀림없이 ‘비고양이적인’ 처사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비난하자 후배는 정색을 하며 아니라고 답했다. 어째서? 첫째 발정기에 고양이가 받는 스트레스가 대단하므로 수술을 통해 중성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며, 둘째 발정기에 오래도록 교미를 못할 경우 자궁에 고질병이 생기는 경우가 흔하므로 예방 차원에서도 정당화된다고 한다. 교미를 할 수 있게 해주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물었더니 그럼 평생 새끼를 백 마리는 낳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 새끼들을 다 어쩔 것인가! 기르지 못할 거라면 아예 안 낳는 게 낫다.’ 나름대로 이치에 닿는 말로 들렸다. 중성화 수술은 도시에서 인간과 함께 살기 위해―솔직히 말하자면, 인간이 고양이를 기르기 위해― 고양이가 치러야할 대가인 셈이다. 섹스와 출산, 양육, 요컨대 ‘재생산’과 관련된 문제여서 그런지 이 문제는 인간의 경우로도 쉽게 치환이 가능해보였다. 그러자 갑자기 우울하면서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유태인이나 집시, 난쟁이처럼 선천적 기형이나 불구자들에게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단종시술을 감행했던 우생학의 역사가 우선 떠올랐다. 그런 일들은 서구의 선진국에서 최근까지도 행해졌던 일이며, 아마 지금도 암암리에 진행되는 일일지 모른다. 얼마 전 미국에서 전신마비 장애를 가진 친딸에게 부모가 그런 수술을 ‘해줘서’ 논란이 된 바 있다.


고양이로부터 애슐리까지

애슐리(Ashley)는 뇌손상으로 전신마비 장애를 앓고 있는 아홉 살 소녀다. 말도 못하고 똑바로 앉을 수도 없는 탓에 침대에서 하루를 보내는 이 아이를 부모는 ‘배게맡 천사’(pillow angel)라고 부른다. 정신발달은 생후 3개월 수준에 멈춰있다. 지난 2004년 애슐리의 몸에 사춘기 증상이 나타나면서 키가 크고 체중이 늘자 아이를 안아 옮기기 힘들어진 부모는 병원과 상담한 끝에 수술을 결행했다.




수술 내용은 자궁적출, 유방의 발달을 가져오는 유선의 제거, 성장을 억제하는 호르몬 투여 등이다. 이로써 애슐리는 여섯 살 아이의 모습으로 평생을 살게 됐다. 유방암, 자궁암 걱정도 없고 성폭력에 의한 임신 가능성도 제거됐으며, 부모가 아이를 건사하기도 훨씬 편해다. 애슐리의 부모는 아이의 ‘삶의 질’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믿고 있다. 당사자의 행복과 양육자의 편리, 양자의 ‘삶의 질’을 위해 의료기술이 도입된 이 사태를 누군들 쉽사리 비난할 수 있으랴. 그들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물어보자. 낙태는 제쳐두더라도, 섹스와 임신을 분리시킨 피임약과 콘돕의 경우는 어떨까? 문명화된 사회에서 거의 모든 성인들이 자발적으로 사용하는 이 물건들은 앞서 말한 ‘공리주의적’ 사랑과 본질상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 섹스와 임신, 출산과 양육, 요컨대 생명의 관리를 위한 지식-권력의 선제적 개입이란 점에서 그것은 스스로에게, 혹은 자기 몸 속의 고양이와 애슐리에게 가하는 성장억제와 단종수술이 아닐까.

생-권력으로부터 탈주하는 삶이

고양이 중성화 수술을 해준 후배의 당당한 논리는 푸코가 생-권력(bio-power)이라 부른 것이 얼마나 일상화되어 삶의 미시적 영역까지 뻗쳐있는지 보여준다. 이 권력은 이성적이고 관리적인 동시에 쾌락 지향적이다. 거기에는 무엇이 좋은 생인지에 대한 가치의 결정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의학적, 인구통계학적 지식들이 촘촘하고 확고하게 똬리를 틀고 있다. 게다가 너무나도 세심하고 배려적인 ‘착한’ 심성과 결부돼있다. 체계적 지식과 강력한 기술의 바탕 위에 누구도 쉽게 부인할 수 없는 선의가 결합된 이 생-권력의 주체와 그것의 대상―당연히 스스로를 배려할 줄 모르며 지식과 기술도 한없이 부족한, 따라서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으니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자신의 생과 주위 환경에 피해를 끼칠 뿐이라고 가정되는 대상― 사이의 엄청난 힘의 비대칭성은 우리 눈앞을 캄캄하게 만든다. 도무지 저항이라고는 불가능할 것만 같은 그 둘 사이의 까마득한 격차! 여기서는 오직 우연한 실수나 사고만이―예컨대 만에 하나 나올까말까 하다는 불량콘돔 같은 것― 혹은 절망적인 탈주만이 생에 구원의 길을 열어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의 생이고 어떤 구원인가? 선량한 주인의 방에서 어렵사리 탈출해 기껏 천덕꾸러기가 된 길고양이의 운명을 생각해보자. 탈주한 것은 (현재와 미래에 보장된 안락한 생활을 스스로로부터 박탈당한 그 길고양이가 아니라) 그 고양이에게서 태어날 미래의 고양이들일 것이다. 그러니까 탈주한 것은 그 암고양이의 자궁이다. 문명의 물샐틈없는 고무막을 기적적으로 꿰뚫은 정자, 탈출한 길고양이의 보잘 것 없는 자궁이나 쬐그만 성기 같은 것들―우리는 겨우 이런 것들에서만 자유로운 생의 운명적 힘이나 결사적 항쟁의지를 보아야 할까.


그녀에게 말해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그녀에게>에는 식물인간이 된 여자를 짝사랑하는 남자 이야기가 나온다. 간호사인 남자는 식물인간이 된 ‘그녀’를 4년 동안 헌신적으로 돌보던 끝에 여자를 임신시키고 강간죄로 체포된 후, 감옥에서 자살하고 만다. 문득 애슐리가 떠오른다. 그리고 생리를 시작한 딸이 강간을 당해 불의의 임신을 하게 될까 염려하는 그 아이의 부모가 떠오른다. 영화에서 임신한 여자는 아이를 낳고 식물인간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깨어나 새 삶을 시작한다. ‘영화니까…’라고 쉽게 단정짓는 것은 어리석다.



