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주어를 찾아서-<나꼼수>돌풍의 정치적 무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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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주어를 찾아서
--<나꼼수> 돌풍의 정치적 무의식

2007년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이명박 씨는 선거일을 코앞에 두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적이 있다. BBK 주가조작 사건에 연루돼있다는 의혹을 부인하며, 만약 그게 사실로 밝혀진다면 후보를 사퇴하거나 나중에 대통령이 돼서라도 책임지고 물러나겠다고 공언해온 터였는데, 자신이 BBK를 설립했다고 말한 광운대 강연 동영상이 투표일 직전 언론에 공개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이 후보의 대변인이었던 나경원 의원은 기자들을 모아놓고, 한국현대사에 길이 남을 놀라운 변명을 내놓았다. “(그 동영상에는) BBK를 설립했다는 말만 있지 ‘내가’ 라는 주어가 없다.” 뻔뻔한 거짓말이었다. 뉴스에 보도된 동영상을 보면 이명박 씨는 분명 “저는 요즘 BBK라는 회사를 설립하고…”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부에는 주어가 없다

당장의 매를 피한답시고 얼떨결에 내뱉은 저 “주어가 없다”는 변명이야말로 향후 이명박 정권의 행태와 대한민국의 상태를 요약해주는 문장이라 할 만하다. 취임 초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대폭적 수입개방 결정은 검역주권 상실이라는 문제와 광우병 불안을 자극하여 ‘촛불시위’라는 국민적 반발을 촉발시켰지만, ‘광우병 사태’라 명명된 이 ‘주체(주어) 없는 과정’은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끝난 것인지 아직도 미스터리하다. 이듬해 용산에서 폭력적 재개발에 항의하던 철거민이 경찰의 무리한 진압 과정에서 여섯 명이나 불타죽는 참사가 발생했지만, 정권은 1년이 다 되도록 사건을 방치했다. ‘여기 사람이 있어요’ 라는 비명에 대해 ‘거기에 나는 없어요’ 는 무책임한 응답을 보냈던 셈이다. 다음 해, 백령도 앞바다에서 천안함이 침몰해 장병 46명이 한꺼번에 수장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책임지는 군 장성이나 정치인은 하나도 없었고, 납득할만한 원인규명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파란색 매직으로 ‘1번’이라고 쓰여진 ‘어뢰’가 추정되는 주어(주체)의 잔류물로 제시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주어는 없다’의 또 다른 버전―“주어(북괴)는 지금 여기엔 없다”―에 불과하지 않은가. ‘4대강 살리기’로 이름을 바꾼 대운하사업도 ‘주어 없음’의 예외가 아니다. 물경 24조의 혈세가 투입됐고, 앞으로도 매해 8천억 이상의 유지비가 소모되며, 장차 한반도의 기후까지도 바꾸게 되리라는 이 대공사는 완료됐다는 지금까지도 왜,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된 것인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하며, 누가 어떻게 뒷감당을 할지 역시 아무도 모른다. 국정을 이렇게 운영해도 되는가. 누구 말마따나 ‘동네 구멍가게도 이따위로 하지는 않는다.’ 대한민국은 지난 4년간, 비리 기업이 ‘이중장부’를 만들 듯, ‘이중정부’로 운영돼왔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게 아니고선 4년 내내 계속돼온 이 이상한 대한민국―‘주어(주체) 없는 통치’―을 이해할 길이 묘연하다. 그렇다면 진짜 정부, 사람들이 ‘가카의 정부’라고 부르는 ‘이면(裏面)정부’ 는 도대체 어디에 숨겨져 있는 것일까? 도대체 원하는 게 무엇일까(Che Vuoi)?


