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의 생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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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零度)의 생 앞에서

 


이런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요즘 들어 ‘0’만큼 중요하고 긴급한 주제는 없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인간 문명 전체가 0으로 환원될 위기 앞에 서있다는 얘기는 광신에 사로잡힌 종말론자의 기우만은 아닐 것이다. 삶이 무화(無化)되는 죽음의 문제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에게만 심각하고 의미 있는 문제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0과 관련해 세 가지 차원의 사유를 동시에 전개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는 수학적 0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사에 있어서 0의 의의이며, 마지막으로 정치사회적 차원에서 0의 가능성이다.  

 

 

수학적 영(0)

 

수학적 0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 심오함을 다 캐낸 사람도 아직 없는 것처럼 보인다. 0은 자릿수 개념을 통해 10진수 체계를 성립시켰다. 1부터 9까지의 자연수는 0이라는 표기를 덧붙여 반복됨으로써(1, 10, 100…) 무한히 확장돼 나갈 수 있고, 이 편리한 표기법은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 같은 사칙연산을 보편화시킬 수 있었다. 0 덕분에 위치--1의 자리, 10의 자리, 100의 자리…--에 의한 수 표현이 가능하고 그로 인해 셈이나 수의 기록도 편리해진 것이다. “없는 것을 숫자로 0이라 하자. 값이 없는 자리를 0으로 하자.” 이처럼 평범해 보이는 발상이 수학에, 또한 수학을 사용하는 문명 전체에 엄청난 발전을 가져왔다. 0의 발견은 상상 속에나 존재했던 엄청난 크기의 수들을 현실적인 계산 가능성의 세계로 끌어내리는 역할을 했다(0의 발견자로 추앙되는 브라마굽타는 7세기 경 인도의 천문학자였고, 당시 천문학자는 신의 뜻을 살피는 사제이기도 했다. 결국 0은 신이 인간에게 자신의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열어준 작은 문(門)과도 같은 것인지 모른다).

 

 

 

 

비어 있는 자리를 나타내는 숫자, 또는 아무것도 없음을 나타내는 숫자인 0은 무(無)와 무한(無限)이 포개진 숫자이기도 하다. 어떤 수에 0을 더하거나 빼도 그 수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0을 곱하면 모든 수는 0이 되며, 0으로 나누면 어떤 수든 무한이 된다. 0은 얼마나 기묘한 평등함을 가져오는 것인가. 0은 모든 수를 무로 환원시키고, 어떤 수에든 영원의 가능성이 잠재돼 있다는 복음--아무리 천한 자에게도 하나님의 은총이 깃들어 있고, 아무리 하찮은 미물에게도 불성이 잠재돼 있다--을 전한다. 그리하여, 차이와 위계로 이뤄진 수들의 실정적이고 무한한 체계는 0에 의해 가시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0에 의해 무화되기도 한다.

그것은 산술적이고 양적인 평등을 넘어서는 평등,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공(空)함을 깨달은 자 앞에 나타나는 어떤 새로운 평등, 즉 무등(無等)의 지평 열어 보인다. 0 -- 이 찌그러진 원환(圓環), 타원처럼 보이는 작은 기호에, 어쩌면 인간 사유의 모든 형이상학적 과거와 탈(脫)형이상학적 미래 전체가 응결돼 있는지도 모른다.
 

수학사에는 무한에 대해 탐구하다 미쳐 죽은 사람들이 여럿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집합론의 창시자인 칸토르다. 칸토르는 ‘무한을 셀 수 있다, 무한에도 종류가 있고 크기가 있다’는 것을 입증한 사람이다. 마치 0을 셈 안에 들여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 고대 인도인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칸토르의 사상은 당대의 수학자들에게 지극히 위험하고 불합리한 사고방식으로 비난을 받았다. 실제로 칸토르의 집합론은 수학이 논리적으로 완전무결한 체계가 될 수 없다는 괴델의 증명을 불러들였다. 괴델에 따르면, 완성된 증명의 체계 안에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입증할 수 없는 적어도 하나의 명제가 필연적으로 들어있다. 과감한 비약을 시도해도 좋다면, 우리는 괴델의 증명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진술을 끌어낼 수 있다. 수나 명제로 이뤄진 이성적 체계 안에는 그 이성이 증명할 수 없는 적어도 하나의 항이 반드시 존재하며, 이 항이야말로 이성의 체계가 자신을 정립하면서 망각한--니체가 ‘기원에 대한 망각’이라 부른-- 어떤 근원적인 것의 흔적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성 안의 타자’라고 불러볼 수 있다. 7세기 무렵 사제이자 천문학자였던 브라마굽타가 산술 체계 안에 0이라는 숫자를 도입해준 덕분에, 그리고 그것이 800년의 세월 동안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에 도달한 덕분에 건축될 수 있었던 근대 수학의 장엄한 성채는, 무이자 무한인 0이 그 현기증 나는 위력을 드러내자 안으로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0은 인간 이성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신이 보낸 ‘트로이의 목마’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대학자도 0이라는 이상한 숫자를 멀리하라고 경고했었나보다.