이 영화의 원제인 <hable con ella>는 ‘그녀에게 말해요’란 뜻이다. 남자는 알아듣지 못하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한다. 벽에 대고 독백을 하듯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그녀의 침묵으로부터 무언가를 끊임없이 듣고 있는 듯하다. 이야기한다는 것, 대화한다는 것, 소통한다는 것은 그가 그녀를 사랑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소통 속에서 그녀는 인형(real doll)도, 사이보그도, 식물처럼 자라고 썩을 뿐인 살덩어리도 아니다. 그렇다고 ‘천사’도 아니다. 그가 그녀를 또 하나의 주체나 인격체로 본다고 하는 것도 부족한 표현이다. 여기에는 두 사람 이외에 다른 무엇이 있다. 그를 통해 그녀에게 건네진 그것은 그녀를 통해 다른 누구에게 건네질 것이다. 말과 생명. 그것은 생의 이야기이고 언어의 생명이다. 그것은 또한 꼬뮨(commune)의 동사형인 코뮤니케이션이다. 영화에서 남자의 돌연한 죽음은 이 생의 사건들이 치러야할 대가를 바라보는 감독의 슬픔이고, 또 작은 경고로 보이기도 한다. 의도적으로 배치된 희생이라고 해도 좋다. 공짜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고 받는 생의 사건, 즉 사랑은 그처럼 결정적인 것을 요구해오기도 한다. 80년대 유행했던 민중가요의 한 대목처럼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 바쳐라.” 아마 언젠가 되살아난 그녀에게도 같은 요구가 주어질지 모른다. 나는 애슐리의 부모에게서 자식을 배려하는 선하면서도 계산적인 심성 이외에 바로 이러한 (마음에 썩 드는 표현은 아니지만) 용기와 희생은 보지 못하였다.

오월의 생과 저항을


5월이다. 봄이 왔다가 이제 막 지고 있다. 4.19와 5월 광주, 6월 항쟁…. 우리 현대사의 피어린 봄날을 상징하는 이 숫자들의 공통점은 ‘민주주의’라는 추상명사에 있지 않다. 혹은 민주주의는 추상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모두 구체적인 사람들과 관련이 있으며 그들의 죽음과, 보다 정확히 말해 죽음을 뚫고 나아가는 생의 힘과 관련이 있다. 김주열, 박종철, 이한열 그리고 수천 광주시민의 시퍼런 목숨들 말이다.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돌연히 끊겨버린 이들의 생을 다시 잇겠다는 공적인 노여움의 힘. 거기에는 체계의 현실주의와 공리주의를 뛰쳐나가는 생의 언어가, 운동하는 동사형의 꼬뮨이 있다. 놀랍고 두렵고 아름다운 사랑의 숭고한 율동. 너무 먼 이야기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이 글은 고양이로부터 너무 먼 곳까지 와버린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처럼 멀리에서부터 고양이를, 자식과 부모를, 연인을 사랑할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은가.


<연세대학원신문>

2007년 5월

And

After the 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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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 이후 혹은 공공성을 좇아서
―시민사회는 국가가 버린 공공성을 되찾아주어야 하는가?


공공성(publicity)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우리는 날마다 공공성의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를 듣고, 여기저기서 무너져 가는 공공성의 영토들을 본다.

우리는 아직 공화국에 살고있는가?

공교육의 위기는 “교실붕괴”라는 섬찟한 용어를 일상화시켰고 공공성의 제도적 보루인 법은, ‘필요하다면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당당하게 대답하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종적을 감추고 있다. 공적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부패를 당당히 ‘관행’이라고 주장하는 나라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그와 같이 대답하고 처신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有錢無罪 無錢有罪(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잡범들의 방어 논리라면 ‘有權無罪 無權有罪(유권무죄 무권유죄)’는 집권에 실패한 고위층의 정치적 알리바이가 되었다. 두 경우 모두 법 대신 다른 것들--돈과 권력--이 대한민국의 지배질서임을 폭로하는데, 그 둘은 모두 불평등한 분배를 본성으로 갖는 것이어서, 사실상 법이라는, "그것 앞에서 만인이 평등한" 보편적 룰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사회에서는 ‘먼저 돈과 권력의 문제를 해결하라, 그러면 자유의 왕국이 열릴 것이다’라는 냉소적 경구가 시대정신의 자리에 올라선다. 윗물이 더러워도 아랫물은 좀 맑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이 교육의 존재이유라면, 공교육의 진정한 위기는 학교가 아이들에게 아무런 긍정적인(positive)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고 시인하는 지점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알튀세르가 이 소식을 들으면 반가워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학교는 더 이상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조차 되지 못하는 것 같다. 네그리 식으로 말해서, 이미 통제사회(society of control)로 이행한 제국의 단계에서 자본은 그런 훈육기관을 공식적으로 운영할 의사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교육의 위기를 우려하는 사람들조차 학교가 과연 필요한가―학원으로 충분하지 않은가?―라는 회의를 숨기고 있다. 공공복지와 공공의료는 이해집단들의 고래싸움 틈바구니에서 재정파탄으로 귀결돼 가는 중이며, 스캔들로 해가 뜨고 음모론으로 달이 지는 정치권을 두고 ‘공공의 이해를 위한 대의정치의 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현직’ 국회의원들뿐이다. 그들마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정치가 사적 이해를 위해 공사(公事)를 구부리는 동안, 방송은 연예인의 사생활로 공기(公器)를 채움으로써 공과 사(public/private)라는 자본주의적 근대의 경계를 가로질러 ‘탈주’하고 있다. 대표적인 공론장인 언론의 부패나 당파적 행위―심지어 사실의 왜곡―조차도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 ‘공공성 상실의 시대’라는 이 엽기드라마는 정부의 공기업 매각이라는 대목에서 절정에 달한다. 정부는, 무엇에 떠밀리기라도 하듯, 공기업을 사유화시키지 못해 안달인데 이는 국가가 공공성의 의무 또는 자기 정당성의 기초로부터 조직적으로 퇴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토록 반대해도 공기업은 사유화되고 해외로 매각된다. 그토록 반대해도 갯벌이 매립되고 간척사업이 계속된다. 그토록 반대해도 반인권적 법률들이 존속된다. 그토록 반대해도 미국의 전투기가 국민들의 혈세를 털어 구입된다. 말하기에 지칠 법하지 않은가? 우리는 국가가 우리의 말을 듣는지 의심스럽고, 우리가 누구인지 회의가 들기 시작한다. 우리는 진정 공화국의 시민인가? 공공성(res publica)을 공화국의 본질이자 정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한마디로 우리는 더 이상 공화국(Republic of Korea)에 살고 있지 않는 것 같다. 도대체 공공성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누가 우리 공화국을 치워버렸나?

근대국가의 가을과 공공성의 퇴락

공적 제도의 전반적 부패, 공공성에 대한 신뢰의 퇴조, 국가의 급작스런 퇴각―-이것이 우리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사실, 다시 말해 미숙한 근대성과 천민자본주의의 병리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 점은 공공성의 지형 전체가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IMF사태”이후의 경험은 이런 저간의 사정들을 몸으로 느끼게 만들어주었다. 우리의 일상을 관통하는 경제적 흐름들은 우리의 이해관계와 동떨어진 곳―IMF, WORLD BANK, W.T.O, 월가의 금융자본, 미국증시 등―에서 결정된다. 그들과 우리 사이의 역관계는 엄청나게 비대칭적이어서, 우리는 그들의 결정에 거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고 그들을 소환하거나 탄핵할 수도 없다. 사실 그들은 우리로부터 대표권을 위임받은 적도 없다. 마치 “운명”처럼 다가오는 이 초국적 자본의 파도 앞에 국가의 경계는 아무런 방패막이가 될 수 없다.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근대 공민의 자부심, 즉 “주권의 약속”은 어느 나라에서나 부도수표가 되고있다. 이제 남한의 부유층은 미국시민권을 따기 위해 대거 원정출산을 시도하거나 아예 이민을 간다. 한편, 제3세계의 불법이민 노동자들이 우리사회의 음지로 편입되어 대규모로 착취당하고 있다. 사회의 상층은 기회주의적 배반이나 이탈을 실행하고 하층은 이질적 정체성을 지닌 집단들로 채워져 간다.

