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모리스 블랑쇼(요약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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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모리스 블랑쇼

로제 라뽀르뜨


나는 정확히 반세기 동안, 그러니까 싸르트르의 <존재와 무Being and Nothingness>와 바따이유의 <내적 체험Inner Experience>이 출간된 해인 1943년 그의 작품 <헛발Faux pas>이 나온 이후로 죽 블랑쇼를 읽어왔다. 우선 그의 저작 전체의 윤곽을 제시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특히, 이 책에서 다른 필자들이 언급하게될 저널리스틱한 글들은 빼고, 그가 작가로서as a writer 쓴 작품들을 중심으로 말이다. 불랑쇼의 저작은 세 부류로 나눠진다. 비평 작업, 허구the fiction,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떤 장르에도 포함되지 않는 두 권의 책, <저 너머로Le Pas au-dela>와 <재난의 글쓰기The Writing of the Disaster>가 그것으로 두 책은 각각 1973년과 1980년에 출간됐다.1)

비평 작업에 속하는 책은 <헛발>, <불의 몫La Part du feu>, <문학의 공간L’Espace litt?raire>, <미래의 책Le Livre a venir>, <한없는 대화L’Entretien infini> 그리고 <우정L'Amit> 등이다. 이 목록에는 보다 최근에 나온 짤막한 연구서 <고백할 수 없는 공동체unavowable community>와 <내가 상상하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tel que je I'imagine>가 추가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가장 최근에 나온 블랑쇼의 저서는 루이-르네 데 포레(Louis-Ren? des Forets)의 시에 바쳐진 <다른 곳에서 온 목소리Une Voix venue d'ailleurs>로 1992년 10월에 출간되었다.

누가 이 비평 작업들을 몇 마디 말로 뭉뚱그리며 공정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블랑쇼는 말라르메, 카프카, 아르또 그리고 다른 여러 작가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있다. 그러나 말라르메, 카프카, 바따이유, 샤르, 레비나스 그리고 다른 많은 작가들 또한 블랑쇼에게 적지 않은 빚을 지고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덧붙여야만 하겠다. 블랑쇼가 카프카에게 바친 열 편의 연구논문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이 <성The Castle>의 작가를 도대체 어떻게 읽을 것인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우리는 블랑쇼의 주석을 통해서 카프카를 읽고 있기 때문이다. <불의 몫>에는 <휠더린의 “신성한” 말>이라는 제목이 붙은 글이 들어있는데, 거기서 우리가 읽게되는 것은 휠더린이 아니라 블랑쇼 자신이다―-하이데거를 읽은, 휠더린을 읽은, 그리고 그리스인들의 작품을 읽은 블랑쇼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자아중심성egocentricity과도 반대되는 자리에서, 블랑쇼는 휠더린을 향해 돌아서고 또 우리들을 돌려세워 그의 작품에 이르도록 길을 닦아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문학’이 그에 응답하고자 애쓰는 저 먼 것the remote으로부터의 환상적이고 끊임없는 부름, 그 아련한 공명을 이끌어낸다. 블랑쇼는 우리를 그가 다루는 작품들의 동시대인으로 만들어준다. 블랑쇼는 그 작품들이 때로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하고 또 어떤 것은 문학에 다른 것은 철학에 혹은 신비주의에 속하는 등 다른 장르에 있다할지라도, 그 모든 작품들을 모두 꼭 같은 현재의 순간the same present moment 속에서 그려내기 때문이다.

블랑쇼 비평이 보여주는 독특한 성격은 그를 단지 개중 뛰어난 주석가commentator의 한 사람으로 간주하지 못하도록 만드는데, 그의 비평은 모든 글쓰기를 도래할 한 권의 책a book-to-come, 그에 따르면, 오로지 그것의 부재에 의해서만 식별될 수 있다는 그 미래의 책을 향한 글쓰기로 이해함으로써, 작품들을 그것의 바깥outside으로 열어놓아 작품들이 묶여있던 과거와 현재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기본적 형태를 하고 있다.