 

 

정치-사회적 영(0)

 

우리는 0이 지닌 위험함--모든 질서를 뒤흔들기 위해 찾아오는 '없지만 있는' 어떤 힘, 혹은 음성 언어 상으로는 식별되지 않지만 표기할 경우 오자(誤字)로 식별되는 디페랑스(differance)의 'a' 같은 것--을 수학사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정치사회적 0의 존재, ‘없지만 있는’, 혹은 ‘있지만 없는’ 어떤 사람들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알쏭달쏭한 말이지만, 처음부터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펼쳐보라. 거기 마치 처음 보는 듯 낯선 동창의 얼굴을 하나쯤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있었던’ 어떤 사람의 얼굴. '아, 이런 애가 나랑 1년, 2년, 어쩌면 3년 내내 곁에 있었던가?!' 여기서 공포영화적 상상력까지는 한 발짝만 더 나가면 된다. 만약 그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10년 전 앨범에서도, 20년 전 앨범에서도 발견된다면…. 이 유령 같은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런데 모든 공포영화는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현실을 반영한다. 때문에 그 익숙하고도 낯선(unheimlich) 존재에게는 반드시 사연이 있고, 그 사연은 집단의 폭력--폭력에 대한 묵인이나 무관심이 거기 포함된--과 상관적인 경우가 흔하다. 요컨대 그는 공동체의 희생양의 현신이다. 다시 인도로 한번 돌아가 보자.   

 

 

 

 

인도의 엘리베이터엔 ‘0층’ 있다고 한다. 우리는 지상의 첫 번째 층을 ‘1층’으로 표기하지만 인도인들은 ‘0층’이라고 쓴다. 0이라는 숫자를 발견한 고대 인도인들의 후손답다. 브라마굽타가 0을 발견하기 이전에도 0, 그러니까 무(無)의 개념을 알고 있는 문명들은 많았다. 중국인들은 재산을 양수로, 빚을 음수로 계산해 재산과 빚이 똑같을 때는 0(‘없음’)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며, 마야인들은 0을 자릿수로 쓸 줄도 알았다(가령 22와 202를 구분하기 위해 0과 비슷한 모양의 숫자를 써넣었다). 앞서 말했듯이, 인도인들의 진정한 기여는 0을 하나의 숫자로 보고, 수와 계산의 체계 안에 0을 도입했다는 점에 있다. 그러니까 0은 이전과 달리 그냥 ‘없음’을 가리키는 표기가 아니라 하나의 숫자로서 수와 계산의 체계 안에서 작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0의 도입과 더불어, ‘있다’와 ‘없다’만이 아니라 ‘없는 것이 있다’는 모순적 개념이 논리적 체계 안에 들어온 것이고, 무(無)의 작용을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이 0과 함께 열린 것이다. 그런데 인도에는 0층만 있는 게 아니다. 가장 밑바닥, 0층의 사회적 존재들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인도의 카스트(계급제도)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넷으로 구분되지만 카스트에 끼지도 못하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불가촉(不可觸) 천민들이다. 인도 이외의 많은 사회가 오랫동안 계급적 구조를 가져왔다. 네 개의 계급적 위계가 있다는 것은 인도만의 특이함이 아니다(유교문화만 해도 사, 농, 공, 상이라는 직능으로 표기된 네 개의 위계적 신분 구별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엄격히 말해, 우리가 계급 제도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다고 여긴다면, 그건 아주 순진한 생각이리라). 인도의 특이한 점은 불가촉 천민이라는 ‘계급 외적 존재’를 사회 안에 공식화해 들여놓은 것이다. 이것은 계급구조를 지극히 안정적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계급제도의 모든 스트레스를 ‘액받이’해주는 어떤 집단이, 마치 입시교육의 모든 스트레스의 ‘액받이’인 왕따처럼 가까이에 있으므로--, 그와 반대로 계급구조 자체를 무화시켜버릴 위험도 내장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계급 구조의 일원인 어떤 사람이 불가촉 천민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나와 우리 모두는 불가촉 천민이다, 우리는 모두 0도의 존재들이다’라는 놀라운 통찰에 도달하고, 그런 급진적 통찰을 제도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계급적 위계 전체를 상대적이고 우연한 것으로 뒤흔들어버린다면?!