국민, 국토, 주권이 근대국가의 세 가지 요건이라는 건 중학생도 안다. 공민(civilian)이 삶과 자기정체성의 근거를 민족국가에 두지 않고, 즉 스스로를 국민으로 여기지 않고 단지 우연한 거주민처럼 인식할 때, 영토가 조상에게 물려받고 후손에게 물려줄 신성한 장소(place)가 아니라 단지 세금징수가 가능한 지역의 경계표시나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잠정적으로 안전한 공간이란 군사적 의미로만 축소될 때, 주권이 스스로를 실현할 사안들을 상실할 때, 근대국가는 끝난다. 그것은 세금을 걷고 노역을 동원하는 대가로 최소한의 안보와 치안을 보장해주는 기능적 지방권력으로 전락한다. 이는 차라리 중세의 봉건영주와 흡사하다. 바야흐로 근대가 조락(燥落, waning)하고 '포스트모던'이란 이름의 새로운 중세가 시작되고 있는 것인가?

앞서 말했듯이, 공공성이란 하나의 역사적 사회, 근대 공화국의 이념이다. 군주국가에서는 공공성이 필요치 않다. 필요한 것은 군주의 명령과 이에 복종하는 신민의 정신이다. 부족사회에서는 공공성이 필요치 않다. 필요한 것은 혈연적 유대에 대한 확인뿐이다. 오로지 다양한 이해를 가진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과 집단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근대사회만이 공공성이란 이름의 세속종교를 요구한다. 공동체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모든 제도와 가치들을 분쇄해버리는 “악마의 맷돌”, 즉 자본주의적 시장을 떠안고 사는 사회만이 공공성이라는 이름의 속성 아교를 필요로 한다. 달리 말해, 공공성은 사적 영역(private sphere, privacy)으로서의 시장과 형식적 대립하며 실질적으로 공존한다. 이러한 시장과 국가의 변증법이 근대성의 정치경제학의 요체를 이뤄왔다면, 그 변증법의 종결과 더불어 공공성의 역사적 의미도 시효를 상실하게 될 것 같다.


공공성의 찢겨진 베일


진보진영이나 시민운동단체들은 이런 갑작스런 사태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국가, 즉 공권력의 과잉에 의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 기본적인 인식이었는데 국가와의 협상이 가능해진 것처럼 여겨지는 지점에 이르고 보니 이제 국가의 과소가 문제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 되어있는 판국이다. 사회의 운영과 재생산이라는 공은 차근차근 시민사회로 넘어오고 있다. 그런데 시민사회에서 그 공을 받아 찰 준비가 되어있는 곳, 아니 이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곳은 주로 시민사회의 도덕적 영역들이 아니라 경제적 영역들, 즉 시장 참여자들이다. 기업들은 이제 상품이 아니라 사회 자체를 재생산하는데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교육, 교통, 통신, 에너지 등 공공서비스의 사유화, 문화와 가치의 상품화, 신체의 자본화 등등. 그것은 국가 이전의 시민사회, 즉 자기이해의 충동에 따라 계산적으로 움직이는 부르조아적 개인, 집단들의 각축장이다. 시민들은 이제 비판의 시위를 국가라는 명백한 대상―용이한 상대는 물론 아니었다―에서 자기 자신들 내부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되었다. 이는 국가보다 용이한 상대가 아닐뿐더러 전선이 훨씬 더 복잡해지는 대상이기도 하다. 가령 어떤 거대자본에 대한 공격은 고용자와 그들의 가족 그리고 경제전반에 미칠 파장 때문에 예상치도 않았던 다각적인 반격에 처하게 된다. 개별기업 내부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들 사이의 마찰이 협상을 통해 해결될 때, 그 부담이 하청업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 혹은 소비자에게 전가되는 경우도 흔하다. 이런 식으로 투쟁은 시민사회 내부에서의 복잡한 갈등으로 얽혀든다. 시장은 이미 하나의 기구나 제도, 공격하고 교정하거나 제거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삶 전체가 놓여있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시민운동은 시민들의 자기부정을 요구하지 않고서는 혹은 시민운동 자체가 변질되지 않고서는 존속해나가기 어렵다. 공공성은 이제 요구되는 것―위로부터든 위를 향해서든―이 아니라 고통스럽게 만들어가야 하는 것, ‘아래로부터’나 ‘아래를 향해서’가 아니라 내부적 윤리나 외부적 연대를 향해서 수평적으로 전개해가야만 하는 어떤 것이 되었다. 이는 변혁운동에서 시민사회운동으로의 전환이라는 90년대 진보진영의 전략이 맞닥트린, 새롭다기보다는, 근본적인(radical) 방향선택의 국면이 아닐까?


국가 없는 공공성을 상상해야 한다


‘국가 부재의 시민사회’라는 현재의 상황은 ‘시장이냐, 국가냐?’라는 근대초기의 문제―혹은 근대 내내 반복되었던 국가와 시장의 변증법―를 다시 제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질문에 대한 여전히 19세기식 이해이다. 공공성의 위기를 불러온 현 상황은 ‘국가 이후의 시민사회’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상이하다. 초점을 국가에만 맞추면, 문제가 공적 국가의 존재와 부재라는 단순한 사실들만 발견될 뿐이고 동일한 과거의 반복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회 전체의 시야에서 접근해 보면, 국가의 부재가 사회의 재생산에 더 이상 결정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 국가 없이도 국가가 있는 것처럼, 경우에 따라 가장 강력한 국가조차 넘볼 수 없었던 일들―사회의 역동적 안정성―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사회로 우리는 진입중인 듯 하기 때문이다. 사실 8~90년대를 거치면서 케인즈주의 복지국가와 국가사회주의는 싱겁게 막을 내렸고 이를 다시 복구하려는 시도는 현재로서는, ‘일국 사회주의’ 테제로 돌아가자는 구호만큼이나 낡아 보인다. 우리의 일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결정들이 국가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외세가 민족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근세사 전체의 핵심적 명제―이른바 종속성 테제―와는 구별될 필요가 있다. 이미 공공업무에서 조직적으로 퇴각하고 있는 국가권력을 세계시장질서로부터 다시 국민의 편으로 견인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공공성을 일종의 규범적 코드로 착각하는데서 비롯된다. 지배계급이 공공성 없는 국가를 만드는 동안에도 우리는 국가 없는 공공성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낡은 사고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자문해보아야 한다. 공과 사의 구분이 사라지면 자본주의적 근대가 상상했던 공공성은 새로운 공동체성(communality)으로 대치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유토피아의 실현으로의 방향잡기이다.