나꼼수, 주어를 찾(아주)다


올봄, 라디오 프로그램 하나가 소리 소문 없이 입을 열었다. 이전 같으면 ‘해적방송’이라 불렸음직한 이 팟캐스트(podcast: 스마트폰용 인터넷 라디오방송)는 정치토크쇼라는 형식을 통해, 촛불시위 이후 오래 비어있던 공동체의 언어적-정치적 무의식에 ‘다이렉트’하게 접근해가면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돌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매회 다운로드 횟수가 600만 이상이고, 청취자 신뢰도도 85%에 달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분량까지 합하면 거의 1천만에 육박하는 청취자들이 이 프로그램에 귀를 기울인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게다가 공중파 라디오처럼 그냥 듣고 끝나는 게 아니다. 트위터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나 오프라인 토크 콘서트와 맞물리면서 청취자들이 이 프로그램의 몸통으로 참여하고 있다. 사실 프로그램 자체만 보면, 마포의 싸구려 스튜디오에서 네 명의 논객―각자의 개성과 자질, 기백 등은 출중하다―이 두어 시간 웃고 떠든 내용을 자력으로 편집하고, 자비로 서버에 올려, 무료로 다운로드 받게 하는 게 전부다. 청취자들은 이처럼 빈 데가 많은 소스를 자신의 상상력과 추리력, 기부금과 자원노동으로 채우며 그 성장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 같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셀프 서비스다. 어떤 콘텐츠도 이 ‘소셜 셀프(사회적 자아)’의 동기를 유발하지 못하면 네트워크에서 성공할 수 없다. 돈으로 처바르고, 알바 풀어서는 SNS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얘기다.




불과 반년 만에 이 프로그램--“능력에 따라 참여하고 욕망에 따라 분배받는 무상의 언어-공동체”--의 정치적 영향력은 (무상급식 찬반투표와 시장선거 등에서) 집권여당을 울게 만들고, 조중동과 방송3사의 기를 꺾어 놓을 정도로 커졌다. 이 프로그램의 제목은, 앞서 말한 사정에 따라, 정확히 ‘주어를 찾아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즉 “나는…”으로 시작한다(이 방송의 첫 토크 주제가 ‘BBK 총정리’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주어 없음’이란 신비한 베일 뒤에 있는 자, 저 숨은 “이면정부”의 위용은 어떤 것일까? 의미파악이 불가능한 사물(‘쥐’)이거나 지시대상 없는 순수한 기표인 ‘가카’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베일을 걷어내자 눈앞에 나타난 것은, 경악스럽게도, 동화 속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우스꽝스럽고 적나라한 나체였다. “…꼼수다.” 고작 꼼수! 큰 타자는 없고, 큰 타자의 구멍(주권자의 공백)을 들락거리며 끝없이 자산을 쟁여 모으는 어떤 ‘꼼꼼한’ 생명체의 ‘애잔한’ 생활상이 엿보일 뿐이다. 4천만의 국가쯤은 한낱 ‘수익모델’ 정도로 보시는 가카의 호연지기와 똥폼?품위와 국격 드립?을 잔뜩 잡은 우스꽝스런 인간 군상, 아니 ‘경제 동물들(economic animal)’의 정부. 거기서 우리를 압도하는 것은 인격이나 카리스마가 아니라 몇 천억, 몇 조를 오가는 돈의 액수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게 다 일까? 어쩌면 우리가 ‘주어 없음’의 베일 뒤에서 본 것은 ‘가카’라는 거울에 비친 대한민국의 적나라한 얼굴은 아닐까. ‘후쿠시마 이후’에도 원전을 지어 팔겠다는 나라. ‘용산참사 이후’에도 재개발 이익에 눈이 벌건 국민들이 있고, ‘쌍용차와 한진중공업 이후’에도 기업과 수출만이 살길이니 노동자는 닥치고 죽으라는 정부가 있고, 월스트리트와 두바이가 무너져도 오류는 ‘복지 포퓰리즘’에 있지 ‘금융투기’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언론들이 여전히 목청이 제일 큰 나라. 전국 1등 하라고 수년간 아들을 고문하는 엄마와 성적조작이 들통 날까봐 패닉상태에 빠져 엄마를 살해한 아들과 그렇게 죽이고 죽은 모자(母子)가 시체 썩는 악취 속에 8개월을 함께 보내도록 방치한 아버지가 있고, 누구도 그런 참극이 ‘남의 가족일일 뿐’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나라. 이 지경인데도 그런 끔찍한 기사 옆에 “시장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한미 FTA로 ‘대한민국 성공신화’를 이어가자”는 논설이 태연히 실리는 강심장과 냉혈한들의 나라…. 쥐-이십(G20) 의장국, 아! 대한민국.