허구적 작품들은 두 개의 시기, 즉 <또마, 알 수 없는 사람Thomas l'obscur>, <아미나다브Aminadab> 그리고 <저 높은 곳Le Tr?s-haut>과 같은 훌륭한 소설novel/roman의 시기와 그 이후에 나온 <죽음의 선고L'Arret de mort>, <낮의 광기La Folie du jour>, <또마, 알 수 없는 사람Thomas l'obscur>(재판본)2), <원하던 순간에Au Moment voulu>, <나를 따라오지 않았던 자Celui qui ne m'accompagnait pas>, <최후의 인간Le Dernier homme> 등이 거기에 속하는 이야기the recit의 시기로 나뉜다. 두 번째 시기의 마지막 작품인 <기다림 망각L'Attente L'Oubli>은 1962년에 출간되었는데 딱히 이야기로 분류하기도 어렵다. 이후 블랑쇼는 그의 작품의 새롭고 다양한 판본들에서 모든 장르 표기들을 삭제해 오고있다.

블랑쇼는 지난 30년여 년 동안 더 이상 새로운 소설이나 이야기를 출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있을 법하지 않은 정반대의 징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의 허구적 작품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종결되었다concluded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블랑쇼가 허구를 저버린 까닭은 정확히 말해 그것이 더 이상 자신이 추구하는 과제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므로 이런 결별이 지닌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야기가 있던 자리에 대신 들어선 것은 새로운 스타일, 새로운 장르인데 그것은 고작 두 권에 불과하지만 그의 주요 저작으로 꼽아야할 <저 너머로>와 <재난의 글쓰기>에 의해서만 대표될 수 있다. 누군가 이 작품들에 장르 표기를 하라고 우긴다면, 그것을 단장(短章)fragmentary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데, 이 작품들을 읽고있노라면 독일 낭만주의 그리고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테네움the Athenaeum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블랑쇼의 단장 작품들은 슐레겔이나 노발리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문학과 철학을 별개의 것으로 떼어놓거나 어느 하나로 병합하지 않고, 그 둘 너머의 어떤 것을 추구한다. 그것은 매개되지 않은 사유의 경험이다. <저 너머로>와 <재난의 글쓰기>에서, ‘글쓰기’는 그것이 투척한 내기들, 신비들, 일탈들, 심연들과 더불어 벌거벗은 채 그 자신을 말하려고 애쓴다. 블랑쇼는 “(글쓰는 자는) 우주를 부수어야 한다”는 니체의 경구를 문자 그대로의 효과 속에 두고자하나, 블랑쇼에게 파편화된 글쓰기fragmentary writing는 어떤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탈-장소dislocation, 우리가 언젠가 돌아가게 될 그 장소 아닌 장소(장소 바깥의 장소) 체험의 결과이다. 블랑쇼는 오랫동안 글쓰기의 기원, 예술 작품의 기원, 영감inspiration과 영감의 결여가 일치하는 그 지점을 탐색해왔으나 이런 중심의 추구는 그와 반대되는 힘에 의해서 정초되거나 혹은 정지된다. 그리하여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블랑쇼에 따르면, “기원에 대한 사상은, 최초의 중심으로서의 분산(分散)에 대한, 차이에 대한 사상의 신호를 뒤로 남긴 채 스스로를 향해 사라진다… 그 최초의 중심은 모든 통일성이 깨어져버리는 바로 그곳이기에 어떠한 중심도 부재한 그런 중심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비-통일성의 비-중심the non-center of non-unity이다.” 우리가 그것을 이와 같은 말들로 이해하고자 할 때, 블랑쇼의 깨어진 파편들이 그 기원을 찾게되는 곳은 정확히 이 최초의 파열break(brisure) 속에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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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블랑쇼 작품들이 보여주는 주요한 특징들을 묘사하고자 노력해보겠으나, 미진한 부분들을 하나도 남김임 없이 이 작업을 철저하게 완수한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하다. 이 글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는데, 각 부분은 이를테면 신화, 서사narrative 그리고 상징적 인물emblematic figure에 해당한다. 그럼 사이렌의 노래, 사냥꾼 그라쿠스 그리고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순으로 이에 대해 논의해보겠다.