* <연세대학원신문> 편집장 시절에 쓴 글이다. 거의 10년은 된 글인 듯 하다. 이 글을 쓸 때, 조정환 선생도 같은 기획--"공공성, 위기인가? 급진화인가?"라는 제목의 기획--에 필자로 참여했었던 기억이 난다. 최근 조정환 선생이 <인지 자본주의>라는 책을 냈다. 흥미로운 저작이고, 또한 다급한 여러 현안들--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변동과 혁명적 주체로서의 다중의 기상--을 자신의 사고와 언어로 집약시킨 대작임에 틀림 없지만, 개인적으로 불만이 없지는 않다.

우리가 당시 '새로운 공공성'이라 불렀던 문제는 그 책에서 '인지(cognition)'라는, '생명의 정치경제학 비판', '생명의 자본 비판론'이라 불릴만한 개념으로 다시 쓰여지고 있다('인지'라는 개념 뒤에는 스피노자-들뢰즈의 내재성 철학과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생물학 이론이 놓여있다). '인지'에는 내가 '공공성(公性)의 '차이(差移, Differance)의 a'라고 생각하는 것, 즉 공성(公性)'의 '空'--無, 죽음, 소멸, 타자성의 자리--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그것은 정치와 생명의 문제를 함께 다루는 논변에게는 큰 결함이라 생각된다. 게다가 조 선생이 결론에서 '탈성장'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다중은, 들뢰즈의 리좀과 마찬가지로, 성장하는 생명의 은유이다. 그런 맥락에서 다중과 리좀은 자본 운동과 형식적 동질성을 갖는다. 자본은 추상적 리좀이며, 다중은 인격화된 리좀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탈성장과 탈생장--노화, 소멸, 죽음--이라는 생명의 중요한 특성에 대한 고려가 없이는, 무상의 증여/수수, 갈등/연대, 건네 줌/ 건네 받음이라는 문화적 생명 현상들을 설명할 길이 묘연해진다. 이를테면 우리는 생명을 무상으로 건네 받았고, 무상으로 건네 주어야 한다--그것이 우리가 '삶'이라 부르는 시-공간의 장을 터-닦는 무의식적이고 존재론적 사랑이다. 

유한적 생명체인 우리는 잘 살아야할 뿐만 아니라, 잘 죽어야 한다. 공공성은 '잘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잘 죽어야 한다'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우리의 자연스런 삶의 방식에 대해 공공성이 취하게 되는 본질적 타자성이다. 공공성은 까다롭고 불펴하고 어려운 것이며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자연스러운 방식--좋은 게 좋은 것이며 대세가 이러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논리--에 따라 살 때, 우리는, 생명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 부패한 생명, 오직 자신의 삶의 확대와 연장만을 꾀하는 행태, 그것은 암적(癌的) 생의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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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오늘날의 모리스 블랑쇼(요약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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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모리스 블랑쇼

로제 라뽀르뜨


나는 정확히 반세기 동안, 그러니까 싸르트르의 <존재와 무Being and Nothingness>와 바따이유의 <내적 체험Inner Experience>이 출간된 해인 1943년 그의 작품 <헛발Faux pas>이 나온 이후로 죽 블랑쇼를 읽어왔다. 우선 그의 저작 전체의 윤곽을 제시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특히, 이 책에서 다른 필자들이 언급하게될 저널리스틱한 글들은 빼고, 그가 작가로서as a writer 쓴 작품들을 중심으로 말이다. 불랑쇼의 저작은 세 부류로 나눠진다. 비평 작업, 허구the fiction,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떤 장르에도 포함되지 않는 두 권의 책, <저 너머로Le Pas au-dela>와 <재난의 글쓰기The Writing of the Disaster>가 그것으로 두 책은 각각 1973년과 1980년에 출간됐다.1)

비평 작업에 속하는 책은 <헛발>, <불의 몫La Part du feu>, <문학의 공간L’Espace litt?raire>, <미래의 책Le Livre a venir>, <한없는 대화L’Entretien infini> 그리고 <우정L'Amit> 등이다. 이 목록에는 보다 최근에 나온 짤막한 연구서 <고백할 수 없는 공동체unavowable community>와 <내가 상상하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tel que je I'imagine>가 추가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가장 최근에 나온 블랑쇼의 저서는 루이-르네 데 포레(Louis-Ren? des Forets)의 시에 바쳐진 <다른 곳에서 온 목소리Une Voix venue d'ailleurs>로 1992년 10월에 출간되었다.

누가 이 비평 작업들을 몇 마디 말로 뭉뚱그리며 공정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블랑쇼는 말라르메, 카프카, 아르또 그리고 다른 여러 작가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있다. 그러나 말라르메, 카프카, 바따이유, 샤르, 레비나스 그리고 다른 많은 작가들 또한 블랑쇼에게 적지 않은 빚을 지고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덧붙여야만 하겠다. 블랑쇼가 카프카에게 바친 열 편의 연구논문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이 <성The Castle>의 작가를 도대체 어떻게 읽을 것인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우리는 블랑쇼의 주석을 통해서 카프카를 읽고 있기 때문이다. <불의 몫>에는 <휠더린의 “신성한” 말>이라는 제목이 붙은 글이 들어있는데, 거기서 우리가 읽게되는 것은 휠더린이 아니라 블랑쇼 자신이다―-하이데거를 읽은, 휠더린을 읽은, 그리고 그리스인들의 작품을 읽은 블랑쇼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자아중심성egocentricity과도 반대되는 자리에서, 블랑쇼는 휠더린을 향해 돌아서고 또 우리들을 돌려세워 그의 작품에 이르도록 길을 닦아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문학’이 그에 응답하고자 애쓰는 저 먼 것the remote으로부터의 환상적이고 끊임없는 부름, 그 아련한 공명을 이끌어낸다. 블랑쇼는 우리를 그가 다루는 작품들의 동시대인으로 만들어준다. 블랑쇼는 그 작품들이 때로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하고 또 어떤 것은 문학에 다른 것은 철학에 혹은 신비주의에 속하는 등 다른 장르에 있다할지라도, 그 모든 작품들을 모두 꼭 같은 현재의 순간the same present moment 속에서 그려내기 때문이다.

블랑쇼 비평이 보여주는 독특한 성격은 그를 단지 개중 뛰어난 주석가commentator의 한 사람으로 간주하지 못하도록 만드는데, 그의 비평은 모든 글쓰기를 도래할 한 권의 책a book-to-come, 그에 따르면, 오로지 그것의 부재에 의해서만 식별될 수 있다는 그 미래의 책을 향한 글쓰기로 이해함으로써, 작품들을 그것의 바깥outside으로 열어놓아 작품들이 묶여있던 과거와 현재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기본적 형태를 하고 있다.

허구적 작품들은 두 개의 시기, 즉 <또마, 알 수 없는 사람Thomas l'obscur>, <아미나다브Aminadab> 그리고 <저 높은 곳Le Tr?s-haut>과 같은 훌륭한 소설novel/roman의 시기와 그 이후에 나온 <죽음의 선고L'Arret de mort>, <낮의 광기La Folie du jour>, <또마, 알 수 없는 사람Thomas l'obscur>(재판본)2), <원하던 순간에Au Moment voulu>, <나를 따라오지 않았던 자Celui qui ne m'accompagnait pas>, <최후의 인간Le Dernier homme> 등이 거기에 속하는 이야기the recit의 시기로 나뉜다. 두 번째 시기의 마지막 작품인 <기다림 망각L'Attente L'Oubli>은 1962년에 출간되었는데 딱히 이야기로 분류하기도 어렵다. 이후 블랑쇼는 그의 작품의 새롭고 다양한 판본들에서 모든 장르 표기들을 삭제해 오고있다.