알려지지 않은 알려진 것, 무의식


주어(주체)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BBK동영상에는 분명히 발화행위의 주체(이명박이라 불리는 어떤 신체)가 있다. 하지만, 당시 이명박 후보 측의 말 같잖은 변명을 인정해준다면, 거기서 들리는 말들의 발화의 주체(주어인 ‘나’)는 없다. 이명박 씨가 입을 껌뻑거리고, 그 입에서 어떤 말들―“저는 최근에 BBK라는 회사를 설립하고…”―이 나오는 게 우리 귀에 들리는데, 입의 주인과 말의 주체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우리 귀에 들리는 저 말들은 대관절 누구의 것인가? 이명박 씨에게 유령이 붙어서 한 말인가? (내가 입을 열어 말을 시작했는데, 내 귀에 그것이 내 말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어떤 목소리가 하는 말로 들린다고 상상해보라. 그것은 얼마나 기괴한(uncanny) 상황인가?) 사실 이런 상황은 상식선에서 간단히 정리될 수 있다.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는 사기꾼!” 이 한마디면 족하다. 그런데 문제가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고, 왜 이런 장황한 재구성과 분석을 늘어놓아야 하는 딱한 지경에 이르게 됐는가? 그처럼 빤한 사기를 국민 전체가 ‘알지만 모르는’ 척했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알지만 모르는 것―그것은 정신분석학이 ‘무의식’이라 부르는 것이 아닌가.

2003년 3월 도널드 럼스펠드는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의 관계에 대해서 조금은 아마추어 철학자다운 이야기를 했다. “알려진 알려진 것들(known knowns)이 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들이다. 알려진 알려지지 않은 것들(known unknowns)이 있다. 다시 말해서, 알지 못함을 알고 있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알려지지 않은 것들(unknown unknowns)이 있다. 즉 알지 못함을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가 잊지 말고 덧붙여야 하는 것은 결정적인 네 번째 항목이다. “알려지지 않은 알려진 것들unknown knowns”, 즉 알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들. 이는 바로 프로이트적인 무의식이다. 라캉은 이를 “그 자신은 알지 못하는 앎”이라고 말하곤 했다. (지젝, 박대진 외 옮김, 이라크, 19쪽)

말한 사람이 있고, 그가 내뱉은 말이 있는데 그 둘을 결합시켜줄 ‘주어’(누빔점point de capiton의 기능)가 종적을 감춘 이 놀라운 ‘BBK동영상 사건’이 대선이라는 국가적 정치과정을 통해 묵인(?認)되었을 때, 다시 말해 국민들이 나서서 ‘주어’가 사라지도록 ‘세탁’을 해주었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가? ‘대한민국’이라는 상징계에 국민들 자신에 의해 억압되거나 부인되는 거대한 (‘주어 없음’의) 구멍?언어적-정치적 공동체의 트라우마?이 나타나게 된다. 이명박 집권 이후 발생한 모든 미스터리한 사건들은 바로 그 거대한 상징계적 간극(gap)으로부터 쏟아져 나온 것들이며, 그 트라우마적 간극으로의 반복적 회귀이다. 예컨대, 2008년의 촛불시위를 생각해보라. 그것이 안전한 쇠고기를 요구하는 ‘생활정치’형, ‘웰빙요구’형 시위였다면, 어째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우리가 대한민국의 주권자다!”라는 선언이 첫날부터 중심 구호로 나타났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촛불시위대의 구호는 사실 뜬금없는 것이 아니라 심층적 차원에서 정확한 원인과 목표를 갖고 있었다. 시위참여자들은 자신들의 단적인 선언과 시적인 몸짓을 통해, 자신들을 그 자리로 불러 모은 공동체의 거대한 언어적-정치적 구멍(무의식)을 메우거나 전치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2011년의 <나꼼수>가 그 단적인 선언과 시적인 몸짓을, 이번엔 정치적 수다와 소설적 언어로 바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명박 정권과 보수언론은 한국사회의 주요한 위험이 “알려지지 않은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를테면 간첩, 종북, 좌빨, 괴담 등등―이라고 주장하지만 <나꼼수>를 들으며 우리는, 주요한 위험은 오히려 “알려지지 않은 알려진 것들”, 즉 (‘저들’의 비리와 탐욕을 비웃는) 우리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는지조차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인된 믿음들과 가정들이 아닐까 자문해보게 된다. 이 부인된 믿음과 가정들―대한민국 국민들이 그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통제하지 못하는 그 무엇―이야말로 BBK 사건, 4대강 사업, 천안함 사건, 저축은행 비리, 한미 FTA 날치기 등등을 관통하는 숨은 동력이고 원흉이다. 





