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the 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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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 이후 혹은 공공성을 좇아서
―시민사회는 국가가 버린 공공성을 되찾아주어야 하는가?


공공성(publicity)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우리는 날마다 공공성의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를 듣고, 여기저기서 무너져 가는 공공성의 영토들을 본다.

우리는 아직 공화국에 살고있는가?

공교육의 위기는 “교실붕괴”라는 섬찟한 용어를 일상화시켰고 공공성의 제도적 보루인 법은, ‘필요하다면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당당하게 대답하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종적을 감추고 있다. 공적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부패를 당당히 ‘관행’이라고 주장하는 나라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그와 같이 대답하고 처신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有錢無罪 無錢有罪(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잡범들의 방어 논리라면 ‘有權無罪 無權有罪(유권무죄 무권유죄)’는 집권에 실패한 고위층의 정치적 알리바이가 되었다. 두 경우 모두 법 대신 다른 것들--돈과 권력--이 대한민국의 지배질서임을 폭로하는데, 그 둘은 모두 불평등한 분배를 본성으로 갖는 것이어서, 사실상 법이라는, "그것 앞에서 만인이 평등한" 보편적 룰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사회에서는 ‘먼저 돈과 권력의 문제를 해결하라, 그러면 자유의 왕국이 열릴 것이다’라는 냉소적 경구가 시대정신의 자리에 올라선다. 윗물이 더러워도 아랫물은 좀 맑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이 교육의 존재이유라면, 공교육의 진정한 위기는 학교가 아이들에게 아무런 긍정적인(positive)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고 시인하는 지점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알튀세르가 이 소식을 들으면 반가워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학교는 더 이상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조차 되지 못하는 것 같다. 네그리 식으로 말해서, 이미 통제사회(society of control)로 이행한 제국의 단계에서 자본은 그런 훈육기관을 공식적으로 운영할 의사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교육의 위기를 우려하는 사람들조차 학교가 과연 필요한가―학원으로 충분하지 않은가?―라는 회의를 숨기고 있다. 공공복지와 공공의료는 이해집단들의 고래싸움 틈바구니에서 재정파탄으로 귀결돼 가는 중이며, 스캔들로 해가 뜨고 음모론으로 달이 지는 정치권을 두고 ‘공공의 이해를 위한 대의정치의 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현직’ 국회의원들뿐이다. 그들마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정치가 사적 이해를 위해 공사(公事)를 구부리는 동안, 방송은 연예인의 사생활로 공기(公器)를 채움으로써 공과 사(public/private)라는 자본주의적 근대의 경계를 가로질러 ‘탈주’하고 있다. 대표적인 공론장인 언론의 부패나 당파적 행위―심지어 사실의 왜곡―조차도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 ‘공공성 상실의 시대’라는 이 엽기드라마는 정부의 공기업 매각이라는 대목에서 절정에 달한다. 정부는, 무엇에 떠밀리기라도 하듯, 공기업을 사유화시키지 못해 안달인데 이는 국가가 공공성의 의무 또는 자기 정당성의 기초로부터 조직적으로 퇴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토록 반대해도 공기업은 사유화되고 해외로 매각된다. 그토록 반대해도 갯벌이 매립되고 간척사업이 계속된다. 그토록 반대해도 반인권적 법률들이 존속된다. 그토록 반대해도 미국의 전투기가 국민들의 혈세를 털어 구입된다. 말하기에 지칠 법하지 않은가? 우리는 국가가 우리의 말을 듣는지 의심스럽고, 우리가 누구인지 회의가 들기 시작한다. 우리는 진정 공화국의 시민인가? 공공성(res publica)을 공화국의 본질이자 정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한마디로 우리는 더 이상 공화국(Republic of Korea)에 살고 있지 않는 것 같다. 도대체 공공성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누가 우리 공화국을 치워버렸나?

근대국가의 가을과 공공성의 퇴락

공적 제도의 전반적 부패, 공공성에 대한 신뢰의 퇴조, 국가의 급작스런 퇴각―-이것이 우리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사실, 다시 말해 미숙한 근대성과 천민자본주의의 병리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 점은 공공성의 지형 전체가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IMF사태”이후의 경험은 이런 저간의 사정들을 몸으로 느끼게 만들어주었다. 우리의 일상을 관통하는 경제적 흐름들은 우리의 이해관계와 동떨어진 곳―IMF, WORLD BANK, W.T.O, 월가의 금융자본, 미국증시 등―에서 결정된다. 그들과 우리 사이의 역관계는 엄청나게 비대칭적이어서, 우리는 그들의 결정에 거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고 그들을 소환하거나 탄핵할 수도 없다. 사실 그들은 우리로부터 대표권을 위임받은 적도 없다. 마치 “운명”처럼 다가오는 이 초국적 자본의 파도 앞에 국가의 경계는 아무런 방패막이가 될 수 없다.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근대 공민의 자부심, 즉 “주권의 약속”은 어느 나라에서나 부도수표가 되고있다. 이제 남한의 부유층은 미국시민권을 따기 위해 대거 원정출산을 시도하거나 아예 이민을 간다. 한편, 제3세계의 불법이민 노동자들이 우리사회의 음지로 편입되어 대규모로 착취당하고 있다. 사회의 상층은 기회주의적 배반이나 이탈을 실행하고 하층은 이질적 정체성을 지닌 집단들로 채워져 간다.