블랑쇼는 지난 30년여 년 동안 더 이상 새로운 소설이나 이야기를 출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있을 법하지 않은 정반대의 징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의 허구적 작품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종결되었다concluded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블랑쇼가 허구를 저버린 까닭은 정확히 말해 그것이 더 이상 자신이 추구하는 과제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므로 이런 결별이 지닌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야기가 있던 자리에 대신 들어선 것은 새로운 스타일, 새로운 장르인데 그것은 고작 두 권에 불과하지만 그의 주요 저작으로 꼽아야할 <저 너머로>와 <재난의 글쓰기>에 의해서만 대표될 수 있다. 누군가 이 작품들에 장르 표기를 하라고 우긴다면, 그것을 단장(短章)fragmentary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데, 이 작품들을 읽고있노라면 독일 낭만주의 그리고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테네움the Athenaeum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블랑쇼의 단장 작품들은 슐레겔이나 노발리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문학과 철학을 별개의 것으로 떼어놓거나 어느 하나로 병합하지 않고, 그 둘 너머의 어떤 것을 추구한다. 그것은 매개되지 않은 사유의 경험이다. <저 너머로>와 <재난의 글쓰기>에서, ‘글쓰기’는 그것이 투척한 내기들, 신비들, 일탈들, 심연들과 더불어 벌거벗은 채 그 자신을 말하려고 애쓴다. 블랑쇼는 “(글쓰는 자는) 우주를 부수어야 한다”는 니체의 경구를 문자 그대로의 효과 속에 두고자하나, 블랑쇼에게 파편화된 글쓰기fragmentary writing는 어떤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탈-장소dislocation, 우리가 언젠가 돌아가게 될 그 장소 아닌 장소(장소 바깥의 장소) 체험의 결과이다. 블랑쇼는 오랫동안 글쓰기의 기원, 예술 작품의 기원, 영감inspiration과 영감의 결여가 일치하는 그 지점을 탐색해왔으나 이런 중심의 추구는 그와 반대되는 힘에 의해서 정초되거나 혹은 정지된다. 그리하여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블랑쇼에 따르면, “기원에 대한 사상은, 최초의 중심으로서의 분산(分散)에 대한, 차이에 대한 사상의 신호를 뒤로 남긴 채 스스로를 향해 사라진다… 그 최초의 중심은 모든 통일성이 깨어져버리는 바로 그곳이기에 어떠한 중심도 부재한 그런 중심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비-통일성의 비-중심the non-center of non-unity이다.” 우리가 그것을 이와 같은 말들로 이해하고자 할 때, 블랑쇼의 깨어진 파편들이 그 기원을 찾게되는 곳은 정확히 이 최초의 파열break(brisure) 속에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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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블랑쇼 작품들이 보여주는 주요한 특징들을 묘사하고자 노력해보겠으나, 미진한 부분들을 하나도 남김임 없이 이 작업을 철저하게 완수한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하다. 이 글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는데, 각 부분은 이를테면 신화, 서사narrative 그리고 상징적 인물emblematic figure에 해당한다. 그럼 사이렌의 노래, 사냥꾼 그라쿠스 그리고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순으로 이에 대해 논의해보겠다.

우선 사이렌의 노래, 블랑쇼가 호머의 그것과는 매우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 그 사이렌의 노래에서부터 시작해보도록 하자. “이 작품의 중심점은, 도달할 수 없는 그러나 도달해볼 가치가 있는 유일한 지점인 기원으로서의 작품이다”라고 블랑쇼는 쓰고있다. 그는 또 이렇게 쓰고있기도 하다(훨씬 더 많은 인용을 덧붙일 수도 있으리라). “이 작품은 거기에 몰입하는 사람이 누구든 간에 그 작품이 불가능성이라는 시련을 겪게되는 지점으로 그를 끌어들인다. 그것은 밤의 체험, 진정한 어둠의 체험이다.” 우리는―그리고 누구보다도 블랑쇼 자신은― 이 이상스런 매혹fascination의 희생자가 아닐까? 의심할 나위 없이 그렇다, 허나 블랑쇼의 작품이 매혹과 이어져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만 그것이 기원의 부름the call of the origin에 응답하고 있다, 응답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블랑쇼는 이렇게 쓴다.

사이렌들은 아직 오지 않은(와야할) 단 하나의 노래에 다름 아닌 그 불완전한 노래들을 부르며 노래 부르기가 진정으로 시작될 바로 그 공간으로 배들을 끌어들이곤 했다. 일단 그 장소에 다다랐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이 곳은 어떤 곳인가? 그곳은 오직 사라지는 일만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이 발원의 영역, 이 기원의 영역에서 음악은 세상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도 더 완전하게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마치 음악이 태어난 이 모태의 영역이란 아무런 음악소리도 들리지 않는 공간, 침묵이 노래에 이르는 모든 방법을 불살라버렸던 가뭄과 한발의 땅인 것처럼.

기원에 접근하려는 사람은, 그러므로, 어떠한 시작beginning으로부터도 떨어져있어야 한다. 무한정 연기된, 영원히 미래에 속하는 그 책은 책의 부재에 자리를 내주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나를 따라오지 않았던 자>에서 두 인물 중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이상한 집착을 보이며”, “글을 쓰고 있나요? 당신은 그 순간에 글을 쓰고있나요?”라고 물었을 때, 다른 한 사람은 결코 “네”라고 답할 수 없다. 교묘히 빠져나가는 그 기원이 어떤 경우에도 “난 지금 글을 쓰고있다”는 말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글쓰기’의 목표는 무엇인가? 말라르메가 꿈꾸었던 그 작품, 최고의 걸작the chef d'oeuvre, 대문자로 쓰여진 그 책the BOOK인가? “쓴다는 것은 작품(일, work)의 부재(無爲, worklessness/ desoeuvrement)를 생산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때, 블랑쇼는 이 질문에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글쓰기가 작품을 통하여 그리고 작품을 가로질러 그 자신을 생산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글쓰기는 작품의 부재이다. 이제 블랑쇼가 어째서 “문학은 어쩌면 본질적으로 실망하기 위해 고안된 것인 듯 싶다”라고 말하게 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슬프고 우울한 문장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책이란 글쓰기가 그것에 의해서 책의 부재에 도달하게 되는 하나의 책략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때, 달리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작품을 위해, 기원을 위해 저 절대적인 요구the sovereign demand에 응답하는 자가 될 것인가? “이해 불가능한 고통”에 휘둘리는 "비참하고 가련한 존재“가 그들이다. 블랑쇼는 또 이렇게 쓰기도 한다. ”인간은 작품으로 말한다. 그러나 작품은 인간 속의 말하지 않는 것에게, 이름할 수 없는 것the unnamable과 인간 아닌 것inhuman에게, 진리 없는 것, 정의와 무관한 것 그리고 정당성을 갖지 않는 것에게 목소리를 부여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원의 부름에, 사이렌의 노래에 유혹되도록 내버려두어 몰락ruin에 이르러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명백한 몰락이 아니라, 그렇다, 다만 재난disaster에 이르게 된다. 블랑쇼에게는 진정한 몰락에 대한 향수nostalgia가 있는데, 그가 발자크의 단편소설 <미지의 걸작Chef d'CEuvre inconnu>에 주석을 다는 방식 속에서 그것을 관찰해볼 수 있다. 누구라도 자신의 그림 <도발적인 미녀La Belle Noiseuse>를 불태운 후 자살해버린 프레노페르의 실패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블랑쇼는 프레노페르의 몰락은 철저하지 못하고, 그러므로 몰락이 아니라고 말한다. 문학적으로 볼 때, 블랑쇼가 확실히 옳다. 프레노페르의 걸작을 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두 사람(포르뷔스와 푸생)은 처음에는 그 그림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발자크는 이렇게 쓰고있다, 조금 더 가까이로 이끌려 들어가자,