 

 

정신사의 영(0)

 

 

나는 숫자의 체계에 0을 도입한 것과 계급의 체계 안에 불가촉천민이라는 계급 외적 존재를 들여놓은 것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둘 사이에는 어떤 구조적 유사성이 엿보인다. 불가촉 천민 같은 존재들을 사회 안에 상존시킨다는 발상은 지극히 위험하고 역겨운 짓이지만, 어쩌면 그와 정반대의 가능성을, 인간의 정치사회적 체제 안에 일종의 시험대를 들여놓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 인류의 정신사에 0을 도입한 또 하나의 위대한 이름이 역시 인도와 관련돼 전해지는 것이 순전히 우연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는 싯다르타, 즉 부처이다. 원래 0은 순야(sunya, 空)라는 인도어에서 유래했는데 이 말은, 아시다시피 불교--특히 대승 불교--의 중심 어휘이다.  

 

 

부처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 즉 색계(色界)에 공(空)의 차원을 들여놓았다, 혹은 공의 차원을 발견했거나 깨달았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모든 있는 것들은 없는 것이며, 없음은 그냥 없음으로 치부해 무시할 어떤 것이 아니라 ‘있는 없음’으로 간주해 성찰되어야 한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는 실정적 세계--색은 색이고 공은 공이며, 색과 공이 전혀 별개의 자리에서 따로 놀던 세계--는 여기서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그것을 설립한 경계와 함께, 영영 잃어버린다. 있음과 없음을 가르는, 기존에는 의식되지 않던 경계에 대한 반성적 사유가 나타난다. 사실 싯다르타는 계급 제도의 최상층에 속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깨달은 자인 부처는 계급 제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가촉 천민과 그 구조적 위상이 동일하다. 그 둘은 모두 계급제도의 0도를 사는 자이다. 어떤 면에서, 부처가 힌두교에 가한 충격은 예수가 유대교에 가한 충격과 동일한 성격을 지닌 것 같다. 예수는 하나의 정치사회(polity)가 존립하기 위해 폭력적으로 배제한 희생양들의 무고함을 증언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희생양과 동일한 존재로 만듦으로써(십자가 위의 예수), 신이 바로 그 0도의 삶을 견디는 자들에 깃들어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인간적 세계 바깥에서 절대적 타자로 존재하던 유대교적 신은 그 종말을 고하게 된다.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법 바깥의 존재(法外人), 호모 사케르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불가촉천민’과 유사한 정치사회적 존재의 기이한 계보를 서구의 정치와 법, 형이상학의 역사를 관통해 추적하고 성찰해오고 있다. 이 사유의 기획에는 ‘호모 사케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데, 고대 로마법의 용어인 ‘호모 사케르(Homo Sacer)’--직역하면 ‘성스러운 인간’--는, 인도의 불가촉천민처럼, 시민이 그를 죽여도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는 자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들은 우리 주위에서 살아갈 수 있지만, 그 정치사회적 의미는 0인 존재이기에 그를 죽여 없앤다 해도, 그 행위에 살인이라는 범죄를 씌울 수는 없는 것이다. 호모 사케르는 있지만 없는 자--마치 불법 이주 노동자들이 국법이라는 의무와 권리의 체계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듯이--이고, 생물학적으로 살아있어도 죽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생명이다. 가령 뇌사자의 장기를 합법적으로 적출할 수 있다면, 뇌사자는 인공 호흡기로 생물학적 생명을 유지하고 있더라도, 살아있는 법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범주에서는 제외돼 있어야 한다. 끔찍한 일이지만, 납치된 불가촉 천민들의 장기를 적출해 매매하는 일이 인도에서 종종 일어나고 있다.

 

 

 

 

이 ‘0도의 존재’들은 우리의 정상적인(normal) 정치 사회적 세계가 그 위에 세워진 어떤 끔찍한 기초에 대한 고통스런 성찰로 우리를 이끈다. 칸토르와 괴델이 아름다운 이성적 수학 질서에 일으킨 분란, 또는 창발적 혼란과 비슷한 어떤 것이, 여기서 아주 위협적인 형태로 우리 자신의 "건전한" 정치사회적 상식을 겨눈다. 우리, 이 ‘아름더러운’ 질서의 정규적 일원들을 향해서 ‘너는 저 0도의 사람들과 무슨 관계인가?’라는 물음을 강요한다. 그 물음은 사소하지 않으며, 한가한 것도 아니다. 지젝이 말했듯이, 호모 사케르는 더 이상 사회의 어떤 소외된 집단이나 노숙자처럼 특정한 처지에 있는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법적인 질서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들과 호모 사케르를 구분하는 일은 사람들을 서로 다른 두 부류로 구분하는, 단순히 ‘수평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점차로, 어떻게 ‘동일한’ 사람들이 다른(중첩부과된superimposed) 두 가지 방식으로 다루어질 수 있는가하는 ‘수직적인’ 구분이 되어간다. 요컨대, 법의 차원에서 우리는 합법적인 주체인 시민으로 간주되나, 법의 외설적인 초자아 보충(super-ego supplement)의 차원, 텅 빈 무조건적 법의 시선 아래서는, 우리 모두가 호모 사케르로 취급된다.” (실재의 사막)