우선 사이렌의 노래, 블랑쇼가 호머의 그것과는 매우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 그 사이렌의 노래에서부터 시작해보도록 하자. “이 작품의 중심점은, 도달할 수 없는 그러나 도달해볼 가치가 있는 유일한 지점인 기원으로서의 작품이다”라고 블랑쇼는 쓰고있다. 그는 또 이렇게 쓰고있기도 하다(훨씬 더 많은 인용을 덧붙일 수도 있으리라). “이 작품은 거기에 몰입하는 사람이 누구든 간에 그 작품이 불가능성이라는 시련을 겪게되는 지점으로 그를 끌어들인다. 그것은 밤의 체험, 진정한 어둠의 체험이다.” 우리는―그리고 누구보다도 블랑쇼 자신은― 이 이상스런 매혹fascination의 희생자가 아닐까? 의심할 나위 없이 그렇다, 허나 블랑쇼의 작품이 매혹과 이어져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만 그것이 기원의 부름the call of the origin에 응답하고 있다, 응답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블랑쇼는 이렇게 쓴다.

사이렌들은 아직 오지 않은(와야할) 단 하나의 노래에 다름 아닌 그 불완전한 노래들을 부르며 노래 부르기가 진정으로 시작될 바로 그 공간으로 배들을 끌어들이곤 했다. 일단 그 장소에 다다랐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이 곳은 어떤 곳인가? 그곳은 오직 사라지는 일만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이 발원의 영역, 이 기원의 영역에서 음악은 세상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도 더 완전하게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마치 음악이 태어난 이 모태의 영역이란 아무런 음악소리도 들리지 않는 공간, 침묵이 노래에 이르는 모든 방법을 불살라버렸던 가뭄과 한발의 땅인 것처럼.

기원에 접근하려는 사람은, 그러므로, 어떠한 시작beginning으로부터도 떨어져있어야 한다. 무한정 연기된, 영원히 미래에 속하는 그 책은 책의 부재에 자리를 내주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나를 따라오지 않았던 자>에서 두 인물 중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이상한 집착을 보이며”, “글을 쓰고 있나요? 당신은 그 순간에 글을 쓰고있나요?”라고 물었을 때, 다른 한 사람은 결코 “네”라고 답할 수 없다. 교묘히 빠져나가는 그 기원이 어떤 경우에도 “난 지금 글을 쓰고있다”는 말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글쓰기’의 목표는 무엇인가? 말라르메가 꿈꾸었던 그 작품, 최고의 걸작the chef d'oeuvre, 대문자로 쓰여진 그 책the BOOK인가? “쓴다는 것은 작품(일, work)의 부재(無爲, worklessness/ desoeuvrement)를 생산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때, 블랑쇼는 이 질문에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글쓰기가 작품을 통하여 그리고 작품을 가로질러 그 자신을 생산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글쓰기는 작품의 부재이다. 이제 블랑쇼가 어째서 “문학은 어쩌면 본질적으로 실망하기 위해 고안된 것인 듯 싶다”라고 말하게 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슬프고 우울한 문장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책이란 글쓰기가 그것에 의해서 책의 부재에 도달하게 되는 하나의 책략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때, 달리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작품을 위해, 기원을 위해 저 절대적인 요구the sovereign demand에 응답하는 자가 될 것인가? “이해 불가능한 고통”에 휘둘리는 "비참하고 가련한 존재“가 그들이다. 블랑쇼는 또 이렇게 쓰기도 한다. ”인간은 작품으로 말한다. 그러나 작품은 인간 속의 말하지 않는 것에게, 이름할 수 없는 것the unnamable과 인간 아닌 것inhuman에게, 진리 없는 것, 정의와 무관한 것 그리고 정당성을 갖지 않는 것에게 목소리를 부여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원의 부름에, 사이렌의 노래에 유혹되도록 내버려두어 몰락ruin에 이르러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명백한 몰락이 아니라, 그렇다, 다만 재난disaster에 이르게 된다. 블랑쇼에게는 진정한 몰락에 대한 향수nostalgia가 있는데, 그가 발자크의 단편소설 <미지의 걸작Chef d'CEuvre inconnu>에 주석을 다는 방식 속에서 그것을 관찰해볼 수 있다. 누구라도 자신의 그림 <도발적인 미녀La Belle Noiseuse>를 불태운 후 자살해버린 프레노페르의 실패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블랑쇼는 프레노페르의 몰락은 철저하지 못하고, 그러므로 몰락이 아니라고 말한다. 문학적으로 볼 때, 블랑쇼가 확실히 옳다. 프레노페르의 걸작을 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두 사람(포르뷔스와 푸생)은 처음에는 그 그림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발자크는 이렇게 쓰고있다, 조금 더 가까이로 이끌려 들어가자,

