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의 유령과 프롤레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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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유령과 프롤레타리아

1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유령이…”
―칼 마르크스, 『공산당선언』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공산당 선언』 첫 문장을 끄집어내는 것은 분명 “생뚱맞은” 짓이다. ‘유령이란 단어가 나온다는 우연한 공통점을 빼면, 둘 사이에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질문 아닌 질문 앞에서, 나는 정색을 하고, 다음과 같이 대답 아닌 대답을 내놓고 싶어진다. 오페라의 유령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닌가.


2
Christin: Who was that shape in the shadow? Whose is the face in the mask? (…)
Phantom: Stranger than you dream it―can you even dare to look or bear to think of me.
―Phantom of the Opera, 1막 6장

“뭐, 오페라의 유령이 프롤레타리아라고?” 귀를 의심할 분들의 마음을 다소나마 진정시켜드리기 위해, 얼마 전 SONY사의 이데이 노부유끼 회장이 신제품 발표회장에서 한 말을 한마디 들려드릴까 한다. “이 제품에는 우리의 혼(魂)이 담겨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는 뜻을 일본식 관용어법으로 전달한 것일 테지만, 노부유끼씨의 근엄하고도 진심어린 표정을 봤다면 누구라도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픈 유혹을 느꼈을 것이다. 첨단기술이 동원된 21세기형 신제품을 소개하는 자리에 등장한 이 토테미즘적 발언, 이 원시적 사유구조는 너무나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혼을 가진 물건이라니! 하지만 너무 웃지는 말자. 컴퓨터가 갑자기 다운됐을 때, “야, 너 왜 그래? 이 녀석 또 말썽이네.”라고 말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게다가 당신은 지금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있지 않은가. 그저 까만 글자들이 쭈르륵 찍혀있을 뿐인 이 종이 위에서, 어항 속의 물고기만큼이나 조용한 이 책이라는 물건 속에서….
스피노자의 유명한 표현대로 “책장 속의 개는 짖지 않는다.” 하지만 소통(communication)하는 인간은 누구나 그 종이 위의 “개”가 짖는 소리를 듣는 귀를 갖고 있으며, “개”라는 글자가 빨간 혀를 빼물고 털 많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이제 이 이상한 눈과 귀들의 세계로, 무대 위에서 유령으로 떠도는 어떤 자의 거처, 밤이 그 캄캄한 눈을 감음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하는 신비롭고 무시무시한 지하미로(this labyrinth underground where night is blind)로 내려가 보자. 거기서 우리는 음향(sound)이 아니라 음악(music)을 듣는 귀를 갖고 있기에, 늙은 라울 후작처럼 애상어린 어조로 그저 물건에 불과한 음악상자(musical box)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친구여, 우리 모두가 죽어 사라진 후에도 너는 여전히 노래를 부르고 있겠지…”(프롤로그, 경매장 장면)


 3
Phantom‘s voice: Look at your face in the mirror―I am there inside!
―Phantom of the Opera, 1막 3장

어디가 입구인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이상한 눈과 귀가 붙어있는 우리의 또 다른 몸(our the other body), 우리의 타자의 몸(our the Other's body)이 마치 혼을 가진 듯 살아 움직이는 사물들과 대화를 나누며 섞여 사는 세계, 유령의 지하세계로 들어가는 문은 어디에 있는가? 놀랍게도 거울이, 거울 달린 비밀 문이 아니라, 거울 자체가 바로 그 문이다. 그러니까 거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오페라의 유령>의 환상적인 의상실 장면으로 가보자.