두 사람은 캔버스의 한 구석에서, 이 색채의 혼돈으로부터 벗은 발의 끄트머리가 떠올라오는 것을 알아보았다…기쁨에 넘친 발, 살아있는 발이었다. 그들은 경탄에 휩싸여, 천천히 파괴되며 사라져 가는 이 파편 앞에 얼어붙은 것처럼 서있었다.

<미지의 걸작>에서 발자크는 미-쟝-아빔mises en abime3)의 효과로 그 자신의 병적 공포phobia를 드러낸다. 그의 광대한 작품들은 무(無) 혹은 거의 무에 가까운 것으로부터 다가온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기쁨에 넘친 발”은 발자크를 안심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블랑쇼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마음에 두고 있다.

<숨은 걸작> 속에서, 독자는 아직도, 한 구석에서 떠올라오는, 그 매혹적인 발의 끄트머리를 볼 수가 있다. 이 기쁨에 넘친 발은 작품이 완성되어지지 못하게 막을 뿐만 아니라, 화가가 그의 텅 빈 캔버스 앞에서 마음의 지고한 평화에 싸여 이렇게 읊조리지 못하도록 한다. “없다, 없어! 마침내 여기에는 아무 것도 없단 말이야At last there is nothing.”(<헛발Faux pas>, Gallimard, 1943. 126쪽.)

그렇다면 왜 거기에는 몰락ruination이 아니라 재난disaster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 왜 블랑쇼는, 혹은 다른 누구라도, “없다! 마침내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일까? 왜냐하면, 이 기원의 장소, 이 모태의 영역에는 음악이 완전히 결여되어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형식의 말speech(une parole), 그러나 비어있는 말, 들리지 않는 웅얼거림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과 같다. 블랑쇼는 이렇게 쓰고있다.

이 말들의 기이함은 어쩌면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는 순간에도 그것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더 나아가, 이 말들 속에서는 마치 깊이가 말을 하는 것 같고 들리지 않는 것들이 들리는 듯 하다…(그러나) 들리지 않는 이 그릇된 말들, 아무 것도 감추고있지 않은 이 비밀의 말들은 말하는 침묵speaking silence에서 자라난 것들이다.

<원하던 순간에>에서 쥬디뜨는 가수 클로디아에게 “당신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한 목소리로 노래했어요” 혹은 “당신은 비어있게blankly(en blanc) 노래 불렀어요”라고 말한다. 이 말들은 가난한 자들을, 카프카의 <가수 요제피네>의 그 장식 없는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 이 공백blank, 이 여린 목소리, 이 말하는 침묵, 그것이야말로 계속 버텨나가는 것what persists, 몰락을 사전에 배제하는 것 그리고 누군가 “없다! 마침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단 말이야”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바로 그것이다. 블랑쇼의 바램은 그의 펜 끝에서 점점 더 자주 흘러나오고 있는, “모든 것은 지워져야만 한다erased(s'effacer), 모든 것은 지워질 것이다”라는 바로 이 공식이 보여주는 것처럼, 책의 부재를 넘어서서, 저 너머beyond로 또 다른 한 발짝을 내딛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없음/무(無)nothing는 불가능하고, 이 공허void는 접근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글쓰기는 어떠한 흔적도 남길 수 없도록 운명 지워져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흔적과 함께 다른 모든 흔적들을 지우게 되며, 무덤 속으로 사라지는 것보다 더 결정적으로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쓰여졌어야만 하고, 또 지워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누군가 다시 그것을 써야할 것이고, 끝없이 쓸 것이고, 이 그침 없는 운동은 책의 부재를 넘어서려는 어떠한 시도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제 사냥꾼 그라쿠스Hunter Gracchus라는 상징적 인물로 돌아가 보자. 먼저 여기에 읽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카프카의 문장 몇 줄이 있다.

"당신은 죽었소?"
“그렇소.” 사냥꾼이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여러 해 전에, 그렇지, 그건 아주아주 오래 전 일임에 틀림없소…내가 영양 한 마리의 뒤를 좇다가 검은 숲the Black Forest의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이후니까. 그 때 이후로 나는 죽어 있소.”
“하지만 당신은 살아있기도 하잖소?” 시장이 말했다.
“어떤 의미에선 그렇지.” 사냥꾼이 말했다, “어떤 의미에선 난 아직 살아있기도 하지요. 내 사자(死者)의 배가 길을 잃어버렸으니. 키를 잘못 틀어버린 탓에…내 사랑스런 고향땅은 흩어져버렸고, 이젠 그게 무엇이었는지조차 말할 수 없군요. 내가 아는 거라고는, 나는 이승에 남아있다는 것 그리고 내 사자의 배는 그때 이후로 줄곧 이승의 물결 위를 떠다니고 있다는 것뿐이지요. 그렇게 해서, 산과 숲들 속에서 사는 것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던 내가 죽은 다음부터는 지상의 온갖 나라들을 떠돌아다니고 있다오.”

