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27건

  1. 2009.12.01 밀양-숨은 빛을 찾아서
  2. 2009.10.30 그대 아직도 법을 꿈꾸고 있는가
  3. 2009.10.30 삼성과 우리
  4. 2009.10.29 마르크스 용산에서 울다
  5. 2009.10.28 선물하는 공동체
  6. 2009.10.14 사랑과 노동-코뮨을 코뮤니케이팅하는 뫼비우스의 띠
  7. 2009.10.13 오페라의 유령과 프롤레타리아 1

밀양-숨은 빛을 찾아서

|


숨은 빛을 찾아서

―밀양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다시 여기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말년에, 시인 마이꼬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작품구상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주인공은 삶을 영위하면서 잠시 무신론자가 되고, 그 다음엔 신자가 되고,
다시 그 다음엔 광신자이자 종파주의자가 되고, 결국엔 다시 무신론자가 됩니다.”

루카치는 이 대목을 도스토예프스키적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로 읽는다.
우리는 신에 대한 사랑, 즉 믿음이 거쳐 가는 이 변증법적 원환의 경로를
이창동의 <밀양>에 들어있는 ‘비밀의 빛’을 푸는 열쇠말로 삼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은 어디에? 


<밀양>은 우선 이런 이야기다.
남편을 잃은 여자는 죽은 남편을 찾아 그의 고향으로 갔다가,
유괴범 손에 하나뿐인 아들마저 잃고,
세상 어디에도 의탁할 곳이 없어 세상 밖에(서 세상을 돌보고) 계신다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겼다가,
그 신의 품안에 안겨있는 유괴범을 본 후 미칠 것 같은 배신감에
신을 모독하고 괴롭히다가(역설적이지만, 이때 그녀는 가장 광신적이다) 자진해 죽어버리는 이야기다,
아니 자살했다가 겨우 살아나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요컨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간신히 목숨만 건진 불쌍한 여자 이야기다
(그녀는 신에 의해 무신론자로 구원되었다, 그것은 어떤 신인가?).

플롯은 매우 단순하게 읽히고 또 극장에서도 자연스럽게
(결코 ‘쉽게’는 아니지만) 따라갈 수 있게 짜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잘 뜯어보면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현실주의자의 이성적인 눈―이를테면 ‘신은 넌센스다’라고 말하는 과학자의 시각―으로 보면
곳곳에 논리적 비약이 있건만 관객은 그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예컨대, 외도하다 죽은 남편 고향엔 왜 살러가나?
아들을 유괴해 죽인 자를 왜 먼저 용서하겠다고 나서나?
신의 은총으로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살인범에게
‘너 같은 놈은 죽어 마땅해!’라거나 ‘평생 그 안에서 썩어라,
나는 바깥에서 죽는 날까지 너를 저주하마!“라고 욕하지 않고
왜 애꿎게도 자신이 애초 그 존재를 부인했던 신을 끊임없이 저주하고 모욕하는 일로 생을 낭비하는가?
그러다 왜 자살하려고 했는가?
어떻게 도로 살아났는가?
어째서 그토록 큰 상처를 준 고장을 떠나는 않는가? 기타 등등이다.

너무나 리얼해보였던 이 불쌍한 여자 이야기는, 이처럼 전혀 ‘현실주의적’이질 못하다.
이 비극적 이야기를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 있어선 안 되지만 없어서도 안 될 것 같은 일들의 이야기,
너무 괴롭고 슬프지만 그래도 자꾸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묘한 마력을 지닌 이야기,
요컨대 미당이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라고 노래했을 때의 그 삶의 이야기로 바꾸려면,
또 하나의 비현실주의적인 이야기를 거기 포개어 놓아야 한다.
그래서 밀양은 한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남자는 지방 소도시에서 작은 카센터를 운영하는, 그의 카센터만큼이나 볼품없는 노총각으로
어느날 서울에서 아들 하나 데리고 자신의 고장을 찾은 과부를 짝사랑하게 된다.
여자가 이 소도시에서 겪는 이야기는 앞서 말한 대로이다.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그녀가 ‘절대로 마음을 줄 것 같지 않은 타입’의 이 남자는
그녀의 등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삶의 매 장면마다 그녀를 지킨다.
남자는 반쯤 미쳐 동맥을 끊었던 여자가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회복할 때도 가장 큰 도움을 주었을 것 같다.
그런데 그가 주역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을 그 병원 장면들은 영화에서 쏙 빠져있다.
여자 쪽에서 보면, 이 남자의 이야기는 전혀 중요하질 않다.
반면 남자 쪽에선, 그녀가 없으면 이야기 자체가 성립하질 않는다.
이 두 줄기의 이야기는 영화 내내 그처럼 아주 이상하게 (안) 섞여있다.
영화 포스터에 써있는 카피가 문득 떠오른다.
‘이런 사랑도 있다….’ 


