두 사람은 캔버스의 한 구석에서, 이 색채의 혼돈으로부터 벗은 발의 끄트머리가 떠올라오는 것을 알아보았다…기쁨에 넘친 발, 살아있는 발이었다. 그들은 경탄에 휩싸여, 천천히 파괴되며 사라져 가는 이 파편 앞에 얼어붙은 것처럼 서있었다.

<미지의 걸작>에서 발자크는 미-쟝-아빔mises en abime3)의 효과로 그 자신의 병적 공포phobia를 드러낸다. 그의 광대한 작품들은 무(無) 혹은 거의 무에 가까운 것으로부터 다가온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기쁨에 넘친 발”은 발자크를 안심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블랑쇼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마음에 두고 있다.

<숨은 걸작> 속에서, 독자는 아직도, 한 구석에서 떠올라오는, 그 매혹적인 발의 끄트머리를 볼 수가 있다. 이 기쁨에 넘친 발은 작품이 완성되어지지 못하게 막을 뿐만 아니라, 화가가 그의 텅 빈 캔버스 앞에서 마음의 지고한 평화에 싸여 이렇게 읊조리지 못하도록 한다. “없다, 없어! 마침내 여기에는 아무 것도 없단 말이야At last there is nothing.”(<헛발Faux pas>, Gallimard, 1943. 126쪽.)

그렇다면 왜 거기에는 몰락ruination이 아니라 재난disaster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 왜 블랑쇼는, 혹은 다른 누구라도, “없다! 마침내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일까? 왜냐하면, 이 기원의 장소, 이 모태의 영역에는 음악이 완전히 결여되어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형식의 말speech(une parole), 그러나 비어있는 말, 들리지 않는 웅얼거림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과 같다. 블랑쇼는 이렇게 쓰고있다.

이 말들의 기이함은 어쩌면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는 순간에도 그것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더 나아가, 이 말들 속에서는 마치 깊이가 말을 하는 것 같고 들리지 않는 것들이 들리는 듯 하다…(그러나) 들리지 않는 이 그릇된 말들, 아무 것도 감추고있지 않은 이 비밀의 말들은 말하는 침묵speaking silence에서 자라난 것들이다.

<원하던 순간에>에서 쥬디뜨는 가수 클로디아에게 “당신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한 목소리로 노래했어요” 혹은 “당신은 비어있게blankly(en blanc) 노래 불렀어요”라고 말한다. 이 말들은 가난한 자들을, 카프카의 <가수 요제피네>의 그 장식 없는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 이 공백blank, 이 여린 목소리, 이 말하는 침묵, 그것이야말로 계속 버텨나가는 것what persists, 몰락을 사전에 배제하는 것 그리고 누군가 “없다! 마침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단 말이야”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바로 그것이다. 블랑쇼의 바램은 그의 펜 끝에서 점점 더 자주 흘러나오고 있는, “모든 것은 지워져야만 한다erased(s'effacer), 모든 것은 지워질 것이다”라는 바로 이 공식이 보여주는 것처럼, 책의 부재를 넘어서서, 저 너머beyond로 또 다른 한 발짝을 내딛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없음/무(無)nothing는 불가능하고, 이 공허void는 접근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글쓰기는 어떠한 흔적도 남길 수 없도록 운명 지워져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흔적과 함께 다른 모든 흔적들을 지우게 되며, 무덤 속으로 사라지는 것보다 더 결정적으로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쓰여졌어야만 하고, 또 지워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누군가 다시 그것을 써야할 것이고, 끝없이 쓸 것이고, 이 그침 없는 운동은 책의 부재를 넘어서려는 어떠한 시도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제 사냥꾼 그라쿠스Hunter Gracchus라는 상징적 인물로 돌아가 보자. 먼저 여기에 읽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카프카의 문장 몇 줄이 있다.