크리스틴은 의상실에 혼자 앉아있다.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막 끝낸 벅찬 밤이다. 의상실 뒷벽에는 커다란 전신거울이 비스듬히 걸려있다(만약 그 거울이 훨씬 더 크다면, 관객들은 거기 비춰진 자신의 얼굴을 발견할 수도 있으리라). 어디선가 굵은 음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무월광의 밤처럼 캄캄한 거울 표면 위로 희끄무레한 물체 하나가 하나 떠오른다. 사나흘 물속에 가라앉았다 떠오른 익사체의 피부처럼 희뿌연 실루엣. 그것은 이내 상아빛 가면에 검은 망토를 두른 남자로 변한다. 거울에서 그 형상을 본 크리스틴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향해, 정확히 말해 객석의 관객들을 향해, 돌아선다. 마치 화장대 거울을 통해 사랑하는 이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놀란 여인처럼 포옹이라도 하려는 듯 크게 팔을 벌린 그녀는 그 형상에게 말을 걸고 노래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크리스틴 앞에 있는 그가, 그녀가 보고 있는 듯한 어떤 인물이, 우리 관객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거울에 그 반영상이 비춰지고 있다면 의당 그 자리에 있어야할 어떤 실체가, 제자리에 없는 것이다. 그녀의 포즈로 미뤄 보건데 거울 바깥, 그녀와 우리(관객) 사이 어디쯤에 있음이 분명함에도 우리의 가련한 육안은 오직 거울 안에서만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문턱,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 서있는 이 기이한 존재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안다(고 착각한다). 유령! 그는 오페라의 유령이다. 하지만 이 손쉬운 답에 이르기 전에, 주어진 답으로 우리 자신을 속이기 전에, 수수께끼를 하나 풀어보도록 하자.

 

 4
Phantom/Christine(duet): the Phantom of the opera is there inside your/my mind….
―Phantom of the Opera, 1막 3장

그는 그림자처럼 붙어있다. 내가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며 병들었을 때 아파한다.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의 내 불쾌한 입냄새, 지저분한 습관, 온갖 너저분한 말들과 가장 은밀한 쾌락조차 그는 기꺼이 감내한다. 나를 인도하는 손이며 나를 지켜주는 보호자(guide and guardian), 교사이자 수호천사인 그는 나를 위해 음모를 꾸미고 경쟁자를 제거하며 살인마저 서슴지 않는 악마이기도 하다. 때로 나는 그에 대한 두려움을 가눌 길이 없다. 허나, 누가 그처럼 내 승리와 영광을 단 한 올의 질시 없이 기뻐하며 내 비참한 고난의 마지막 한 줌까지 함께 괴로워해줄 것인가. 그와 나의 영혼, 그와 나의 목소리는, 빛나는 지상과 어두운 지하 어디에서든 하나로 묶여있어 떼어낼 수가 없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 그것은 당신뿐이라고, 그와 나는 서로에게 고백한다. 그는 누구인가? 부모인가, 아니면 운명의 연인? 힌트를 하나 드리겠다. 나는 그를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고 오직 거울 속에서만 그를 볼 수 있다. 내가 거울을 들여다볼 때면 그는 마치 그 자리에서 영원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내가 그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거울에서 고개를 돌리면, 그 순간 그는 귀신처럼 사라져버린다. 나는 오직 마음속에서만 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답은? 쉽다. 그는 바로 “나”, 우리 각자의 나 자신이다. (다만 그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나가 아니라 내 바깥의 “거울 속의 나”, 나의 “또 다른 나”이다.) 그런데 크리스틴이 유령에게 부르는 노래, 유령이 크리스틴에게 바치는 행위가 모두 이 문제적 관계, 즉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 사이의 관계와 일치한다면? <오페라의 유령> 전체는 이 기묘한 한 쌍, 이 잘못된 동행(our strange duet―1막4장, the wrong companions―2막5장)의 이야기라면…?1)


 5
“노래를 부를 때면 나는 나 자신을 잊어버려요.”