 


다시 현실주의자의 이성적 시각으로 요약하자면,
<밀양>은 ‘없는 것’ ―과거의 남편, 죽은 아이, 부재하는 신―에 집착하는 여자와
그 여자에 집착하는 남자 사이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다.
여자는 ‘없는 것’을 짝사랑하다 상처입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상처 입어가며 짝사랑한다.
그럼, 도대체 사랑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배신과 무응답의 외사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두 사람 각자의 마음속에나 있는가?
현실주의자의 눈엔 보이지 않는 것,
“여기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어. 그냥 햇볕일 뿐이야”라고밖에는 말할 수밖에 없는
그 ‘없는 것’을 끼워 넣지 않고선 이 물음에 답하기 어렵다.
그래서 <밀양>은 마지막으로, 그 ‘없는 것’의 이야기이다. 


밀양에서 광주로


밀양(密陽, secret sunshine)이란 무엇인가?
가령, 어떤 이가 죽고 그가 남긴 흔적도 지워지고 이름마저 잊어버렸는데
누군가 그를 애틋하게 그리워한다면,
(있었던 지조차 확인할 길 없는) 이 ‘없는 것’에 대한 불가능한 그리움 속에서
그는 비밀스런 빛이 되고 살아가는 힘이 되며, (부재하는) 그가 있는 곳은 ‘밀양’이 된다.
어떻게 추억해도 그 추억은 옳은 것일 수가 없고, 또 그런 만큼 틀린 것일 수도 없다.
뭐라 불러도 그 이름은 맞는 것일 수가 없기에 그는 대답하지 않는데,
그럼에도 모든 곳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런 얘기를 소녀취향의 말장난이나 어리석은 신앙고백이라고만 생각하면 정말 곤란하다.

올해 5.18 무렵 망월동을 방문했을 때, 나는 80년 당시 시민군이었다는 택시기사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고아원 출신의 구두닦이, 넝마주의, 식당배달부 뭐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공수부대가 워낙 짐승같이 사람들을 패죽이니까 울분을 못 참고 사태에 휘말려들었던 거죠.
여기저기서 싸우다 죽고 도청에서도 죽었어요.
군인들이 트럭에 실어다 야산에 그냥 파묻어버렸는데
가족도 친지도 없으니까 시신조차 찾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몇이나 될까? 수십명, 수백명, 아무도 모르죠.
오월이 지나고 나니까 광주시내에 그 많던 부랑자와 넝마주이들을 찾아보기가 어렵더군요.
다 어디로들 갔는지…."
그는 이런 말도 했다.
"그래도 항쟁 이후 광주에선 큰 사고나 재해가 없었는데,
그게 다 5.18영령들이 지켜준 덕분이 아닌가 싶어요."

영화 <화려한 휴가>는 그들을 '민우'와 '진우'라는 이름으로 불러온다.
빛고을(光州)에 살다가 그 고장의 빛이 된 형제와 자매들.
그들이 그 기사양반의 ‘밀양’이며 그 숨은 빛이 없을 때
광주는 ‘빛고을’이란 ‘뜻’을 갖지 못하는 그냥 지명에 지나지 않는다.
'밀양'은 지명이 아니거나, 지도에는 없는 지명이다.

소월의 절창 <초혼招魂>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
‘불러도 대답 없는 그 이름’을 목 놓아 부르다 죽는 것, ‘사랑하다 죽어버리는 것’,
그것이 우리 육신의 삶과 정신의 삶 사이로 흐르는 한줄기 또 다른 생, 즉 멜로스(melos)이다.
<초혼>은 누구의 노래인가?
그토록 우리를 불렀건만 우리가 그에 한 번도 제때 응답하지 못했던 저 멀리의 것들의 노래이다.
그것은 망자를 부르는 노래이지만, 이때 망자는
관두껑 같은 ‘현실주의적’ 삶의 밀실 속에 누워있는 우리들 자신이다.
저 산(山) 위에서 부르는 소리를 우리가 이 아래 집(宀)에서 들을 때 품게 되는 쓰리고 아린 그리움(心),
이것이 노래가 흘러나오는 비밀(密)의 장소이며
그 노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보고, 또 보여주어야만 하는 사랑의 빛(陽)이다.
<초혼>은 그렇게 생이라는 무도회로의 초대이며
실패한 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의 노래이다.
그 노래는 사람들의 가슴 속 그리움이고 그 그리움이 만드는 사람들의 율동이다.
다른 어디에도 밀양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프간에서 아픔의 자리로