"당신은 죽었소?"
“그렇소.” 사냥꾼이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여러 해 전에, 그렇지, 그건 아주아주 오래 전 일임에 틀림없소…내가 영양 한 마리의 뒤를 좇다가 검은 숲the Black Forest의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이후니까. 그 때 이후로 나는 죽어 있소.”
“하지만 당신은 살아있기도 하잖소?” 시장이 말했다.
“어떤 의미에선 그렇지.” 사냥꾼이 말했다, “어떤 의미에선 난 아직 살아있기도 하지요. 내 사자(死者)의 배가 길을 잃어버렸으니. 키를 잘못 틀어버린 탓에…내 사랑스런 고향땅은 흩어져버렸고, 이젠 그게 무엇이었는지조차 말할 수 없군요. 내가 아는 거라고는, 나는 이승에 남아있다는 것 그리고 내 사자의 배는 그때 이후로 줄곧 이승의 물결 위를 떠다니고 있다는 것뿐이지요. 그렇게 해서, 산과 숲들 속에서 사는 것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던 내가 죽은 다음부터는 지상의 온갖 나라들을 떠돌아다니고 있다오.”

그렇다면, 바위에서 떨어져 죽은 그러나 죽은 자들의 왕국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 사냥꾼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키도 사공도 없는 그의 배는 삼도천Acheron을 건너지 못한다. 그의 배는 ‘죽음의 저 밑바닥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며 항해한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사냥꾼 그라쿠스는 고백하지만, 블랑쇼의 독자들, <또마, 알 수 없는 사람>, <죽음의 선고> 그리고 대표적인 이야기인 <최후의 인간>을 읽은 우리들은 알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저열한 사건이 모든 연계들을 끊어버렸으며, 시간의 질서를 흐트려 놓았고, 죽어가는 인간을 ’영원한 인간‘으로 바꾸어놓았으며, 그가 ’죽음의 모서리에 서있기는 하나‘, 그의 나약함 속에 남아있는 그 미약한 힘을 끝내 소진해버리지는 못할 것이므로, 그는 ’무섭도록 부드럽고 연약한‘, ’절대적으로 비참한‘ 상태에 처해있음을 알고 있다. 어떻게 ’가장 맑은 날보다 더 선명하고…아이가 느끼는 그것보다 훨씬 더 끔직한, 이 알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 이 최후의 인간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으랴.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리지도 못한 채, 영원히 도움을 요청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에게 우정을 느끼고 있으므로, 반드시 용기를 내어야만 하며, 그에게 도달하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이 헤아릴 수 없는 나약함으로부터‘, ’우리를 공포로 질식시키는 이 거대한 나약함으로부터‘ 고개를 돌려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바로 본질적인 고독essential solitude이다. 그렇다면, 이 마지막 인간의 영원한 고통이란 무엇이겠는가? ’그는 미래의 결핍 때문에 죽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블랑쇼를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죽음은 끝the end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종결never-ending ending이다.’ 이러한 표현은 역설적이고, 맥락에서 떼어내 읽으면 황당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죽는다는 것의 불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블랑쇼는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다. ‘죽은 자는 죽음을 다시 산다The dead revived dying.’ 이야기들의 어두운 심연에서, 그것은 마치 죽음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고대의 사건’처럼,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처럼, 결코 현재가 됨이 없도록 시간의 이행passage을 잡아 늘여버린 그런 사건처럼 놓여있고, 바로 이것이 왜 죽은 자들이 오로지 무한히 죽음에 다가가기만 할 수 있을 뿐인가 하는 이유이다. 최후의 인간은 병들어 죽어가며 아마도 죽었는지 모른다(이야기의 화자는 말하기를, ‘나는 무엇보다도 그가 죽었으며, 이제 죽어가고 있다고 확신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비록 전보다 조금 더 약해지기는 했으나, ’누군가 말했듯이, 그의 삶이 점점 더 희박해지는 그런 존재가 되어‘, 다시 한번, ’지독히도 불쌍하도록‘ 깊이 병들 때까지, 다시 삶 속으로 돌아온다. 화자는 도무지 화해가 불가능한 가정들을 갖고 논다. 그는 말한다, ’나는 지금, 어쩌면 그는 항상 존재한 것은 아닐 거라고 혹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한 이렇게 묻는다, ’만약 그가 이미 죽었다면, 혹은 내가 그를 그저 침묵에 불과한 것으로, 우리와 더불어 남아있는 이 한없는 고통의 현존을 살아내는 것으로, 우리가 그것과 더불어 영원히 살고, 일하고, 죽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최후의 인간> 제2부에서, ‘무대’는 죽은 자들의 왕국에 놓여져 있는데, 이곳에서 망령들은 불가능하게도 매장될 곳을 찾아 배회하고 있다. 화자는 ‘빛의 무덤’, ‘그가 그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아주 환한 빛’을 환기시키나, 그는 소음은 아닌 그러나 아직 침묵도 아닌 어떤 ‘웅얼거림’에 쫓기고 있기 때문에 결코 영원한 휴식을 찾을 수 없다. ‘이 웅얼거림은 나를 취하게 하고, 거의 미치게 만든다.’ 그는 고요의 순간을 갈구해서는 안 되는가? 침묵은 자라나지 않을 것인가? 두 말할 나위 없이 침묵은 자랄 것이다, 그러나 ‘침묵이 자라나는 만큼, 그것은 웅얼거림으로 변한다.’ 이제 아래 인용하게 될 문장이 이 글의 두 번째 부분 끝맺어줄 것이다. ‘침묵, 그토록 많은 소음을 자아내고 평화와 고요를 끊임없이 파괴하는 그 침묵, 이것이 바로 영원의 심장이라 불리는 그 무시무시한 것인가?’

