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하는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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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라는 선물, 혹은
선물하는 공동체를 향하여


―지배와 소유를 가로지르는 선물의 문제는 공동체의 근원적 형상에 대한 탐색과 실천



'선물'은 쉬운 말이다. 어린애들도 그 뜻쯤은 안다(실은 아이들만이 그 참뜻을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선물 주고받는 것은 흔히 보고 흔히 듣고 다반사로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선물 받은 것 하나쯤 몸에 지니지 않은 사람은 없다. (어쩌면 우리의 몸 자체가 하나의 선물은 아닐까?)
물론, 선물이 쉽고 흔하다고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공기나 물이나 밥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선물'이란 게 학문적 테마까지야 될 수 있겠나 싶다. 그래봐야 고작 '선물'인 것을….
두말할 나위 없이, 틀린 생각이다.
언제나 그러했고, 요즘 더더욱 그러하듯이, 가장 깊은 학문의 주제는 공기, 물, 밥 그리고 몸들이다.
의당 그러해야 한다. 가장 다급하고 치열하면서도 심오한 세계의 문제가 바로 거기에 있는 때문이며,
가장 진지한 삶의 문제가 바로 그러한 것들에 뿌리를 대고 있는 까닭이다.
아니, 삶의 문제가 아니라 삶이라고 고쳐 말하자. 말하자면, 선물은 가장 진지한 삶의 문제들 중 하나인 것이 아니라,
공기와 물, 밥과 몸처럼 가장 깊은 삶 그 자체이다.
이제 우리가 하려는 말들은 우선 여기서 출발하고, 어쩌면, 마침내 여기로 돌아오게 되리라.
"선물, 그것은 가장 깊은 삶이다!"

선물은 왜 가장 깊은 삶인가


선물 속에서 인간의 삶, 문자 그대로 "사람 사이"(人-間)에서 더불어 삶"의 깊은 심연을 보게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더불어 삶"의 "더불어"는 "함께 있음", 무언가를 "함께 함"을 뜻한다.
"함께(cum)"는 이미 둘 이상의 서로 구별되는 동일자를 전제한다.
개별적인 동일자들이 자신의 동일성을 넘어서 타자에게로 개방되고 사회적인 것으로 나아가게 될 때,
이 모래알을 찰흙으로 뭉치게 하는 마법의 요체는 단순히 "함께 있음"(공동존재, mitsein)이라기보다
"함께 함이 있음"(공동 실천) 혹은 "함께 나누어 함, 함께 나누어 가짐"(分有, partage)이다.
여기서 존재는 운동 혹은 실천과 구분되지 않으며 거기에는 이미 존재자성을 넘어서는 존재,
존재 너머의 존재가 있다(그런 게 아니라면 운동은 어찌 운동일 수 있겠는가).
기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언제나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고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
사람과 사람 아닌 것들 사이에서도 언제나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다.
있다는 것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그것은 우선 '시간'이라는 것과 그것의 존재방식에 의해서 증명된다).
그래서 하이데거와 레비나스는 존재(Sein)를 동사형이나 술어의 차원(Es gibt/ I’l ya)으로 표현하고 싶어했다.
존재의 사건성(Ereignis)을 강조하는 하이데거의 'Es gibt'(그것이 준다)에 잘 드러나듯이,
선물은 이 동사형의 존재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 "함께 함"이라는 문제와 더불어 선물의 존재는 철학적, 사변적 영역을 성큼 넘어서 버린다.


