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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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부탁해"
―생명관리시대를 탈주하는 사랑과 생을 생각하며

후배들과 술을 마시다 고양이 얘기가 나왔다. 요즘은 주변에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대체로 비혼(非婚) 독신여성들이다. 그들이 고양이에 쏟는 애정은 대단해서 마치 자식을 돌보듯 한다. 가족들이 기르는 애완동물은 보통 개이고 혼자 사는 여성들이 기르는 애완동물은 십중팔구 고양이다. 집을 오래 비워도 얌전히(?) 지내는 동물이 고양이 쪽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고양이의 행동, 성격, 외모, 특히 크고 신비로운 눈동자 등이 그들을 열광시키는 모양이다. 순정만화 주인공의 과장된 큰 눈을 닮았나? 아무튼 후배 중 하나가 집에 일찍 들어가야 한다기에 왜냐고 물었더니 엊그제 고양이 중성화 수술―정확히 말해 ‘자궁적출 수술’―을 해주어서 곁에 있어야 한단다. 나름대로 큰 수술이어서 아직 육체적, 정신적 충격이 남아있을 거라고 걱정을 한다. 나는 ‘자궁적출 수술’이라는 말에 꽤 충격을 받았다. 여성이 그런 수술을 받는 경우는 자궁암이나 뭐 그런 치명적인 병에 걸린 경우뿐이고 수술 뒤에 남는 정신적 상처는 상상을 초월할 것 같다(수컷 고양이 중성화 수술은 생식능력을 제거하는 ‘거세’이리라). 그렇지만 사랑하는 애완동물에겐 아무렇지 않게 그런 수술을 한다. 심지어 ‘수술해준다’는 시혜적 표현을 쓴다. 마치 쌍꺼풀 수술이나 포경수술이라도 해준 것처럼…. ‘해준다’니 누구를 위해 그 고양이의 자궁을 떼어낸단 말인가?




그런 일이 비인간적인지는 모르겠으나 틀림없이 ‘비고양이적인’ 처사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비난하자 후배는 정색을 하며 아니라고 답했다. 어째서? 첫째 발정기에 고양이가 받는 스트레스가 대단하므로 수술을 통해 중성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며, 둘째 발정기에 오래도록 교미를 못할 경우 자궁에 고질병이 생기는 경우가 흔하므로 예방 차원에서도 정당화된다고 한다. 교미를 할 수 있게 해주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물었더니 그럼 평생 새끼를 백 마리는 낳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 새끼들을 다 어쩔 것인가! 기르지 못할 거라면 아예 안 낳는 게 낫다.’ 나름대로 이치에 닿는 말로 들렸다. 중성화 수술은 도시에서 인간과 함께 살기 위해―솔직히 말하자면, 인간이 고양이를 기르기 위해― 고양이가 치러야할 대가인 셈이다. 섹스와 출산, 양육, 요컨대 ‘재생산’과 관련된 문제여서 그런지 이 문제는 인간의 경우로도 쉽게 치환이 가능해보였다. 그러자 갑자기 우울하면서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유태인이나 집시, 난쟁이처럼 선천적 기형이나 불구자들에게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단종시술을 감행했던 우생학의 역사가 우선 떠올랐다. 그런 일들은 서구의 선진국에서 최근까지도 행해졌던 일이며, 아마 지금도 암암리에 진행되는 일일지 모른다. 얼마 전 미국에서 전신마비 장애를 가진 친딸에게 부모가 그런 수술을 ‘해줘서’ 논란이 된 바 있다.


고양이로부터 애슐리까지

애슐리(Ashley)는 뇌손상으로 전신마비 장애를 앓고 있는 아홉 살 소녀다. 말도 못하고 똑바로 앉을 수도 없는 탓에 침대에서 하루를 보내는 이 아이를 부모는 ‘배게맡 천사’(pillow angel)라고 부른다. 정신발달은 생후 3개월 수준에 멈춰있다. 지난 2004년 애슐리의 몸에 사춘기 증상이 나타나면서 키가 크고 체중이 늘자 아이를 안아 옮기기 힘들어진 부모는 병원과 상담한 끝에 수술을 결행했다.




수술 내용은 자궁적출, 유방의 발달을 가져오는 유선의 제거, 성장을 억제하는 호르몬 투여 등이다. 이로써 애슐리는 여섯 살 아이의 모습으로 평생을 살게 됐다. 유방암, 자궁암 걱정도 없고 성폭력에 의한 임신 가능성도 제거됐으며, 부모가 아이를 건사하기도 훨씬 편해다. 애슐리의 부모는 아이의 ‘삶의 질’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믿고 있다. 당사자의 행복과 양육자의 편리, 양자의 ‘삶의 질’을 위해 의료기술이 도입된 이 사태를 누군들 쉽사리 비난할 수 있으랴. 그들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물어보자. 낙태는 제쳐두더라도, 섹스와 임신을 분리시킨 피임약과 콘돕의 경우는 어떨까? 문명화된 사회에서 거의 모든 성인들이 자발적으로 사용하는 이 물건들은 앞서 말한 ‘공리주의적’ 사랑과 본질상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 섹스와 임신, 출산과 양육, 요컨대 생명의 관리를 위한 지식-권력의 선제적 개입이란 점에서 그것은 스스로에게, 혹은 자기 몸 속의 고양이와 애슐리에게 가하는 성장억제와 단종수술이 아닐까.