<나꼼수>의 웃음소리 안의 <나꼼수> 이상의 것


 

세상의 삶은 자주 비극처럼 느껴지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스꽝스러워 보일 때도 많은데 그것은 ‘느낀다’는 것과 달리 ‘생각’이란 것이 사람을 그가 속한 세상과 잠시 떼놓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리’는 사유와 웃음의 조건이다. 내가 <나꼼수>를 들을 때 놀랐던 점은 거기서 다뤄지는 사안들 하나하나가 실은 매우 심각하고 분통터지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진행자들이 이를 풍자의 도마 위에 올려놓고 왁자지껄한 웃음으로 칼질할 줄 안다는 점이었다. 그 웃음소리는 진행자들의 타고난 기질이 아니라 ‘가카’와 ‘그들만의 대한민국’에 대한 숨길 수 없는 ‘거리감’과 ‘경멸’에 뿌리를 둔 것이기 때문에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 향락이 될 수 있다.

헤겔은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은 언제나 두 번 반복된다고 말했고, 마르크스는 거기에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반복된다는 유명한 주석을 달았다. 역사는 왜 그런 식으로 진행되는가? “인류가 자신의 과거와 즐겁게 결별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그렇다면 이 반복은 객관적 사실의 차원이 아니라 주체의 역사적 태도, 주체의 자기-전환이라는 진실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해야 할 것 같다. <나꼼수>라는 이행기 대상(transitive object), 혹은 '대상 a'--‘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무의식)의 자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대한 열광 속에서 대중들은 낡은 대한민국과 국민적 정체성으로부터 빠져나와 새로운 세계로 이행해가는 것 같다. 그것은 공간적 이동이 아니라 주체의 자기-전환 과정이다. <나꼼수>와 천만 애청자들의 웃음소리 안에서 우리가 식별해내야 할 것은 (<나꼼수>가 정치를 팬덤(fandom)화한다거나 새로운 우상이나 되지 않을까 하는 기우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치권력과 기득권층 그리고 저들의 욕망(‘부자들의 나라’의 ‘성공신화’)의 제단에 자신의 삶과 이웃의 몸을 제물로 바쳐온 우리들 자신을 향해 명랑하고 단호한 어조로 “역사적 몰락”을 요구하는 어떤 충동의 목소리이다. 그 소리를 <나꼼수> 풍의 어투로 한번 써보자.
 
“쫄지 마, 씨바! 큰 타자는 없다잖아. 문재인이나 안철수가 중요한 게 아냐, 우리가 기다려온 주어는 너와 나, 우리 자신이라니까. 부(富)는 은행에 쌓고 가난은 민중에 뿌리는 FTA 매트릭스, 노 땡큐! 우리는 이제 ‘자본의 사회주의’라는 현실-이데올로기의 사막을 ‘삶의 공산주의’라는 희망의 실재로 점령(occupy the Real)하련다. 끝!”


<연세대학원신문> 2011년 12월호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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