마지막으로 오르페우스의 신화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말들은 모호하며, 어떤 것도 그것을 선명하게 만들어줄 수가 없다.” 이것은 <죽음의 선고>의 마지막 연들에 대한 조르쥬 바따이유의 선고이다. 블랑쇼가 어렵고, 심오한 모호함을 보여주는 작가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호함이 낮이 밤을 잇고, 어두운 자 또마가 태양의 또마에게 자리를 내어주듯이, 그렇게 순수하고 간단하게 흩어져버릴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 것은 지나친 소박함naivety이거나 실수―-피하기 어려운-―가 아닐까? 모호한 것은 그 자체로 소중히 다뤄져야만 하고, 보호되어져야만 한다. 이것이 블랑쇼 사유의 근본적이고, 의심할 나위 없이 탈(脫)조화적인disconcerting 지점의 하나다. 이제 오르페우스의 신화에 관한 그의 완전히 독창적인 주석을, <문학의 공간> 서문에서 그 스스로가 이 작품의 중심―-틀림없이 달아나 버릴 것이기는 하나-―은 <오르페우스의 시선>이라 명명된 글 속에 있다고 말하며 직접 우리의 관심을 자극하는 그 주석을 따라가 보도록 하자.
 
이 신화에 대한 간편한 해석은 오르페우스가 성급함이라는 잘못을 범했다고, “뒤돌아보지 말라”는 명령을 잊어버렸다고, 에우리디케와 지체 없이 함께 살기를 원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진정한 낮의 본성과 일상의 매력을 보고싶어했다고 말한다. 블랑쇼는 정확히 정반대의 관점을 취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오르페우스는 밤의 어두운 모호함 속에 있는, 먼 곳에 있는, 만질 수 없는 육체와 헤아릴 길 없는 얼굴을 한 에우리디케를 원하고있다. 그는 보일 때가 아니라, 보이지 않을 때 그녀를 보고싶어하며 일상적 삶의 친밀성 속에서가 아니라 모든 친밀성이 배제된 낯설음 속에서 그녀를 보고싶어한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살려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녀 속에서 충만한 그녀의 죽음을 갖고싶어하는 것이다.