타자와의 교통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이러한 움직임을 "교통(Verkehr)"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 말에는 물류의 운송과 교통, 사회적 교제 그리고 경제적 거래라는 뜻이 모두 들어있는데, 맑스는 한발 더 나아가,
언어적 소통(communication)을 여기에 연결시킨다. 유물론자 맑스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는 "순수(reines)" 의식이란 없으며, 그것은 언제나­-이미(always-already)
물질적 의식이고 관계 속의 의식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신은 애초부터 물질에 붙들려있다는 저주스런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바,
여기서 물질은 운동하는 공기층, 음성, 요컨대 언어라는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언어는 의식만큼 오래됐다―언어는 실천적인 것,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그에 따라 비로소 나 자신을 위해서도 존재하는 현실적 의식이며, 의식과 마찬가지로 욕구에서,
또 다른 인간과 교통하고자 하는 절박한 필요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초고에서는 삭제된 다음과 같은 문구에 주목하자.
"내 주위에 대한 나의 관계가 바로 나의 의식이다."(『독일이데올로기』)
이처럼 노동, 생산을 비롯한 경제적 거래(교환), 사회적 교제 그리고 언어적, 정신적 활동(의식)의 가장 밑바닥에
타자와의 교통이 동사형의 존재로서 전제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거기에 잠정적으로 "선물"이라는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면,
이제 선물은 역사적 사회의 (불)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핵심적 물음으로,
공동체의 존재방식에 대한 윤리적-­정치적 물음으로 승격된다.


사회의 (불)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선물­: 지배의 문제


마샬 살린즈는 현명하게도 선물 논의를 사회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라는 홉스의 논의에 연결시키고 있다.
그는 『석기시대 경제』에서 모스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홉스의 명제를
"만인 사이의 만물의 교환exchange everything between everybody"으로 대체했다
는데
『증여론』의 정치 사회학적 의의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 지적은 모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그의 숙부 에밀 뒤르케임의 중요한 선언을 숙고하는데도 대단히 의미 깊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뒤르케임은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에서 사회의 가장 심층에서 울려나오고 있는 목소리를 "살기 위하여!"라는 명법(命法)으로 요약했었다
(나는 여기서 “또 다른 사람과 교통하고자 하는 절박한 필요”라는 맑스의 언명이 반향되는 것을 듣는다).
"살기 위해서 사회는 충분한 도덕적 동조가 필요할 뿐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되는 최소한의 논리적 동조도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이성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고 이성의 제안들을 수락하도록 하는
매우 특수한 권위의 근원인 것 같다."

뒤르케임의 이 언명을 사회가 항구적인 전쟁상태, 즉 그것의 불가능성에서 벗어나 안전과 평화라는 가능성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나를 넘어서는 것, 우리보다 우월한 어떤 것(즉, 초월적 타자)에 대한 복종, 자유의 양도가 불가피하다는
『리바이어던』의 또 다른 변주로 이해하기란 쉽다.
그러나 뒤르케임은 사회를 국가와 동일시하지 않았으며, 양도된 권력에 기반한 지배의 체계로 보지도 않았다.
 






토템이라는 한갓 사물이 제의를 통해 어떻게 숭배의 대상, 살아있는 힘이 되는가를 분석하면서 뒤르케임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 보이지 않는 실재성, 부분들의 합 이상의 무엇임과 동시에
"공동의 실천 가운데서만" 현상하는 힘,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분명하게 체험되는 힘이라는 점이었다.
그것이 종교의 가능성이다. 이런 생각은 홉스의 문제의식을 미묘하게 변화시킨다.
주목해야할 것은 "초월적 중심의 불가피성"이라는 홉스의 문제의식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그러한 중심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공동실천, 다시 말해 "초월적 중심의 (행위) 내재성"이라는 바로 이 차이이다.
즉 "살기 위하여"는 저 위에서 들려오는 초월적 권력의 위협―"죽지 않기 위하여, 혹은 살고 싶거든"이라는 위협적 명령이 아니라,
"더불어 살기 위하여"라는 아래로부터의 요청으로, 연대성의 실천적 존재론으로 고쳐 읽는 일이다.
내재적 초월성, 혹은 외심성(外心性, extimate)이라는 사회적 존재의 역설

모스의 선물-교환(gift-exchange)이라는 주제에서도 이어진다.
 