―가스통 르루, 『오페라의 유령』 크리스틴의 편지 중에서…

크리스틴과 유령에게는 서로를 부르는 똑같은 명칭이 하나 있다. 음악 천사(angel of music)가 바로 그것이다. 둘은 바로 이 이름으로 서로를 호명한다(그것은 단지 이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이들이 상대에게 부여한 초월성의 지위이기도하다). 당신이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의 이름이 당신과 똑같다고 한번 상상해보자. 당신이 고백했던 사랑의 말이 상대의 목소리를 통해 고스란히 되돌아온다면, 그때 당신은 어떤 기분일까? 둘은 서로 열렬히 소통하지만 두 사람의 부름과 응답에는, 마치 나르시스와 에코의 대화처럼 지극히 역설적인 면이 있다. 그 사랑의 언어는 상대방을 절대적인 존재―“오직 당신만이…”―로 호명하는 순간에도 자기-지시적이다. 모든 사랑은 결국 나르시시즘이며, 사랑의 환상은 자기애(自己愛)의 상호교환에 불과하다는 냉소적인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 정확히 그 반대다. 그 사랑의 메아리 속에서 혼란에 빠져 허둥대는 것은 (“거울 너머의 나”처럼 나의 언어와 행위를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는) 상대가 아니라 거울 바깥에 그토록 확고하게 서있던 나의 정체성 혹은 자기동일성(identity)이기 때문이다. 거울을 한참 들여다보면 점점 선명해지는 것은 거울 밖의 내가 아니라 거울에 비춰진 나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현실의 나는 유령과 같은 존재로 화하여 그 메아리의 파장 위를 떠돌게 된다. 조금 전에 나는 크리스틴과 유령의 사랑은 현실의 내가 ‘거울 속의 나’와 맺는 어떤 관계일지 모른다고 말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관계가 호수에 비친 자기 이미지 속으로 익사하는 나르시스가 아니라 에코, 사랑하는 이의 말들을 반복하는 가운데 점점 투명하게 자신의 몸뚱이를 비워가다가 마침내 하나의 목소리로 화하는 에코의 몸뚱이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자신이 아니라 상대에게 매혹되어 자신의 육체성을 반향(反響)하는 목소리로 승화시켜가는 이 사랑의 몸짓은, 에코라는 말이 연상시키는 공기의 아름다운 떨림, 즉 음악의 탄생에 가 닿게 된다. 예술 중에서 음악만큼 절대적이고 자기-지시적인 것은 없다. 문학에서는 가장 자기지시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시(詩)가, 회화에서는 어떤 대상의 재현이길 멈춘 추상화가 바로 이 음악성을 담고자 애쓴다(예컨대 칸딘스키). 그러나 좋은 시와 추상화는 나르시시즘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무언가를 가리키지 않는 대신, 자기-지시를 통해, 무언가가 “된다.” 그 무언가는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자기가 아니라 자기 아닌 어떤 것의 절대적인 현존을 담는다. 그러므로 “음악의 천사”는 크리스틴과 유령이 서로를 부르는 이름임과 동시에 바로 자기 자신, 육체적 현실성이 지워진다는 끔찍한 공포 속에서 점점 더 선명해져오는 “또 다른 나”를 부르는 이름이다.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곳에 있는 내 등처럼, 문득문득 그게 나인지 의심스러워질 만큼 낯선 나. 적어도 사랑의 시간들에, 현실의 나를 압도하는 내 바깥의, 거울 속의 나. 그것은 크리스틴에 대한 사랑 속에서 자신의 저주받은 육체를 지워가는 오페라의 유령이고, 혼을 가진 사물들의 세계와 소통하는 통로이며, 우리를 사랑하는 이에게로 떠밀어가는 불가항력적인 힘인가? 게다가 왜 프롤레타리아란 말인가? 이제 우리는 거울에서 가면으로, 음악에서 역사의 무대로 다시 올라가야만 한다.


6
거울 속의 이미지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행위는…인간세계의 존재론적 구조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던 리비도의 역동성을 드러낸다.

