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붕시대를 살아가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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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붕시대’를 살아가기

―증발하는 미래와 도래하는 타자 사이에서


‘멘붕’시대


이른바 ‘멘붕’의 시대다. 총선 이후 멘탈 붕괴와 무기력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주위에 여럿 있다. 나도 아주 예외랄 순 없다. 설상가상, 아니 ‘넘어진 놈 짓밟고 가는 발길’처럼 통합진보당의 부정선거와 당권파-비당권파 진흙탕 싸움이 우리 위를 덮친다. 적어도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진보’라고 여겼던 이들에게는, 저것이 적대적 외부세력의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고 우리가 믿었던 것)의 발길질이라 더 통탄스럽고 혼란스럽다. ‘도대체 멀쩡한 건 어디 있는 거지?’ 피아(彼我)를 식별할 수 없는 전장 한복판에 무방비로 서있는 듯한 요즘이다. 


‘멘탈(mental) 붕괴’라는 말이 여기저기 쓰이며 유행어가 된 것은 우리가 ‘실제로’ 멘붕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멘붕’이라는 가벼운 유행어로 실제로 일어나는 붕괴를 가리는 중인 것이다. 가장 훌륭한 가면은 바로 그 사람 자신의 얼굴을 본뜬 가면이어서, 아무도 그 가면 뒤에 그가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가 ‘현실사회’라 믿는 상징계가 무너지는 사건들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멘탈 붕괴’라는 재미있는 조어는 상징계 붕괴라는 상징화될 수 없는 외상적 체험들을 가리킴으로써, 가린다. 상징계의 깨어진 파편에 삶이 베이거나 그 잔해더미에 깔려 압사하기 전까지는 ‘멘붕’이라는 말로, 가까스로, 우리의 자아를 보호하고 위로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 멘붕 상태야”라고 말할 수 있는 동안엔 실제로 멘탈이 붕괴하는 사태는 막고 있는 셈이니까. 하지만 위로나 보호, 치유 같은 말들로 감당할 수 없는 사태들이 ‘멘붕시대’의 저류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 같다. ‘맨틀(mantle) 붕괴’가 바로 그것이다. 지진(地震), 해일, 지각변동, 기후의 발작과 생태환경의 급속한 악화―이런 자연의 격변을, ‘멘탈 붕괴’라는 심리의 격변과 운을 맞춰 ‘맨틀 붕괴’라고 불러봄직 하다. 2012년, 우리는 ‘멘붕’과 ‘맨붕’이 동시에 진행되는 시간을 지나고 있다. 문명사와 자연사의 동시적 격동―정말 심상치 않다. 게다가 그것이 전(全)지구적 현상이다. 이런 글로벌한 동조현상은 사상 초유의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한편에선 하늘―민심과 문명―이 무너지고, 다른 한편에선 땅이 무더지는 듯한 이 지구적 이중격변이 너무나 심상치 않기 때문에,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불길한 느낌들을 애써 의심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그런 불안을 꺼내놓지 않으려 주의를 기울인다. 까딱 잘못하면, 종말론 팔아먹는 사이비 광신도나 우울과 무기력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으로 보일게 뻔하잖은가. 그러나 건강한 생활인의 가면을 쓴다고 해서, 마그마처럼 들끓는 불안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 불안의 가장 밑바닥에 ‘후, 쿠, 시, 마’라는 네 글자가 있다. 

후쿠시마를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탁 막힌다. 거기에 어떤 생각을 던져 넣어보아도 아무런 말도, 형상도 되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도무지 ‘생각’이란 것이 진전되질 않는다. 후쿠시마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묘한 경험을 하곤 한다. 한편으로는 이런 저런 불길한 공상과 근거가 빈약한 잡념들이 뒤엉키며 칡덩굴처럼 자라나지만, 그 배후에서 하얀 구멍 같은 것이 점점 커지며 지우개처럼 따라붙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 저런 정념들 모두를 텅 비워버린다. 그것은 폭설이 모든 풍경을 하얗게 지워버리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캄캄한 어둠보다, 절망보다 더 무거운 무색(無色)의 압도적 공허. 그 무게 아래서는 비통함이나 공포마저 무릎이 꺾인다. 생활상의 온갖 근심으로 노심초사하던 사람에게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말기 암 선고가 그와 같을까. 모든 무게 있는 것들을 압살하는 제로의 중량.  


