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용산에서 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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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용산에서 울다

―‘마르크스 패키지’와 ‘용산 망루전’ 사이에서



겨울은 갔다. 허나 아직 봄은 아니다.
봄 같지 않은 봄(春來不似春)―환절(換節), 또는 문턱(threshold)의 시간을 우리는 살고 있다.
겨울에서 봄으로의 환절기는 흔히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희망을 상징하며
그 자연적 형상은 잎이 돋아나기도 전에 피는 봄나무의 꽃들이다.
꽃은 그처럼 하나의 신호(sign)로 피어나며
신호는 그것을 살아내는 힘(생명)과 만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몸짓이 된다.
최근 우리는 ‘마르크스의 귀환’이라는 하나의 신호를 접하고 있다.
그것이 어떤 생명을 얻게 될 역사의 신호인지 아는 사람은 아직 없지만 말이다.


마르크스의 귀환


‘마르크스가 돌아오고 있다’는 풍문은 여기저기서 전해져 온다.
독일에선 <자본론> 판매량이 세배로 뛰었고,
일본에선 지난해 <게공선>(1929년)이란 계급주의 소설이 뜬금없이 수 십 만부나 팔려나갔다.
한국에서도 <자본론>이 재출간됐고 새로 쓰여진 해설서들도 덩달아 호응을 얻어가는 중이라고 한다.
‘페스티벌 봄(BO:M)’이 제3회 국제다원예술축제(3.27~4.12)로 기획한
<마르크스 패키지>
도 이런 ‘마르크스 귀환’의 한 고리를 이룬다.
패키지에는 세 개의 작품―한편의 연극과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이 묶여있는데,
독일극단 ‘리미니 프로토콜’의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과
뉴저먼 시네마의 대부 알렉산더 클루게의 <이념적 고물로부터의 뉴스: 마르크스-에이젠슈타인-자본론>
그리고 니콜라스 게이어홀터의 <일용할 양식>이 그것이다.
세 작품에 대한 분석은 이 글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힘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실재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마르크스의 귀환은 멜랑콜리나 회상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경제적 문제에 대한 실천적 응답(response)이자 책임(responsibility)의 실천인 것이다.






라깡의 실재(the Real)란 우선 상징세계의 균열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라는 낡은 의상을 다시 꺼내들게 만드는 상징세계 현재적 균열이란 무엇일까?
하도 엄청난 붕괴음을 수반한 것이어서 아직 그 균열의 소식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줄 안다.
그 하나는 월스트리트의 붕괴, 즉 신자유주의라는 세계금융질서의 파탄이고
(<자본론>과 <공산당선언>의 저자가 진지하게 재호출되는 까닭이 달리 무엇이겠는가),
다른 하나는 지난 1월 용산 재개발 현장에서 정권이 철거민들을 살인 진압한 사건이다.
전자가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경제 질서의 위기라면
후자는 민주주의 국가 질서의 결정적 파산을 가리키고 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동시에 또한 국내적으로뿐만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이전에도 간간이 있어왔던 ‘마르크스에 대한 회상’과
현재의 ‘마르크스의 귀환’을 차별 짓는 배경이다.


세계의 상처와 예술의 응답


상징세계가 기존의 지배질서를 뜻하는 것이라면,
사회적 상징세계의 붕괴란 시민적 삶 전반에 혼란과 고통,
불안과 파편화를 가져오는 일련의 불행들을 뜻하므로 아무도 이런 파국적 상황을 반길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위기를 ‘하나의 (세계에 대한 재인식과 재구성의) 기회’로 받아들여야 하는 까닭은
현재의 혼란과 고통들이 오랫동안 이 체제에 의해 고통 받던 자들에겐 일상이고 상례였기 때문이며
이제 대다수가 그러한 고통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데 있다.
이 예외적 비상상태(state of exception)에서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다는 얘기다.