―자크 라깡, <주체기능 형성 모형으로서의 거울단계> 중에서

우리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바로 자기애이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비극적 결말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가 바로 이것, 사랑의 진정한 도달 불가능성이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사랑에 도달하고자 하지만 실은 자기만을 사랑할 뿐이며, 고독하게도 이 달콤 씁쓰름한 자기애에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는 세속적 환멸의 지혜는 여기서 정반대로 뒤집혀져야 한다. 우리는 자기에 대한 사랑―완전한 사랑의 이상으로서의 “거울 속의 나”―에 도달하고자 하지만 실은 언제나 타인만을 사랑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실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타인에게 “거울 속의 나”를 투사하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거울 속의 나”가 거울 밖, 현실의 나에게 투사됨으로써 나는 비로소 나를 하나의 온전한 실체로 자각하게 된다. “거울 속의 나”라는 상상적 자기-이미지는 내가 만들어낸 허구적 구성물이 아니라 (거울 밖에 있는) “나”라는 허구적 구성물의 존재론적 중핵(core)이다. 
 우리가 행복한 합일이라는 사랑의 꿈을 실현하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에게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내 마음 속에 있는 “내 바깥 거울 속의 나”에게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거울 속의 나와 악수를 나눌 수 없고, 내 등과 포옹을 할 수도 없듯이, 나는 나에 대한 사랑을 결코 완성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차라리 이 합일 불가능성 자체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사랑을 부르는 다른 이름은 리비도이다. 끊임없는 욕망 속에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이 에너지는 삶의 힘이며 사랑의 힘이다. 이 욕동의 힘, 역동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자연인가? 그러나 동물들을 움직이는 힘과 인간을 인간되게―“인간답게”가 아니라― 움직이게끔 하는 이 힘은 자연이 아니라 사회, 적어도 사회적 자연으로부터 비롯된다. 사회적 자연은 먼저 자연적으로 주어지고 나중에 사회적으로 획득될 때, 비로소 실현된다. 그것은 마치 기억을 창조하는 일, 과거를 찾아 미래로 나가는 일처럼 역설적인 과정이다. 그러므로 리비도적 자아로서의 우리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자신의 등을 찾아 나선 여행자와도 같다. 그것을 항상 떠메고 다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쩌면 이 비유는 그리 쓸만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등은 신체 일부가 아니라 우리가 걸어온 생의 길, 타인의 삶의 앨범 속에 들어있어 우리자신은 결코 볼 수 없는 우리의 얼굴들일 것이므로.


7
Phantom/Christine(duet): Your/my spirit and your/my voice, in one combined
: the Phantom of the opera is there inside your/my mind….