그렇다면, 바위에서 떨어져 죽은 그러나 죽은 자들의 왕국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 사냥꾼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키도 사공도 없는 그의 배는 삼도천Acheron을 건너지 못한다. 그의 배는 ‘죽음의 저 밑바닥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며 항해한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사냥꾼 그라쿠스는 고백하지만, 블랑쇼의 독자들, <또마, 알 수 없는 사람>, <죽음의 선고> 그리고 대표적인 이야기인 <최후의 인간>을 읽은 우리들은 알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저열한 사건이 모든 연계들을 끊어버렸으며, 시간의 질서를 흐트려 놓았고, 죽어가는 인간을 ’영원한 인간‘으로 바꾸어놓았으며, 그가 ’죽음의 모서리에 서있기는 하나‘, 그의 나약함 속에 남아있는 그 미약한 힘을 끝내 소진해버리지는 못할 것이므로, 그는 ’무섭도록 부드럽고 연약한‘, ’절대적으로 비참한‘ 상태에 처해있음을 알고 있다. 어떻게 ’가장 맑은 날보다 더 선명하고…아이가 느끼는 그것보다 훨씬 더 끔직한, 이 알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 이 최후의 인간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으랴.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리지도 못한 채, 영원히 도움을 요청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에게 우정을 느끼고 있으므로, 반드시 용기를 내어야만 하며, 그에게 도달하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이 헤아릴 수 없는 나약함으로부터‘, ’우리를 공포로 질식시키는 이 거대한 나약함으로부터‘ 고개를 돌려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바로 본질적인 고독essential solitude이다. 그렇다면, 이 마지막 인간의 영원한 고통이란 무엇이겠는가? ’그는 미래의 결핍 때문에 죽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블랑쇼를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죽음은 끝the end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종결never-ending ending이다.’ 이러한 표현은 역설적이고, 맥락에서 떼어내 읽으면 황당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죽는다는 것의 불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블랑쇼는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다. ‘죽은 자는 죽음을 다시 산다The dead revived dying.’ 이야기들의 어두운 심연에서, 그것은 마치 죽음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고대의 사건’처럼,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처럼, 결코 현재가 됨이 없도록 시간의 이행passage을 잡아 늘여버린 그런 사건처럼 놓여있고, 바로 이것이 왜 죽은 자들이 오로지 무한히 죽음에 다가가기만 할 수 있을 뿐인가 하는 이유이다. 최후의 인간은 병들어 죽어가며 아마도 죽었는지 모른다(이야기의 화자는 말하기를, ‘나는 무엇보다도 그가 죽었으며, 이제 죽어가고 있다고 확신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비록 전보다 조금 더 약해지기는 했으나, ’누군가 말했듯이, 그의 삶이 점점 더 희박해지는 그런 존재가 되어‘, 다시 한번, ’지독히도 불쌍하도록‘ 깊이 병들 때까지, 다시 삶 속으로 돌아온다. 화자는 도무지 화해가 불가능한 가정들을 갖고 논다. 그는 말한다, ’나는 지금, 어쩌면 그는 항상 존재한 것은 아닐 거라고 혹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한 이렇게 묻는다, ’만약 그가 이미 죽었다면, 혹은 내가 그를 그저 침묵에 불과한 것으로, 우리와 더불어 남아있는 이 한없는 고통의 현존을 살아내는 것으로, 우리가 그것과 더불어 영원히 살고, 일하고, 죽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최후의 인간> 제2부에서, ‘무대’는 죽은 자들의 왕국에 놓여져 있는데, 이곳에서 망령들은 불가능하게도 매장될 곳을 찾아 배회하고 있다. 화자는 ‘빛의 무덤’, ‘그가 그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아주 환한 빛’을 환기시키나, 그는 소음은 아닌 그러나 아직 침묵도 아닌 어떤 ‘웅얼거림’에 쫓기고 있기 때문에 결코 영원한 휴식을 찾을 수 없다. ‘이 웅얼거림은 나를 취하게 하고, 거의 미치게 만든다.’ 그는 고요의 순간을 갈구해서는 안 되는가? 침묵은 자라나지 않을 것인가? 두 말할 나위 없이 침묵은 자랄 것이다, 그러나 ‘침묵이 자라나는 만큼, 그것은 웅얼거림으로 변한다.’ 이제 아래 인용하게 될 문장이 이 글의 두 번째 부분 끝맺어줄 것이다. ‘침묵, 그토록 많은 소음을 자아내고 평화와 고요를 끊임없이 파괴하는 그 침묵, 이것이 바로 영원의 심장이라 불리는 그 무시무시한 것인가?’

마지막으로 오르페우스의 신화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말들은 모호하며, 어떤 것도 그것을 선명하게 만들어줄 수가 없다.” 이것은 <죽음의 선고>의 마지막 연들에 대한 조르쥬 바따이유의 선고이다. 블랑쇼가 어렵고, 심오한 모호함을 보여주는 작가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호함이 낮이 밤을 잇고, 어두운 자 또마가 태양의 또마에게 자리를 내어주듯이, 그렇게 순수하고 간단하게 흩어져버릴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 것은 지나친 소박함naivety이거나 실수―-피하기 어려운-―가 아닐까? 모호한 것은 그 자체로 소중히 다뤄져야만 하고, 보호되어져야만 한다. 이것이 블랑쇼 사유의 근본적이고, 의심할 나위 없이 탈(脫)조화적인disconcerting 지점의 하나다. 이제 오르페우스의 신화에 관한 그의 완전히 독창적인 주석을, <문학의 공간> 서문에서 그 스스로가 이 작품의 중심―-틀림없이 달아나 버릴 것이기는 하나-―은 <오르페우스의 시선>이라 명명된 글 속에 있다고 말하며 직접 우리의 관심을 자극하는 그 주석을 따라가 보도록 하자.
 
이 신화에 대한 간편한 해석은 오르페우스가 성급함이라는 잘못을 범했다고, “뒤돌아보지 말라”는 명령을 잊어버렸다고, 에우리디케와 지체 없이 함께 살기를 원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진정한 낮의 본성과 일상의 매력을 보고싶어했다고 말한다. 블랑쇼는 정확히 정반대의 관점을 취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오르페우스는 밤의 어두운 모호함 속에 있는, 먼 곳에 있는, 만질 수 없는 육체와 헤아릴 길 없는 얼굴을 한 에우리디케를 원하고있다. 그는 보일 때가 아니라, 보이지 않을 때 그녀를 보고싶어하며 일상적 삶의 친밀성 속에서가 아니라 모든 친밀성이 배제된 낯설음 속에서 그녀를 보고싶어한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살려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녀 속에서 충만한 그녀의 죽음을 갖고싶어하는 것이다.

블랑쇼는 이런 말도 덧붙인다. ‘그것은 마치 오르페우스가 법에 불복종함으로써, 에우리디케를 바라봄으로써, 다만 작품의 숨은 요구에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작품의 요구와 모호한 것the obscure에 대한 관심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이 존재한다는 뜻은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오르페우스와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고, 모호한 것에 접근할 수 있으며, 모호한 것으로 하여금 다가오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블랑쇼는 쉼 없이 이 문제에 대해 숙고해왔다, 가령, 그는 이렇게 쓴다. ‘어떻게 모호한 것의 베일을 벗길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을 활짝 열린 곳the open으로 데려올 수 있을까? 모호한 것이 그것의 모호성(어두움) 속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그런 모호한 것의 체험이란 어떤 것일까?’ 30년 전에 처음 출간된, <르네 샤르 그리고 중성적인 것the neutral의 사유>라는 제목의 글에서 블랑쇼는 이 문제로 되돌아간다. 이제 아래에서, 항상 중성적인 것 속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하는 용어들인 모호한 것, 미지의 것the unknown에 바쳐진 몇 줄의 글이 보여주는 풍요로움과 투명함을 맛보도록 하자.

(시와 사유를 구성하는) 추구the pursuit는 알려지지 않은 것unknown으로서의 미지의 것the unknown에 관계된다relates. 탈조화적인 표현disconcerting expression은, 그것이 알려지지 않은 것인 한에서, 그 미지의 것에 ‘관여relate’할 것을 제안하기 때문에 전복적인 표현이라고 말해져왔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그 속에서 미지의 것이 표면화되고, 선언되고, 벗겨지게 될 어떤 관계를 가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퍼스펙티브에서인가?―그것을 계속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려는 바로 그 퍼스펙티브다. 그러므로 미지의 것은, 이 관계 속에서, 그것을 계속 덮개 아래 두려는 그 빛 속에서 그 스스로를 벗게될 것이다.