 

 

근원적 양극화에 관하여

 

양극화 시대라고한다. 한때 ‘20대 80 사회’라는 표현이 있었지만, 이제는 훨씬 더 과격한 표현이 공감을 얻고 있다. 지금은 ‘1% 대 99%’의 사회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란 이름으로 한 세대를 휩쓴 저 자본주의적 양극화의 격류는 지금이라도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점점 더 악화--‘0.1% 대 99.9%…’--될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자들에게 기부를 유도하거나 세금을 강화하고, 복지 제도를 재정비하고, 비정규직 차별을 철폐하는 등의 조치들을 단행해 다시금 중산층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로 복귀(?)하려는 시도를 하고자 한다. 일단은 다행스런 반작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보다 발본적인(radical) 차원에서 생각해보지 않으면, 같은 문제가 반복될 뿐이며, 언뜻 달라진 듯한 외양 속에서 문제가 보다 심각하게 악화될 수도 있다.

 

 

 

 

나는 ‘20 대 80’이라는 경제적 구분, ‘1% 대 99%’라는 정치적 구호 보다 아래에서 ‘0과 1’, ‘무와 유(有)’, ‘무로 간주되는 어떤 존재들’과 ‘유(有)와 유의 증식으로 여겨지는 어떤 허상들--가령 화폐와 자본이라는 신용체제의 물신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곧 닥칠 선거처럼 시급한 현안에 비해 무척 한가한 짓거리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긴급해 보이는 이슈들 아래에 도사린 거대한 메트릭스를 고려한다면, 그것이 결코 한가할 때 차 한 잔 마시며 사색할 그런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현실적 유(有)들 아래서 또한 위에서 잠재적 무인 0을 발견하는 것, 초월적이고 이행적인 무인 0의 의미를 급진화시키는 것….    

 

 

0의 자리를 점령하라

 

슬라보예 지젝은 지난 해 ‘월스트리트 점령(Occupy Wall-Street)’ 시위대 앞에서 짧은 연설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은 농담을 소개했다.

동독의 한 기술자가 시베리아로 장기 출장을 가게 됐다. 떠나기 전, 공산당의 서신검열을 걱정한 그는 친구와 미리 약속을 해뒀다. ‘파란색 잉크로 쓴 편지 내용은 진실이고 빨간색 잉크로 쓴 것은 거짓이니 믿지 말게.’ 몇 달 후 친구는 편지를 받았다. 파란색 잉크로 쓰여진 것이었다. ‘여긴 정말 좋은 곳이야. 시장엔 식품과 좋은 물건들이 가득하고 극장에선 좋은 서방의 영화를 상연한다네. 아쉽게도, 딱 하나 구할 수 없는 게 있는데, 빨간색 잉크일세.’

지젝이 이 농담에 덧붙인 논평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사는 꼬라지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원하는 모든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있(고 스스로에게도 그렇게 말해 왔)다. 그런데 그 동독 기술자의 파란색 편지에서처럼,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이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천국에 없는 게 딱 하나 있다. 뭘까? 이 체제 자체를 의심할 자유, 이 체제를 벗어나 살 자유--빨간색 잉크다!

그는 ‘월스트리트를 점령하고 있는 당신들, 당신들의 행위들은 우리 모두에게 그 빨간색 잉크를 선물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쩌면, 이제 우리가 고민하고 실천해야할 그 빨간색 잉크--기성의 체제에 붙들리지 않는 ‘사자 같고, 바람 같고, 연꽃 같고, 무소의 뿔 같은’ 자유와 행위--는, 동독 기술자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모든 파란색 문장들을 허위로 만드는, 혹은 무화시키는, “여기에는 빨간색 잉크가 없다네”라는 파란색 문장처럼, 0이라는 기표 아닌 기표로 우리 앞에 내내 놓여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무크지 <CONTURE> 2012 Vol.2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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