―Phantom of the Opera, 1막 6장

같은 가사를 함께 노래하는 라울과 크리스틴의 이중창(1막 10장, 오페라하우스 지붕 장면)과 언제나 “너/나”로 갈라져있어 불편한 간극을 지워내지 못하는 유령과 크리스틴의 이중창을 비교해보면, 전자가 달콤하지만 왠지 과장된 느낌을 주는 반면, 후자는 거친 표면과 우울한 배면 사이로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울림을 전하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달콤한 거짓―“우리는 이제 하나예요”―과 고통스런 진실―“당신과 나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사이의 대조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달콤한 거짓, 즉 환상으로 기우는 마음을 결코 어떤 이유에서도 비난할 수 없으며, 막을 수도 없을 것이다.
라울과 크리스틴의 사랑은 두 사람의 행복한 합일처럼 보이지만, 실은 두 개의 목소리가 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에 불과하다. 이 우연한 동시성에서, 하나의 노래란 물론 각자의 나르시즘적 환상이다. 말하자면, “이제 우리는 하나예요”라는 노래는 “당신과 나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이 부르는 환상의 노래이다. 두 개의 목소리가 하나의 노래 속에 뒤섞이는 것, 요컨대 절망적인 노력 속에서 진정한 합일의 과정을 실현하는 것은 오히려 유령과 크리스틴의 불행한 사랑에서다. 서로에 대한 무지, 거기서 비롯되는 호기심, 오해와 눈속임, 알몸의 실체와의 끔찍한 대면, 서로에 대한 두려움, 치졸한 질투, 잔혹한 음모, 기회주의적 번민, 처절한 배신, 치사한 애원, 눈물어린 키스, 진심어린 용서와 희생적인 화해, 외면상 고독과 구별되지 않는 구원의 시간 등등 사랑의 모든 장면들을 일련의 드라마로 빚어내는 것은 라울이라는 “현실의 환상”이 아니라 유령이라는 “환상의 실재”인 것이다. 라울의 잘생긴 외모는 사실 가면이며, 유령의 추악한 얼굴이라는 현실을 지우면서 크리스틴에게 다가서는 도구(사물)가 되고 있는 가면이, 또한 그 가면으로 표상되는 음악이 오히려 진정한 삶과 사랑의 얼굴이다. 다시 한번 호수에 비친 나르시스의 잘생긴 얼굴에서 에코의 지워져가는 육체로!
어떤 시인의 말처럼,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이성복,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중에서) 사랑은 우리가 대상에게 마음대로 베풀거나 거두어들이는 어떤 감정이나 행위가 아니다. 사랑이라 불리는 그것은 “너/나”를 갈라놓는 저 비스듬한 빗금(bar), 거울 속의 나와 거울 밖의 나를 갈라놓는 단단한 벽이자 투명한 문으로서의 거울 자체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를 누군가에게로 데려간다. 그리고 우리가 ‘거울 속의 나’를 실현하는 것은 바로 이 타인과의 사랑의 도정 자체에서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사는 것이 아니라 ‘거울 속의 나’의 형상으로 내 앞에 서 있는 타인을 위해, 타인을 향해 살아간다. 유령은 바로 이 “나의/너의, 하나로 묶인” 삶의 시간에 부여된 형상이 아닐까.   


 

8
오페라의 유령은 정말로 존재했다.
오페라의 유령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믿어왔던 것처럼, 예술가들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지거나
감독들의 미신 때문에 생겨난 것이 결코 아니었다. (…)
그렇다. 오페라의 유령은 살이 있고 피가 흐르는, 살아있는 존재였다.
비록 그가 진짜 유령, 혹은 죽은 자의 그림자를 완벽하게 흉내내기는 했지만 말이다.

―가스통 르루, 『오페라의 유령』 중에서