오늘날 이 텍스트를 읽으면, 누구나 하이데거의 철학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블랑쇼에 의해 제기된 가설들은 하이데거 사상의 주요한 관심에 대답하고 있는 그런 것들이 아닐까? 우리는 하이데거가 진리truth, 알레테이아aletheia, 즉 탈은폐성Unverborgehheit에 관한 사색에서 무엇보다도 베일 벗기기unveiling, 비은폐성unconcealment, 탈폐쇄성disclosedness, 투명한 것, 개방된 것the open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중에, 하이데거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명한 단편에 점점 더 큰 중요성을 두었다. ‘Phusis kruptesthai philei' 즉 자연―나타남emergence, 새벽/날 밝음 ―은 숨기기를 좋아한다. 존재는 그것의 토굴 속으로 숨어들기를 좋아한다.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기원>을 쓸 당시의 용어들 사용하자면, 존재는 스스로를 운명지으며destine, 우리가 세계를, 빛을, 베일 벗기도록 운명짓는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존재는 대지the Earth, 그것의 은신처를 향해 되돌아간다. 그저 그럴 듯한 가설로서, 이렇게 말해보면 안 될까? 블랑쇼의 용어로 ’미지의 것‘이 ’그것을 덮어두고 있던 바로 그 빛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덮개를) 벗어버리는‘ 한에 있어서, 존재는 더 이상 세계와 대지 사이의, 투명한 것the clearing과 비-탈폐쇄성non-disclosedness 사이의 투쟁―물론 그로부터 예술작품이 태어나지만―에 의해 갈려지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는 여전히 덮개에 가려져 있으면서도 대낮의 빛 속으로 걸어나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이다.

이제 우리는 블랑쇼 그리고 그 또한 모호한 것에 대해 숙고했던 미셸 샤르에게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샤르의 시가 미지의 것에 바쳐졌다는 사실, 말을 내뱉지도 침묵을 지키지도 않았던, 다만 그 미지의 것 자체를 있는 그대로, 동떨어진 채로, 낯선 것으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우리 앞에 내보였던 그의 시 때문이 아닐까? 미지의 것을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둔 채로 끌어안는다는 것은 그것을 동일자화 하는identify 것을 거절한다는 뜻이며, 그것을 그것의 모호성 속에, 결코 풀려질 수 없는 비밀 속에 둔다는 뜻이다. 우리는 샤르가 모호한 것을 ‘실체적인 결합substantial ally’으로 간주했었던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해 사유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유명한 단편을 경외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다. ‘그 신탁을 델피Delphi에 두신 신께서는 그 뜻을 털어놓으시지도 않고 감추시지도 않는다. 다만 암시sign를 주실 뿐이다.’ 샤르는 미지의 것에 바쳐진 자신의 시 속에서 이 단편을 강력한 은유로, “지시하는 손가락, 그 끝이 부러져버린”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블랑쇼의 작품에 몰입하는 것은 결코 가벼운 선택지가 될 수는 없다. 만약 누군가 적어도 선명함이라는 척도에 의해 가능한 진보를 측정하려고 한다고 했을 때, 50년 동안이나 작품을 읽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블랑쇼의 작품들에는 언제나 책을 펴들었던 첫날 이후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 것만 같은 두려움이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에게서 무엇을 배웠던가? 우리는 그의 작품에 대해 어떤 의견을 내놓을 수가 있는가? 사실 블랑쇼는 그가 하나의 가설로서 제시했던 것을 완성했노라고 넌지시 말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말해보면 안 될까? 하나의 전체로서 바라본 블랑쇼의 작품은 미지의 것을 미지의 것으로 놓아둔 채로 그것의 베일을 벗겨냈다고,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 매혹적인 작품은 그것의 모호함obscurity으로, 그 속에 있자면 투명성이 실제로는 불투명성 그 자체보다 더 불투명하게 보이는 그런 투명한 밤Night으로, 길을 찾을 수 없이 캄캄한 야생의 밤으로, 재난Disaster이라는 저 구원 없는 고독으로 우리를 사로잡았다고, 혹은 아직도 그치지 않는 어떤 웅얼거림을 들을 수 없는가 라고?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될까? 이제 우리는 “그 영원한 바깥Outside의 흐름"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되었다고.


역주)-----------------
1) 영역자는 블랑쇼의 작품들을 영역된 서명(書名)으로 기재하고 있다. 가령 <저 너머로Le Pas au-dela>의 영역본 제목은 <The Step Not Beyond>라고 되어있다. 아마 Pas가 ‘발걸음’과 ‘~아님Not’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갖고있는 점을 살리기 위해서였던 듯 하다. 그러나 우리말로 직역하면 <넘어서지 않는 발걸음>이 되어버려 이중적 의미가 아니라 부정의 뜻을 가지게 된다. 또 <불의 몫La Part du feu>도 <The Work of Fire>로 되어있어, <불의 작품> 혹은 <불의 일(작업)> 등으로 옮길 경우 마치 다른 작품인 것 같은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이런 불필요한 혼선을 피하기 위해, 모든 작품들을 프랑스 원서명으로 기재하고 가급적 직역했다.

 2) <또마, 알 수 없는 사람>의 재판본은 초판본(1941)과 전혀 다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선 작품의 분량이 거의 절반으로 줄었고 문체도 상당히 달라졌다. “거칠게 말해 또마의 탐색이라는 주제는 양판본에 공통되게 남아있지만 초기 <또마, 알 수 없는 사람>의 문체를 무겁게 만들었던 최상급 형용사의 중첩, 메타포의 범람, 낭만적 이미지의 남용 등은 재판본에서는 깨끗이 사라지고 반면에 체계적인 간결함과 순수함이 돋보인다. 재판본이 출간되면서 초판본이 절판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작가는 초기의 극도의 낭만적 만연체로부터 탈출, 변신하려 했던 것 같다. 그 결과 오늘날 초판본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또마, 알 수 없는 사람>은 그 재판본을 의미한다.”(최윤정, <소설의 추상화>, <작가세계>, 1990년 가을호, 497~8쪽.)

3) 이야기 속의 이야기story-within-a-story(액자소설), 그림 속의 그림을 뜻하는 미쟝아빔(Mise-en-abime)은 문자 그대로 풀면 "심연 상 배치setting on abyss"인데, 이는 원래 기사들의 갑옷 위에 수놓은 문장(紋章)이나 옛 문장관들의 의복에 흔히 들어있던 장식무늬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것은 큰 실드shield 속에 작은 실드가 들어가 있는 형태이다. 근현대의 문학, 영화, 드라마 특히 미술에서 자주 쓰이는 문예 용어 혹은 기법이다.


Roger Laporte, translated by Ian Maclachlan, "Maurice Blanchot today"
in Carolyn Bailey Gill ed., Maurice Blanchot: The Demand of Writing (Routledge; 1996)
초역 : 한보희 비교문학 박사과정/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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