사실 모스는 '선물-교환' 속에 들어있는 권력의 작동, 지배의 계기들을 간과하고 있지 않다. 모스는 독일어 "Gift"는
"선물"이라는 뜻과 함께 "독(毒)"이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선물을 받는 것이 예속의 계기가 되기도 하며, 포틀래치에 나타나는 선물의 무상증여와 분배는
사회적 지위의 보존과 권위의 생성이라는 보상을 얻게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선물증여는 위세를 과시하며 권위와 (비대칭적으로) 교환된다.
나아가 모든 선물은 이러저러한 보답을 통해 사실상 교환의 질서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선물이 위장된 경제적 교환이라면,
이때 경제는 이미 물질의 교환이 아니라 상징적 교환의 차원에서만 올바르게 이해된다(보드리야르).
혹은 공리주의적 이해타산의 제한경제가 아니라 그러한 계산을 넘어서 작동하는 일반경제의 차원에서만 납득될 수 있다(바따이유).
증여가 언젠가 더 큰 부와 명예, 지위의 형태로 회수될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이익추구의 전략적 행위라면,
이러한 전략은 합리적이 아닐뿐더러, 고정된 주체의 의도로 환원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게 된다.
왜냐면 이 증여의 모험은 당장 일어나는 명백한 상실과 미래의 불확정적인 이익 사이에
시간, 보다 정확히 말해 주관적 기대를 실현시켜줄
보이지 않는 힘―이 힘은 타자에 귀속된다―으로 채색된 시간의 개입을 전제함으로써
주체의 동일성을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체가 있다면 그것은 증여자나 수수자가 아니라 선물이라는 기이한 물건(매개체),
아니 그 물건에 스며있는 사회적 관계의 망(網) 자체일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레비-스트로스가 『증여론』에서 읽어낸 "구조주의자 모스"의 얼굴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교통의 방식, 즉 사회 구성체의 역사를 착취 혹은 소유양식의 문제로 보았던 맑스를 떠올려야 한다.
순수한 교환이나 순수한 선물이란 것은 없다.
그것 주위에 대한 그것의 관계가 바로 선물인지 아닌지 여부를 결정한다.

선물과 교환 뒤에 숨은, 소유의 문제


데리다는 『주어진 시간1: 위조화폐』의 제사(Epigraph)에서 "태양왕" 루이 14세의 정부였던
마담 맹트농의 편지에 들어있는 "시간을 준다"는 표현을 문제 삼는다.
"어떻게 시간을 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다만 시간의 와중에 있는 것들, 그 시간 동안에 벌어진 일들을 준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시간 그 자체는 누군가―설령 그게 왕일지라도―취할 수도, 누군가에게 귀속될 수도 없는 것인 만큼,
그 자체로는, 줄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대목은 모스가 『증여론』에서 소개한 폴리네시아 원주민의 "하우(hau)"에 관한 언급을 떠올리게 한다.
증여하거나 증여 받은 선물의 영혼인 "하우"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하우의 증여/수증자는
소유자가 아니라 기실 전달자, 기껏해야 잠정적 보관인이나 일시적 사용자, 점유자에 불과하다.
여기서 "준다"는 것은 단순히 "전달한다(transmit, deliver)"는 것이지 소유물 혹은 소유권을 "양도한다(assign)"는 뜻이 아니다.
양도자는 증여의 능동적 주체이나 전달자는, 우편배달부처럼, 증여도 할 수 없고 주체도 될 수 없다.
그가 주체라면, 절반 이하의 주체이거나, 과정 혹은 길―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는― 위에서만 주체인 척할 수 있을 뿐이다.
"하우가 여행한다(travel)"는 표현은, 따라서, 애니미즘적 비유가 아니다.
사정이 이럴진대, 이 "하우"의 사태를 (우리의 통상적 어법에 따라) "선물의 증여-수수"라고 이름할 수 있는가?
모스는 포틀래치 관습을 구성하는 세 가지 실행 항목―주어야한다, 받아야 한다, 되주어야 한다―이 "자발적이면서 동시에 의무적"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선물교환"이라는 언뜻 보기에 자연스럽지만 실은 모순적인
―왜냐면 선물은 정의상 대가 없이 주는 것이어서 되 돌려받기 위해 주거나 보상을 받을 경우,
즉 교환으로 변질될 경우 무효가 되므로― 표현과 함께 "선물의 역설"을 보여준다.
이제 우리는 선물의 가장 어려운 역설을 하나 추가해야만 한다.
즉, 선물하는 사회는 선물을 모르며, "선물"이라는 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니체의 짜라투스트라가 "주는 덕(Herschsucht)"을 "이름 붙일 수 없는 것(unnameable)"이라고 말했던 이유이다.
모스도 알고있었듯이, 포틀래치는 근대적 합리성의 개인주의적이고 경제주의적인 범주들을 가지고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며,
선물주기는 (시장)경제의 시선 아래서는 이름할 수 없는 것,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사유 재산과 사적인 축적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경제적 질서 안에서 "선물"은 공동체적 삶의 신경망을 이루는 것이 되기보다는
이례적인 사항, 명절이나 특별한 이벤트를 위해 준비되는 예외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선물의 증여가 이름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되려면, 사유재산과 “개인성(individuality)으로서의 주체성”에 관한
우리의 상식적 범주들이 먼저 의문에 부쳐져야한다.