혼을 가진 듯한 물건, 마르크스는 그것을 페티쉬(fetish)라고 불렀다. 물신(物神), 드물게 연물(戀物)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연물(戀物)은, 문자 그대로 풀면, 사랑하는 물건이란 뜻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물건 사이에 사랑하는 사람-물건, 그러니까 사람 모양의 물건인 인형을 놓아보면, 대뜸 피그말리온(Pygmalion)의 신화가 떠오른다. 자기가 만든 조각과 사랑에 빠진 저 유명한 전설속의 예술가 말이다. 피그말리온의 전설은, 그 여인상을 감각적 이미지 전반으로 확장시켜본다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어 돌아온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나 얼마쯤 피그말리온이다. 자기가 만든 이미지와 사랑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 오랫동안 물신주의 비판은 이 환상의 베일을 벗겨내고, 그 가면 뒤에 숨은 진짜 얼굴―자기 자신이라는 실체―을 보여주는 일로 간주돼왔다. 하지만 물신주의 비판은 그처럼 단순한 거짓/진실의 이분법에 의존할 수 없다. 마르크스의 물신주의 비판은 상품 뒤에 숨은 것은 추상적 노동시간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노동자들이여, 상품의 가치의 실체는 바로 당신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다. 왜냐면 추상적 노동시간이란 결코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며, 그 추상적 노동시간의 정치적 주체인 프롤레타리아 또한 실증될 수 있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추상적 노동시간과 마찬가지로 이미 실재하는 것이지만, 언제나 그것이 되고자 애써야할 어떤 것이라는 점에서, 앞서 말한 사랑의 진정한 목표(거울 속의 나)와 같다.) 자본론은 “상품 물신” 속에 들어있는 가치라는 이름의 “혼”의 정체를 밝히는 일에 바쳐진 책이랄 수도 있는데, 거기서 마르크스가 밝혀낸 물신의 비밀은 추상적 노동시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추상적 노동시간의 주인은 물론 프롤레타리아이다. 그러니까 “상품”이라는 베일을 벗겨냈을 때 우리가 만나게 되는 “작품” 속의 유령이 바로 프롤레타리아인 셈이다. 아마 여러분은 내가 “상품”과 “작품”을 제멋대로 혼용하고 있다고 불평할지 모른다. 오페라(opera)라는 말이 원래 공들여 만들어진 것 일반, 즉 “작품”을 뜻하는 라틴어 오푸스(opus)의 복수형이란 점을 상기시키는 것은 이 불평을 해소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상품과 작품의 구분은 매우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라.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나아가 입장료 없이는 단 일분도 감상할 수 없는 오늘날의 모든 공연예술들은, “상품”인가 “작품”인가? 진정한 예술을 선사하고 싶으나 흥행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는 작가와 제작자에게, 또 극장 문을 나서며 자신이 체험한 감동의 질과 자기가 지불한 비용의 양을 은밀히 저울질해보는 관객에게, 이 질문은 실로 트라우마적이지 않은가? 상품과 작품 사이, 바로 그리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이라 불리는 모든 물건들의 운명이 흐르고 있지 않은가? 바로 이 불쾌한 질문, 심연과도 같은 경계선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무언가를 부인하고 망각해야만 한다. 무엇을?