생-권력으로부터 탈주하는 삶이

고양이 중성화 수술을 해준 후배의 당당한 논리는 푸코가 생-권력(bio-power)이라 부른 것이 얼마나 일상화되어 삶의 미시적 영역까지 뻗쳐있는지 보여준다. 이 권력은 이성적이고 관리적인 동시에 쾌락 지향적이다. 거기에는 무엇이 좋은 생인지에 대한 가치의 결정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의학적, 인구통계학적 지식들이 촘촘하고 확고하게 똬리를 틀고 있다. 게다가 너무나도 세심하고 배려적인 ‘착한’ 심성과 결부돼있다. 체계적 지식과 강력한 기술의 바탕 위에 누구도 쉽게 부인할 수 없는 선의가 결합된 이 생-권력의 주체와 그것의 대상―당연히 스스로를 배려할 줄 모르며 지식과 기술도 한없이 부족한, 따라서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으니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자신의 생과 주위 환경에 피해를 끼칠 뿐이라고 가정되는 대상― 사이의 엄청난 힘의 비대칭성은 우리 눈앞을 캄캄하게 만든다. 도무지 저항이라고는 불가능할 것만 같은 그 둘 사이의 까마득한 격차! 여기서는 오직 우연한 실수나 사고만이―예컨대 만에 하나 나올까말까 하다는 불량콘돔 같은 것― 혹은 절망적인 탈주만이 생에 구원의 길을 열어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의 생이고 어떤 구원인가? 선량한 주인의 방에서 어렵사리 탈출해 기껏 천덕꾸러기가 된 길고양이의 운명을 생각해보자. 탈주한 것은 (현재와 미래에 보장된 안락한 생활을 스스로로부터 박탈당한 그 길고양이가 아니라) 그 고양이에게서 태어날 미래의 고양이들일 것이다. 그러니까 탈주한 것은 그 암고양이의 자궁이다. 문명의 물샐틈없는 고무막을 기적적으로 꿰뚫은 정자, 탈출한 길고양이의 보잘 것 없는 자궁이나 쬐그만 성기 같은 것들―우리는 겨우 이런 것들에서만 자유로운 생의 운명적 힘이나 결사적 항쟁의지를 보아야 할까.


그녀에게 말해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그녀에게>에는 식물인간이 된 여자를 짝사랑하는 남자 이야기가 나온다. 간호사인 남자는 식물인간이 된 ‘그녀’를 4년 동안 헌신적으로 돌보던 끝에 여자를 임신시키고 강간죄로 체포된 후, 감옥에서 자살하고 만다. 문득 애슐리가 떠오른다. 그리고 생리를 시작한 딸이 강간을 당해 불의의 임신을 하게 될까 염려하는 그 아이의 부모가 떠오른다. 영화에서 임신한 여자는 아이를 낳고 식물인간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깨어나 새 삶을 시작한다. ‘영화니까…’라고 쉽게 단정짓는 것은 어리석다.



이 영화의 원제인 <hable con ella>는 ‘그녀에게 말해요’란 뜻이다. 남자는 알아듣지 못하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한다. 벽에 대고 독백을 하듯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그녀의 침묵으로부터 무언가를 끊임없이 듣고 있는 듯하다. 이야기한다는 것, 대화한다는 것, 소통한다는 것은 그가 그녀를 사랑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소통 속에서 그녀는 인형(real doll)도, 사이보그도, 식물처럼 자라고 썩을 뿐인 살덩어리도 아니다. 그렇다고 ‘천사’도 아니다. 그가 그녀를 또 하나의 주체나 인격체로 본다고 하는 것도 부족한 표현이다. 여기에는 두 사람 이외에 다른 무엇이 있다. 그를 통해 그녀에게 건네진 그것은 그녀를 통해 다른 누구에게 건네질 것이다. 말과 생명. 그것은 생의 이야기이고 언어의 생명이다. 그것은 또한 꼬뮨(commune)의 동사형인 코뮤니케이션이다. 영화에서 남자의 돌연한 죽음은 이 생의 사건들이 치러야할 대가를 바라보는 감독의 슬픔이고, 또 작은 경고로 보이기도 한다. 의도적으로 배치된 희생이라고 해도 좋다. 공짜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고 받는 생의 사건, 즉 사랑은 그처럼 결정적인 것을 요구해오기도 한다. 80년대 유행했던 민중가요의 한 대목처럼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 바쳐라.” 아마 언젠가 되살아난 그녀에게도 같은 요구가 주어질지 모른다. 나는 애슐리의 부모에게서 자식을 배려하는 선하면서도 계산적인 심성 이외에 바로 이러한 (마음에 썩 드는 표현은 아니지만) 용기와 희생은 보지 못하였다.

오월의 생과 저항을


5월이다. 봄이 왔다가 이제 막 지고 있다. 4.19와 5월 광주, 6월 항쟁…. 우리 현대사의 피어린 봄날을 상징하는 이 숫자들의 공통점은 ‘민주주의’라는 추상명사에 있지 않다. 혹은 민주주의는 추상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모두 구체적인 사람들과 관련이 있으며 그들의 죽음과, 보다 정확히 말해 죽음을 뚫고 나아가는 생의 힘과 관련이 있다. 김주열, 박종철, 이한열 그리고 수천 광주시민의 시퍼런 목숨들 말이다.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돌연히 끊겨버린 이들의 생을 다시 잇겠다는 공적인 노여움의 힘. 거기에는 체계의 현실주의와 공리주의를 뛰쳐나가는 생의 언어가, 운동하는 동사형의 꼬뮨이 있다. 놀랍고 두렵고 아름다운 사랑의 숭고한 율동. 너무 먼 이야기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이 글은 고양이로부터 너무 먼 곳까지 와버린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처럼 멀리에서부터 고양이를, 자식과 부모를, 연인을 사랑할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은가.


<연세대학원신문>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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