   

신자유주의의 파산과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두 사건의 전조는 작년 봄 촛불시위였다.
(한미FTA와 연결된) 광우병 위험 쇠고기에 대한 무분별한 시장개방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폭력적 전개가 낳은 산물이고
촛불시위는 이러한 인간-생명-공동체의 위기에 맞선 대중들의 저항이었으니까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촛불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점점 더 거세게 타오르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겨울에서 봄으로의 환절기에 예고 없이 깨어지는 얼음판처럼 곳곳에서 균열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상징계의 틈새들에서 일어나는 저항들 사이의 연대와 소통이다.
이때 촛불이 욕망하는 소통(communication)이란 국민과 정권 사이의 원활한 소통이 아니다.
촛불이 지향하는 소통은 대중과 대중 사이의 소통,
부르주아적 환상에 포획된 ‘국민’과 그러한 체제적 자기정체성 아래 억눌린 채 고통 받는
‘헐벗은 생명(bare life)’ 사이의 주체 내적 소통, 즉 ‘꼬뮨-하기’(communization)이다.
권력은 언제나 그러한 소통을 틀 지우고 가로막는 장벽에 지나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 스스로가 자신을 컨테이너 장벽(‘명박산성’)으로 제시했을 때 이 점이 분명해졌다.
용산참사는 우리가 그 장벽을 서둘러 철거하지 않을 때,
그 컨테이너 하나하나가 우리의 삶터를 부수고 생명을 불태우는 무기로 쓰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촛불의 소통은 권력이라는 장벽의 철거이고
권력과 자본이 그어놓은 질서-명령(order)의 선들에 대한 과감한 위반을 함축한다
.
바로 여기에 예술의 과제가 놓여있다.
예술이란 서로 떨어진 주체들 사이에서 공통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
쉽게 말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기예가 아닌가.
 

예술과 정치의 동근원성


인사동 평화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망루전(亡淚展, 3.11~4.28)은
용산참사를 잊지 않으려는 예술가들의 집합적 몸짓이며
용산의 불꽃을 다른 저항의 불꽃으로 잇고자 하는 정치적 몸짓이다.
상징계의 균열로서의 실재-―사회적 신체의 찢기고 깨어진 상처의 자리―-는
그처럼 정치와 예술의 동근원성을 입증한다.
바로 이 상처의 자리에 오늘날 우리 모두의 생이 놓여 있다.
우리-거기-살아-있다, 즉 공동체(우리)는 ‘거기(da)’와 ‘있다(sein)’ 사이의 ‘삶-생명’(life)이다.
용산참사에 관한 예술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반응인 일련의 전시와 공연들은,
그래서 ‘여기 사람이 있다’라는 슬로건으로, 문턱과 경계 위에서의 생명 선언으로 표현된다. 




 


마르크스의 회귀는 <자본론>이라는 텍스트의 현실성과
마르크스라는 19세기 사상가의 현재성을 입증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마르크스라는 이름 아래 한번 나타났던 어떤 힘의 현존을 (재)확인하고
그 부활을 겨냥한다.
그 힘이란, 말할 것도 없이,
자본주의와 화폐적 교환의 상징세계 안에 유령으로 떠도는 ‘코뮨(commune)’이다.

그러한 힘의 생동이 어째서 ‘코뮨주의’라는 당파적 경향을 띠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여기서 다룰 수는 없다.
대신에 나는 공황에 시달리던 독일경제의 상황을 보며
발터 벤야민―-정치를 감성화 하는 파시즘에
감성의 정치화로 맞서고자 했던-―이 썼던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가난이 거대한 그림자처럼 자신이 속한 민족과 자기 집 위를 뒤덮어버린다면
아무도 그러한 가난과는 결코 화해하려들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는 오감을 그에게 가해지는 모든 굴욕에 항상 깨어있도록 해야 하고,
고통이 원한의 급격한 내리막길이 아니라 반역의 오르막길을 개척할 수 있을 때까지
오감을 엄격하게 단련해야 한다.” (<일방통행로> 45쪽)

감각의 기예인 예술이 나눔의 기예인 정치적 활동과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는 삶을 속박하는 어두운 힘들에 대항했던 마르크스의 인식과 저항의 선언을
실천적으로 재생시킬 수 있을 것이며,
그때에 이르러서야 우리 모두의 공통된 이름이 울려 퍼지는 역사의 봄날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환절의 시간이 묵시(apocalypse)의 광기가 아니라 희망의 몸짓으로 피기까지,
우리는 황지우의 시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가 일러주듯,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연세대학원신문> 2009년 4월호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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