9
Phantom: I am the mask you wear….

―Phantom of the Opera, 1막 4장

바로 노동과 노동의 시간들이다. 그리고 살이 있고 피가 흐르는 살아있는 존재(생명)로서의 노동시간이란 시계가 아니라 우리 몸을 흐르는 시간, 한마디로 삶이다. 삶은 또한 좋건 싫건 내게 주어진 것이란 점에서 또 내가 누군가에게 그것들을 그냥 주지 않고는 흐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선물받은 시간이며, 나의 삶을 타인에게 데려가는 사랑의 시간이라는 점에서 선물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타자에게 나를 합일시키는 달콤한 파시즘―이 말은 “여러 개의 나뭇가지를 하나로 묶는다”는 뜻의 fascio에서 나왔다―의 환상이 아니라 “거울 속의 나”가 현실의 나를 타인에게로 이끄는 구체적 삶의 여정 그 자체이다. 우리는 소멸해가지만 그 소멸이 바로 “또 다른 나”의 삶을 매순간 영원한 구원으로 승화시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때, 바로 우리가 걸어온 타자와의 사랑의 길 위에서 우리는 누구나 (계약과 교환의 주체인 부르주아가 아니라 노동의 주체인) 프롤레타리아이며, 유령은 바로 그처럼 흔들리며 나아가는 삶의 형상이다. 그것은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자아라는 현실성의 허깨비보다 더 진실하고 인간적인 허깨비, 즉 가면의 현실성이기도 하다. 유령의 사랑과 분노가 깊은 공감이 울려주는 까닭은 그가 반으로 쪼개진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초라한 현실을 가리는 환상의 가면이 아니라, 환상적 현실을 가리는 진실로서의 가면이다. 그런데 그것은 왜 가면이어야 할까?
『공산당선언』은 파리에서 부르주아와 손잡은 노동자들의 봉기가 입헌군주제를 무너뜨린 1848년 혁명의 해에 간행되었다. 『마르크스 평전』의 저자 프랜시스 윈은 이 저작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아이러니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공산당선언』은 인간 역사상 가장 널리 읽힌 정치 팸플릿일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오해하기 쉬운 제목도 없다. 그런 당은 당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정치 무대를 뒤흔들고 있었음에도 아직 존재하지도 않던 당을 위한 선언. 프롤레타리아는 바로 그렇게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한다. 마르크스가 정확히 표현하고 있듯이, 하나의 유령으로서! 그러나 그 유령이 유럽의 정치무대에서 하나의 분명한 실체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던 봉기는 프롤레타리아를 배반한 반동적 부르주아들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됐고 무려 2만명이 학살당한 1871년 파리꼼뮨을 정점으로 급격하게 지하로 숨어들어갔다. <오페라의 유령>의 배경이 된 19세기 중엽 오페라와 예술은 아직도 피가 마르지 않은 프롤레타리아의 시체들 위에서 춤추고 노래할 수밖에 없었다. 가스통 르루의 소설에는 유령의 거처로 내려가는 길이 “한때 코뮤니스트들의 비밀통로로 쓰였던 곳”이라고 쓰여 있다. 낡은 예술은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시체들의 악취를 견뎌낼 수 없었고, 자신의 위선을 고발하는 유령들의 악몽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페라의 유령은 시종일관 회상으로 이루어져있으며 현재로 회귀하지 않고 과거형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멜랑콜리에 사로잡혀있다. 오페라의 좋았던 옛시절은 돌아오지 않는다. 음악과 춤, 미술이 드라마라는 서사적 뼈대 위에 살과 옷을 입히는 공연예술의 왕좌는 이제 뮤지컬로 대체되었다. 어떤 면에서,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오페라의 유령이란 19세기 오페라의 태내에서 자라고 있던, 그러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음악과 무대를 선보이는 미래의 예술로서의 뮤지컬을 뜻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이것이 웨버가 <뮤지컬의 유령>이 아니라 <오페라의 유령>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인 것 같다. “타인을 향해 나아감”, 즉 사랑의 길로서의 유령. 그것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쨌든 현실로부터의 돌아섬, 시간을 거스르는 회상, ‘거울 속의 나’를 향해 현실에서 거울 쪽으로 돌아서는 역설적 반전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삶을 배신해야 삶에 복무할 수 있는 예술의 비극적 운명이다.  
우리 각자의 “거울 속의 나”는 현실의 개별적 우리의 소유물이나 부속품이 아니다. 그것은 천개의 강 위에 자신을 아로새기는 하늘의 하나의 달이 아니라 천 개의 강 위에 떠있는 천 개의 달(月印千江)이다. 그러나 이 천 개의 달은 모두 달이라는 점에서 하나다. 그것은 저 하늘 위에 떠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기 때문에 붙들 수 없는 달, 마음이라는 강물 위에 떠있는 그리움의 달이다.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지배체제는 자신의 태내에 그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미래를 가진 계급을 잉태하고 있다고 말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의 유령이며, 문화상품들 속에 들어있는 숨은 영혼으로서의 예술작품이다. 그리고 그 혼을 불러오는 푸닥거리를 우리는 간단히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초혼(招魂)의, 혁명의 푸닥거리는 우리가 “거울 속의 나”라는 타자로 하여금 현실이라는 환영을 지우며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다른 나”의 길을 걷게 할 때, 그리고 오직 그 길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순수하게 직접 체험되는 삶은 유령의 노래처럼, 항상 불회귀점(point of no return)을 통과하는 삶일 수밖에 없다. 흔히, “진정한 생은 오직 현재를 살뿐”이라고 말할 때의 그 카이로스의 시간 말이다. 그것은 또한 왜 마르크스가 이 노동시간, 이 타자를 향한 삶을 “추상적”이라고 불러야했는지 가르쳐준다. 추상적 노동시간,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유령적 삶이며 모든 공들인 노동의 산물, 즉 오페라에 내재한 영혼의 실체이기도 하다. 

(*2006년 가을. <더 뮤지컬>에 "오페라의 유령과 예술의 대중"이란 제목으로 기고했던 글의 초안이다. 기고문은 분량 상 대폭 수정될 수밖에 없었고 프롤레타리아에 관한 대목들이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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