국민, 국토, 주권이 근대국가의 세 가지 요건이라는 건 중학생도 안다. 공민(civilian)이 삶과 자기정체성의 근거를 민족국가에 두지 않고, 즉 스스로를 국민으로 여기지 않고 단지 우연한 거주민처럼 인식할 때, 영토가 조상에게 물려받고 후손에게 물려줄 신성한 장소(place)가 아니라 단지 세금징수가 가능한 지역의 경계표시나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잠정적으로 안전한 공간이란 군사적 의미로만 축소될 때, 주권이 스스로를 실현할 사안들을 상실할 때, 근대국가는 끝난다. 그것은 세금을 걷고 노역을 동원하는 대가로 최소한의 안보와 치안을 보장해주는 기능적 지방권력으로 전락한다. 이는 차라리 중세의 봉건영주와 흡사하다. 바야흐로 근대가 조락(燥落, waning)하고 '포스트모던'이란 이름의 새로운 중세가 시작되고 있는 것인가?

앞서 말했듯이, 공공성이란 하나의 역사적 사회, 근대 공화국의 이념이다. 군주국가에서는 공공성이 필요치 않다. 필요한 것은 군주의 명령과 이에 복종하는 신민의 정신이다. 부족사회에서는 공공성이 필요치 않다. 필요한 것은 혈연적 유대에 대한 확인뿐이다. 오로지 다양한 이해를 가진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과 집단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근대사회만이 공공성이란 이름의 세속종교를 요구한다. 공동체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모든 제도와 가치들을 분쇄해버리는 “악마의 맷돌”, 즉 자본주의적 시장을 떠안고 사는 사회만이 공공성이라는 이름의 속성 아교를 필요로 한다. 달리 말해, 공공성은 사적 영역(private sphere, privacy)으로서의 시장과 형식적 대립하며 실질적으로 공존한다. 이러한 시장과 국가의 변증법이 근대성의 정치경제학의 요체를 이뤄왔다면, 그 변증법의 종결과 더불어 공공성의 역사적 의미도 시효를 상실하게 될 것 같다.


공공성의 찢겨진 베일


진보진영이나 시민운동단체들은 이런 갑작스런 사태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국가, 즉 공권력의 과잉에 의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 기본적인 인식이었는데 국가와의 협상이 가능해진 것처럼 여겨지는 지점에 이르고 보니 이제 국가의 과소가 문제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 되어있는 판국이다. 사회의 운영과 재생산이라는 공은 차근차근 시민사회로 넘어오고 있다. 그런데 시민사회에서 그 공을 받아 찰 준비가 되어있는 곳, 아니 이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곳은 주로 시민사회의 도덕적 영역들이 아니라 경제적 영역들, 즉 시장 참여자들이다. 기업들은 이제 상품이 아니라 사회 자체를 재생산하는데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교육, 교통, 통신, 에너지 등 공공서비스의 사유화, 문화와 가치의 상품화, 신체의 자본화 등등. 그것은 국가 이전의 시민사회, 즉 자기이해의 충동에 따라 계산적으로 움직이는 부르조아적 개인, 집단들의 각축장이다. 시민들은 이제 비판의 시위를 국가라는 명백한 대상―용이한 상대는 물론 아니었다―에서 자기 자신들 내부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되었다. 이는 국가보다 용이한 상대가 아닐뿐더러 전선이 훨씬 더 복잡해지는 대상이기도 하다. 가령 어떤 거대자본에 대한 공격은 고용자와 그들의 가족 그리고 경제전반에 미칠 파장 때문에 예상치도 않았던 다각적인 반격에 처하게 된다. 개별기업 내부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들 사이의 마찰이 협상을 통해 해결될 때, 그 부담이 하청업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 혹은 소비자에게 전가되는 경우도 흔하다. 이런 식으로 투쟁은 시민사회 내부에서의 복잡한 갈등으로 얽혀든다. 시장은 이미 하나의 기구나 제도, 공격하고 교정하거나 제거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삶 전체가 놓여있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시민운동은 시민들의 자기부정을 요구하지 않고서는 혹은 시민운동 자체가 변질되지 않고서는 존속해나가기 어렵다. 공공성은 이제 요구되는 것―위로부터든 위를 향해서든―이 아니라 고통스럽게 만들어가야 하는 것, ‘아래로부터’나 ‘아래를 향해서’가 아니라 내부적 윤리나 외부적 연대를 향해서 수평적으로 전개해가야만 하는 어떤 것이 되었다. 이는 변혁운동에서 시민사회운동으로의 전환이라는 90년대 진보진영의 전략이 맞닥트린, 새롭다기보다는, 근본적인(radical) 방향선택의 국면이 아닐까?