블랑쇼는 이런 말도 덧붙인다. ‘그것은 마치 오르페우스가 법에 불복종함으로써, 에우리디케를 바라봄으로써, 다만 작품의 숨은 요구에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작품의 요구와 모호한 것the obscure에 대한 관심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이 존재한다는 뜻은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오르페우스와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고, 모호한 것에 접근할 수 있으며, 모호한 것으로 하여금 다가오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블랑쇼는 쉼 없이 이 문제에 대해 숙고해왔다, 가령, 그는 이렇게 쓴다. ‘어떻게 모호한 것의 베일을 벗길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을 활짝 열린 곳the open으로 데려올 수 있을까? 모호한 것이 그것의 모호성(어두움) 속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그런 모호한 것의 체험이란 어떤 것일까?’ 30년 전에 처음 출간된, <르네 샤르 그리고 중성적인 것the neutral의 사유>라는 제목의 글에서 블랑쇼는 이 문제로 되돌아간다. 이제 아래에서, 항상 중성적인 것 속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하는 용어들인 모호한 것, 미지의 것the unknown에 바쳐진 몇 줄의 글이 보여주는 풍요로움과 투명함을 맛보도록 하자.

(시와 사유를 구성하는) 추구the pursuit는 알려지지 않은 것unknown으로서의 미지의 것the unknown에 관계된다relates. 탈조화적인 표현disconcerting expression은, 그것이 알려지지 않은 것인 한에서, 그 미지의 것에 ‘관여relate’할 것을 제안하기 때문에 전복적인 표현이라고 말해져왔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그 속에서 미지의 것이 표면화되고, 선언되고, 벗겨지게 될 어떤 관계를 가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퍼스펙티브에서인가?―그것을 계속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려는 바로 그 퍼스펙티브다. 그러므로 미지의 것은, 이 관계 속에서, 그것을 계속 덮개 아래 두려는 그 빛 속에서 그 스스로를 벗게될 것이다.

오늘날 이 텍스트를 읽으면, 누구나 하이데거의 철학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블랑쇼에 의해 제기된 가설들은 하이데거 사상의 주요한 관심에 대답하고 있는 그런 것들이 아닐까? 우리는 하이데거가 진리truth, 알레테이아aletheia, 즉 탈은폐성Unverborgehheit에 관한 사색에서 무엇보다도 베일 벗기기unveiling, 비은폐성unconcealment, 탈폐쇄성disclosedness, 투명한 것, 개방된 것the open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중에, 하이데거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명한 단편에 점점 더 큰 중요성을 두었다. ‘Phusis kruptesthai philei' 즉 자연―나타남emergence, 새벽/날 밝음 ―은 숨기기를 좋아한다. 존재는 그것의 토굴 속으로 숨어들기를 좋아한다.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기원>을 쓸 당시의 용어들 사용하자면, 존재는 스스로를 운명지으며destine, 우리가 세계를, 빛을, 베일 벗기도록 운명짓는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존재는 대지the Earth, 그것의 은신처를 향해 되돌아간다. 그저 그럴 듯한 가설로서, 이렇게 말해보면 안 될까? 블랑쇼의 용어로 ’미지의 것‘이 ’그것을 덮어두고 있던 바로 그 빛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덮개를) 벗어버리는‘ 한에 있어서, 존재는 더 이상 세계와 대지 사이의, 투명한 것the clearing과 비-탈폐쇄성non-disclosedness 사이의 투쟁―물론 그로부터 예술작품이 태어나지만―에 의해 갈려지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는 여전히 덮개에 가려져 있으면서도 대낮의 빛 속으로 걸어나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이다.