선물하는 공동체


흔히 공동체(community)로 번역되는 라틴어 '코뮨(commun)'은 "함께", "묶음"을 뜻하는 접두어 "cum"과
선물을 뜻하는 "munis"가 결합된 것이다. 요컨대, 공동체란 "선물을 주고받고, 함께 나누는 사람들의 묶음"이다.
이런 맥락에서, "공산주의"라는 번역어를 갖고있는 코뮤니즘(communism)의 실천과 관련하여,
"선물"이라는 용어는 사적 소유제의 지양, 법의 권위와 지배(주권)의 불가피성을 극복하는 연대성의 발현을 지시하고 있다.
요컨대 그것은 법과 돈이 없이 살아가는 사회를 가리킨다. 그것은 잃어버린 유토피아에 대한 낡아빠진 의지의 복권인가?





문제는 우리가 교환을 선물로 전환하는 것, 주고받는 것을 "선물"이라고 독단적으로 결정해 주관적 믿어버리거나
아니면 상호 주관적 믿음 속에서, 나아가 이러한 믿음의 객관화, 체계화, 제도화(곧, 물화reification)를 지향하는 속에서,
선물 혹은 증여의 공동체라는 이상을 실현하는 것 또는, 결국 같은 얘기가 되겠지만,
사적 소유가 나타나기 이전의 원시 공동체라는 잃어버린 낙원을 복원하는 것이, 정확히, 아니다!
(물론 프랑스의 모스(Movement for Anti-Utilitarian Social Science)그룹이나 자본주의 비판자들,
특히 만사를 교환의 질서 하에 두고자하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낭만적 좌파들이나
모든 좌파들이 공유하는 낭만성의 윤리적?정치적 실천들은 중요하며 어떤 방식으로도 폄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선물에 관한 논의는 오히려 바로 이러한 운동들이 취해야할 올바른 태도와 전략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선물의 인식(그것이, 부르디외의 말처럼, 언제나 오인된 인식(mis-recognition)이다)이든
교환의 인식(보드리야르가 『불가능한 교환』에서 지적했듯이, 이 또한 오인된 인식이다)이든,
그것은 그 자체로 결정될 수 없는 것이며, 언제나 맥락 속에서만 의미효과를 가지는 것이다.
요컨대, 선물이냐 교환이냐를 이론적으로 결정하려는 시도는, 맑스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정확히 표명한 바 있듯이,
"순전히 스콜라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우리의 실천은 이런 것이어야 한다. 주어야 한다, 준다는 생각 없이! 받아야 한다, 되주어야 한다는 생각 없이!
니체가 권고했듯이, 줌과 동시에 망각해야 하고, 망각과 동시에 받아야 한다.
줌과 받음을 통해 형성되는 이 네트워크에서 모든 교통을 채권과 채무로 기억하는
그 (교환)권력의 저 기억의 중심―기억은 모든 형이상학, 나아가 자의식의 기초이다―을 말소하는 것이며,
문제는 바로 이 혁명적 실천이다.


<연세대학원신문> 2003년 9월호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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