후쿠시마 이후


2011년 3월 일본 동북부(도호쿠) 지역의 앞바다에서 진도 9의 강진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발생한 엄청난 쓰나미가 후쿠시마 현의 해안지대를 쓸어버렸으며 2만 명에 가까운 목숨을 앗아갔다. 하지만 이 자연적 재해에 문명적 재난이 포개어지면서 문제는 아주 복잡한 것이 되고 말았다(이 복합성이야말로 앞으로 인간이 겪게 될 모든 재난의 성격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모델이다. 이미 인간은 자연과 문명이 구분되지 않는 세계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진에서 발생한 해일은 해안가에 위치한 원자력 발전소(후쿠시마 원전 1, 2, 3호기)를 파괴했고, 대지진과 쓰나미보다 더 묵시록적인 충격을 던진 것은 원전의 냉각장치가 고장 나고 연료봉이 녹아내리면서 격납고가 폭발하는 등 원자로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엄청난 양의 방사능 물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쏟아내기 시작했다”고 썼다. 왜내면 방사능 유출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보도에 따르면, 사고 원전은 지난 해 여름쯤 통제력이 일부 회복돼 냉각장치가 가동되면서 방사능 유출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도 원전이 정상화된 것이 전혀 아니며 기껏 원전의 완전 폐기를 위한 준비 절차를 진행하고 있는 수준이다. 녹아내린 연료봉은 원자로 바닥에 고여 핵반응을 일으키며 엄청난 고열을 내고 있는데 만약 원자로 바닥이 뚫고 토양으로 스며들기 시작하면 이러한 인류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어떤 재앙으로 이어질지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다. 게다가 원전 근처의 엄청난 방사능 수치 때문에 소수의 인원만이 죽음을 각오하고 접근해 짧은 시간만 작업을 하고 나올 수밖에 없는 형편이어서 작업 속도도 더디고 언제 완료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보이지 않고 냄새도 없고 잘 느껴지지도 않지만, 몸을 관통하며 치명적 내상을 입힌다는 방사능은 대류를 타고 서울에 내려앉기 전에, 먼저 불안과 우울증이 되어 나를 잠식해갔다. 죽을까봐 두렵거나 건강이 상할까 염려가 되어 그런 게 아니었다. 그것은 촛불시위 때의 광우병 위험과 비슷했다. 그때 내가 느낀 분노와 불안은 미국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리거나 프리온이 내 뇌에 스폰지처럼 구멍을 숭숭 뚫을까 하는 염려나, 건강을 망쳐 수명이 짧아지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나를 뒤흔들던 것은 ‘공적인 감정’이었다.1) 


1) 이때 공적(公的)이라는 것은 공화국이라고 할 때의 public이 아니다. 그것은 김지하가 쓰는 “天地公事”라는 개념의 그 “公”이다. 이 “공적 감정”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나, 즉 신체를 넘어선 나, 또한 나를 넘어선 우리, 우리의 자식들과 후손들, 억압된 조상의 기억 그리고 다른 생명들과 함께(共) 동참해 느끼는 감정이다. ‘公的 감정’은 ‘共的 감정’이며, 원래 감정(affect)은 감각과 달리, 개인이나 신체로 환원되지 않는다. 공적 감정은 ‘타자의 고통을 함께 겪는다’는 뜻의 compassion에 가깝다. 그것은 감각의 텔레파시이며 그 텔레파시는 시공(時空)이라는 경험적 조건을 초월한다.   