국가 없는 공공성을 상상해야 한다


‘국가 부재의 시민사회’라는 현재의 상황은 ‘시장이냐, 국가냐?’라는 근대초기의 문제―혹은 근대 내내 반복되었던 국가와 시장의 변증법―를 다시 제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질문에 대한 여전히 19세기식 이해이다. 공공성의 위기를 불러온 현 상황은 ‘국가 이후의 시민사회’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상이하다. 초점을 국가에만 맞추면, 문제가 공적 국가의 존재와 부재라는 단순한 사실들만 발견될 뿐이고 동일한 과거의 반복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회 전체의 시야에서 접근해 보면, 국가의 부재가 사회의 재생산에 더 이상 결정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 국가 없이도 국가가 있는 것처럼, 경우에 따라 가장 강력한 국가조차 넘볼 수 없었던 일들―사회의 역동적 안정성―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사회로 우리는 진입중인 듯 하기 때문이다. 사실 8~90년대를 거치면서 케인즈주의 복지국가와 국가사회주의는 싱겁게 막을 내렸고 이를 다시 복구하려는 시도는 현재로서는, ‘일국 사회주의’ 테제로 돌아가자는 구호만큼이나 낡아 보인다. 우리의 일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결정들이 국가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외세가 민족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근세사 전체의 핵심적 명제―이른바 종속성 테제―와는 구별될 필요가 있다. 이미 공공업무에서 조직적으로 퇴각하고 있는 국가권력을 세계시장질서로부터 다시 국민의 편으로 견인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공공성을 일종의 규범적 코드로 착각하는데서 비롯된다. 지배계급이 공공성 없는 국가를 만드는 동안에도 우리는 국가 없는 공공성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낡은 사고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자문해보아야 한다. 공과 사의 구분이 사라지면 자본주의적 근대가 상상했던 공공성은 새로운 공동체성(communality)으로 대치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유토피아의 실현으로의 방향잡기이다.


* <연세대학원신문> 편집장 시절에 쓴 글이다. 거의 10년은 된 글인 듯 하다. 이 글을 쓸 때, 조정환 선생도 같은 기획--"공공성, 위기인가? 급진화인가?"라는 제목의 기획--에 필자로 참여했었던 기억이 난다. 최근 조정환 선생이 <인지 자본주의>라는 책을 냈다. 흥미로운 저작이고, 또한 다급한 여러 현안들--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변동과 혁명적 주체로서의 다중의 기상--을 자신의 사고와 언어로 집약시킨 대작임에 틀림 없지만, 개인적으로 불만이 없지는 않다.

우리가 당시 '새로운 공공성'이라 불렀던 문제는 그 책에서 '인지(cognition)'라는, '생명의 정치경제학 비판', '생명의 자본 비판론'이라 불릴만한 개념으로 다시 쓰여지고 있다('인지'라는 개념 뒤에는 스피노자-들뢰즈의 내재성 철학과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생물학 이론이 놓여있다). '인지'에는 내가 '공공성(公性)의 '차이(差移, Differance)의 a'라고 생각하는 것, 즉 공성(公性)'의 '空'--無, 죽음, 소멸, 타자성의 자리--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그것은 정치와 생명의 문제를 함께 다루는 논변에게는 큰 결함이라 생각된다. 게다가 조 선생이 결론에서 '탈성장'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다중은, 들뢰즈의 리좀과 마찬가지로, 성장하는 생명의 은유이다. 그런 맥락에서 다중과 리좀은 자본 운동과 형식적 동질성을 갖는다. 자본은 추상적 리좀이며, 다중은 인격화된 리좀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탈성장과 탈생장--노화, 소멸, 죽음--이라는 생명의 중요한 특성에 대한 고려가 없이는, 무상의 증여/수수, 갈등/연대, 건네 줌/ 건네 받음이라는 문화적 생명 현상들을 설명할 길이 묘연해진다. 이를테면 우리는 생명을 무상으로 건네 받았고, 무상으로 건네 주어야 한다--그것이 우리가 '삶'이라 부르는 시-공간의 장을 터-닦는 무의식적이고 존재론적 사랑이다. 

유한적 생명체인 우리는 잘 살아야할 뿐만 아니라, 잘 죽어야 한다. 공공성은 '잘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잘 죽어야 한다'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우리의 자연스런 삶의 방식에 대해 공공성이 취하게 되는 본질적 타자성이다. 공공성은 까다롭고 불펴하고 어려운 것이며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자연스러운 방식--좋은 게 좋은 것이며 대세가 이러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논리--에 따라 살 때, 우리는, 생명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 부패한 생명, 오직 자신의 삶의 확대와 연장만을 꾀하는 행태, 그것은 암적(癌的) 생의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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