이제 우리는 블랑쇼 그리고 그 또한 모호한 것에 대해 숙고했던 미셸 샤르에게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샤르의 시가 미지의 것에 바쳐졌다는 사실, 말을 내뱉지도 침묵을 지키지도 않았던, 다만 그 미지의 것 자체를 있는 그대로, 동떨어진 채로, 낯선 것으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우리 앞에 내보였던 그의 시 때문이 아닐까? 미지의 것을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둔 채로 끌어안는다는 것은 그것을 동일자화 하는identify 것을 거절한다는 뜻이며, 그것을 그것의 모호성 속에, 결코 풀려질 수 없는 비밀 속에 둔다는 뜻이다. 우리는 샤르가 모호한 것을 ‘실체적인 결합substantial ally’으로 간주했었던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해 사유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유명한 단편을 경외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다. ‘그 신탁을 델피Delphi에 두신 신께서는 그 뜻을 털어놓으시지도 않고 감추시지도 않는다. 다만 암시sign를 주실 뿐이다.’ 샤르는 미지의 것에 바쳐진 자신의 시 속에서 이 단편을 강력한 은유로, “지시하는 손가락, 그 끝이 부러져버린”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블랑쇼의 작품에 몰입하는 것은 결코 가벼운 선택지가 될 수는 없다. 만약 누군가 적어도 선명함이라는 척도에 의해 가능한 진보를 측정하려고 한다고 했을 때, 50년 동안이나 작품을 읽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블랑쇼의 작품들에는 언제나 책을 펴들었던 첫날 이후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 것만 같은 두려움이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에게서 무엇을 배웠던가? 우리는 그의 작품에 대해 어떤 의견을 내놓을 수가 있는가? 사실 블랑쇼는 그가 하나의 가설로서 제시했던 것을 완성했노라고 넌지시 말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말해보면 안 될까? 하나의 전체로서 바라본 블랑쇼의 작품은 미지의 것을 미지의 것으로 놓아둔 채로 그것의 베일을 벗겨냈다고,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 매혹적인 작품은 그것의 모호함obscurity으로, 그 속에 있자면 투명성이 실제로는 불투명성 그 자체보다 더 불투명하게 보이는 그런 투명한 밤Night으로, 길을 찾을 수 없이 캄캄한 야생의 밤으로, 재난Disaster이라는 저 구원 없는 고독으로 우리를 사로잡았다고, 혹은 아직도 그치지 않는 어떤 웅얼거림을 들을 수 없는가 라고?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될까? 이제 우리는 “그 영원한 바깥Outside의 흐름"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되었다고.


역주)-----------------
1) 영역자는 블랑쇼의 작품들을 영역된 서명(書名)으로 기재하고 있다. 가령 <저 너머로Le Pas au-dela>의 영역본 제목은 <The Step Not Beyond>라고 되어있다. 아마 Pas가 ‘발걸음’과 ‘~아님Not’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갖고있는 점을 살리기 위해서였던 듯 하다. 그러나 우리말로 직역하면 <넘어서지 않는 발걸음>이 되어버려 이중적 의미가 아니라 부정의 뜻을 가지게 된다. 또 <불의 몫La Part du feu>도 <The Work of Fire>로 되어있어, <불의 작품> 혹은 <불의 일(작업)> 등으로 옮길 경우 마치 다른 작품인 것 같은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이런 불필요한 혼선을 피하기 위해, 모든 작품들을 프랑스 원서명으로 기재하고 가급적 직역했다.

 2) <또마, 알 수 없는 사람>의 재판본은 초판본(1941)과 전혀 다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선 작품의 분량이 거의 절반으로 줄었고 문체도 상당히 달라졌다. “거칠게 말해 또마의 탐색이라는 주제는 양판본에 공통되게 남아있지만 초기 <또마, 알 수 없는 사람>의 문체를 무겁게 만들었던 최상급 형용사의 중첩, 메타포의 범람, 낭만적 이미지의 남용 등은 재판본에서는 깨끗이 사라지고 반면에 체계적인 간결함과 순수함이 돋보인다. 재판본이 출간되면서 초판본이 절판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작가는 초기의 극도의 낭만적 만연체로부터 탈출, 변신하려 했던 것 같다. 그 결과 오늘날 초판본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또마, 알 수 없는 사람>은 그 재판본을 의미한다.”(최윤정, <소설의 추상화>, <작가세계>, 1990년 가을호, 497~8쪽.)

3) 이야기 속의 이야기story-within-a-story(액자소설), 그림 속의 그림을 뜻하는 미쟝아빔(Mise-en-abime)은 문자 그대로 풀면 "심연 상 배치setting on abyss"인데, 이는 원래 기사들의 갑옷 위에 수놓은 문장(紋章)이나 옛 문장관들의 의복에 흔히 들어있던 장식무늬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것은 큰 실드shield 속에 작은 실드가 들어가 있는 형태이다. 근현대의 문학, 영화, 드라마 특히 미술에서 자주 쓰이는 문예 용어 혹은 기법이다.


Roger Laporte, translated by Ian Maclachlan, "Maurice Blanchot today"
in Carolyn Bailey Gill ed., Maurice Blanchot: The Demand of Writing (Routledge; 1996)
초역 : 한보희 비교문학 박사과정/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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