 

2011년 봄, 나는 “이제 지옥문이 아가리를 벌렸다”고 썼다. 지옥의 숨결과 악취(방사능)가 흘러나오는 거대한 구멍…. 아우슈비츠의 지하 가스실로 끌려가는 유태인들처럼, 아무런 희망도 없는 텅 빈 눈빛의 인간들과 지상의 뭍 생명들이 거대한 행렬을 이루고 발을 질질 끌며 그 구멍으로 삼켜지듯 걸어 들어가는 끔찍한 이미지가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심약한 인간으로 살아오지 않았다. 소중히 품었던 희망들이 맥없이 무너지고, 보기 흉하게 꺾어지는 것을 드물지 않게 보아온 나는―누군들, 어느 세대인들 그런 상처가 없으랴마는― 더 이상 낙천적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람시가 “이성의 낙관주의”라 불렀던 어떤 것을 지키고자 했었다. 후쿠시마는 그것을 뺐어갔다. 미래를! 희망을! 사람들이 사랑하며, 미워하며, 다투고 배우고 화해하며, 울고 웃으며, 새끼를 낳고, 기르고, 일하고, 놀고, 늙고 천천히 이별과 슬픔의 뜻을 음미하며 죽어가는 그런 세상.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니라,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런 모든 드라마들이 펼쳐질 어떤 무대, 신의 품과 같은 어떤 대지…. 후쿠시마 이후로 나는 더 이상 그런 것을 전제할 수 없게 돼버렸다. 너무나 당연하기에 믿는다는 생각조차 가질 필요가 없었던 삶의 지평이 갑자기 꺼져버렸다. 후쿠시마에 벌어진 악마의 아가리, 저 검은 구멍은 세상의 영구성과 생명의 지속성에 대한 믿음을 제일 먼저 집어삼켰다. 그런 경악스런 박탈의 느낌 속에서, 나는 세상이라는 생명들의, 삶들의 공동지평의 실존을 처음으로 강하게 느꼈다. 파괴되고 오염되면서 돌이킬 수 없이 상실되고 있는 그것―임박한 종말 앞의 세상. 그것이 아주 구체적인 느낌과 이미지들로 스멀스멀 피어올라 짙고 검은 안개처럼 나를 잠식해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종말에 관한 생각들을 부인하고, 묵시적 이미지들을 억압하고, 불안해하는 자신을 야단치고, 비웃고, 빨리 생활의 다른 장면들로 관심을 돌리라고 채근하고, 마지막엔 ‘그 모든 게 네 생각처럼 된다하더라도 너는 저주받은 카산드라처럼 아무것도 바꿀 수 없노라고 설득하면서,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를 수가 있었다. 불안이 진정되거나 일상적 삶의 안정이 복구된 것은 아니고, 그럭저럭 별일 없는 척하는 연기가 가능하게 된 수준이었다. 나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다소간은 태연하게 이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에 약간 놀랐다. 다들 나와 비슷한 과정을 겪어서 그런 척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 생각이나 감정이 터무니없이 과장된 것이었는지,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과장된 것이든 아니든, 불안은 마음 바닥에 수시로 출렁이는 캄캄한 물처럼 고여 있다. 후쿠시마 이후, 가슴 속에 불길한 우물 하나가 생겨났고, 나는 무서워하면서도 가끔 그 우물로 다가가 바닥이 없는 그 캄캄한 암흑의 깊이를 들여다본다. 무저갱(無低坑).   


죽음을 대신하는 단어들이 있다.2) 어떤 이에게는 병명(病名)일 테고, 어떤 이에게는 누군가의 이름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외상적 사건을 가리키는 어떤 단어이고 기타 등등이다. 후쿠시마는 인류에 내려진 사형선고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제 인류의 죽음을 대신하는 한 단어가 되었다. 다자이 오사무 단편소설에 나오는 알 수 없는 소리 “쾅, 쾅, 쾅”처럼, 그것은 모든 주체적 행위와 감정들을 일순 무(無)로 돌려버린다. 무기력과 권태를 뒤에 남기고서. 하이데거나 레비나스 같은 철학자들은 무기력과 권태를 존재자의 자기정립의 근본음조나 기분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런 자기정립의 시간과 여력이 남아있을 것인가?


2) 실은 ‘죽음’이라는 말 자체가 죽음을 대신하는 단어다. 우리가 ‘죽음’이란 말에 이렇게 저렇게 부여하는 의미나 느낌이나 상상 그리고 그에 대처해 만들어낸 모든 제도적 장치들―종교에서 상조보험에 이르기까지―은 사실 죽음 그 자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며, 다만 공허(the Void) 앞에 선 우리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가르쳐주는 데만 유용할 뿐인지 모른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말들 전부가 사물이나 사태들과 전혀 다른 태생을 갖는다. 말들은 각각 그 말들이 가리키는 어떤 사물이나 사태와 대면하고 있지만 등 뒤에서 그 말을 묶고 있는 끈들은 사물이나 사태가 아니라 다른 말들에 엮여있다(어쩌면 사정은 사물이나 사태 쪽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결국 말과 사물은 무연(無緣)하고 그렇기에 서로 어긋나고 미끄러지면서 세미오시스 같은 의미화 운동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또 한편으론, 이 모든 말들과 저 모든 사물 및 사태들이 마치 자명하게 엮여있기나 한 것처럼 여기는 한에서--라캉이 '누빔점'이라 부른 어떤 작용이 있는 한에서-- 언어라는 사태가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말들 전부를 꼭두각시처럼 끈으로 묶어 조종하는 어떤 주체가 있을까? 또한 사물과 사태들 전부를 묶는 끈의 네트워크를 조종하는 어떤 주체가 있을까? 그 두 주체(서로에겐 무연한 타자)가 마치 한 몸인 양 호흡을 맞춰 움직여야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이 언어라는 현상이 이정도로 실효적일 수 있지 않겠는가? 혹은 오른손으로는 말들의 네트워크 전체를, 왼손으로는 사물과 사태의 네트워크 전체를 움직이며 그때그때 그것들을 만났다 떨어졌다 하게 함으로써, 언어라는 현상을 성립시키는 하나의 신적인 꼭두각시 조종사―우리는 그것을 (말과 사물의 관계를 주제하는) ’주체-타자’라고 불러보자. 지금 말로 옮길 수 없는 공백, 혹은 트라우마적 사태에 직면해 ‘붕괴’를 겪고 있는 ‘멘탈’은 바로 그 꼭두각시 조종사(‘주체-타자’)의 마음(몸)을 가리킨다. 덧붙이자면, 말과 사물 양편의 주인(대표)을 붙여놓은 모양새인 이 ‘주체-타자’는 인간문명으로도 자연사물로도 전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제3의 중간적 존재이다. 아마도 그것은 ‘말하는 동물’, ‘문명적 자연’ 등등의 모순적 결합으로, 모순적 결합이기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어긋남과 갈등의 운동으로 간주돼야 할 것 같다. 이 ‘주체-타자’라는 존재의 운동방향이 급선회할 조짐―우리가 ‘멘붕’이란 말로 가리(키)는 어떤 것은 바로 그런 변동이 아닐까?  

 

발 아래선 맨틀붕괴가 일어나고 후쿠시마에선 ‘노천 방사능 발전’이 계속되고 있다. 머리 위에선 하늘―민심이라는 집합적 멘탈―이 산산조각 난 채 떨어져내려 아무데서나 부패해 간다. 천지간 어디에 몸을 두어야 하나? 미친놈처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쳐야 하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신발과 모자라는 문명의 상징들을 썼다 벗었다하면서, 오지 않는 고도(Godot)를 기다려야하나? 어쩌면, 광신자의 말처럼, 이 모든 재난(disaster)은 문 앞에 당도한 천국이 우리에게 마음을 돌리라고, 삶의 방향을 돌리라고 요구하는 전회(轉回)의 노크 소리―쾅, 쾅, 쾅―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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