 
루카치는 ‘고독한 개인과 민중의 삶 사이의 단절’은 19세기 후반 부르주아 문학의 중요한 주제인데,
이 문제를 온전한 폭과 깊이에서 다룬 작가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밖에 없다고
평가한다.
‘고독한 개인’과 ‘민중의 삶’ 사이의 단절이라는 이 문제는
이창동 감독이 계속 그 주위를 선회하고 있는 우리시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밀양>은 신앙인과 배교자와 범죄자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교회,
“경기가 엉망이고, 인구는 많이 줄었고, 부산에 가까워 말씨가 급한 한나라당의 도시”,
우리의 이 빌어먹을 공동체로 관객을 데려간다, 아니 다시 데려온다.
 ‘여기서 숨은 빛을 찾아라, 지니지도 않은 빛을 나눠주겠다고 교만을 떨며 아프간까지 갈게 아니라.’
내 귀엔 그렇게 들린다.
‘갈 거라면 신의 말씀을 전해주겠다거나 봉사를 하겠다거나 하는 교만한 생각을 품고가지 말아라.
그리움을 품고 가서 또 다른 그리움과 만나라. 고통이 다른 고통을 들여다보듯이….’






이제 우리는 <밀양>의 두 남녀가 겪는 단절과 엇갈린 사랑이 어떤 역사적 성격을 지닌 것이며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이 왜 ‘하나의 네 개의 이름’인지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밀양>의 마지막 장면은 그 단절의 극복이 어떤 식으로 이뤄져야 하는지에 관한 하나의 그림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는 거울을 보며 제 머리를 가위질하고 있다.
남자는 그 거울을 가슴에 안고 서서 그녀를 내려다본다.
그들의 시선은 그렇게 어긋난 채로 함께 있다.
그녀는 자기를 보고 있지만 그 자기란 남자의 가슴(위에 그려지는 영상image)임을 알지 못하며,
남자는 앞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지만 사랑하는 저 사람이 제 가슴(이 안고 있는 영상)임을 알지 못한다.
이미지란 원래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본 뜬 데드 마스크 이마고(imago)에서 나온 말이다.
이마고가 산 사람의 가슴에 그리움으로 있는 동안, 그들은 사랑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be-live-in).
우상 없이 믿을 수 있을 것이다(believe-in).
우상 없는 믿음이 사랑이고, 믿음이란 그처럼 소망 없는 사랑임을,
알지는 못한 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함이 어두운 고통의 연속처럼 보일지라도.

여자가 신을 향해 내뱉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문제제기
“(당신이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와 이후의 행동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내뱉은 '일곱 말씀' 중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절규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목이 마르다―이고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가 사랑어린 ‘숭배의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볼 때’
남자의 시선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여섯 번째 말씀―다 이루었도다!―이었다면,
영화의 맨 마지막 은은한 빛의 장면은
일곱 번째 말씀―저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에 대한 응답인양 거기 놓여있다.
카메라의 시선은 잘린 머리칼을 따라 바닥까지 내려왔다가
다시 머리카락 뭉치를 쓸어가는 바람을 따라 화단 아래서 멈춘다.
주인이 오래 떠나있던 화단은 황량하다.
물이 말라버린 펌프, 먼지 쌓인 빨래판,
서걱이며 마른 몸 부비는 잡초들, 아무렇게나 흩어진 돌멩이와 흙더미….
그 위로 내려앉는 은은(隱隱)한 햇빛마저 없었다면 견딜 수 없이 쓸쓸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늦여름 오후의 햇빛은 화단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놓는다.
강아지풀 그림자들은 정물화처럼(still-life) 적막한 풍경에 자그마한 생기를 불어넣는다.
서로 장난을 치는 듯한 그림자―실체 뒤에 남는 이미지―들의 춤.

사랑은 그들의 상처를 찍어 그린 고통의 어두운 점묘화 속에 있고,
그렇게 ‘텔로스 없는 멜로스’가 지나간 자리에 (우리가 갔어야 할) 텔로스를 남긴다.

처음엔 그저 어두운 그림자처럼 보이지만 적절한 거리에선 누구나 그 빛의 무늬를 볼 수 있는,
숨은 빛 속에 말이다.

여자, 남자, 그리고 ‘없는 것’―이렇게 3항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그러나 합일은 없는, 변증법적 회화(會話) 속에서,
두 믿음 사이의 사랑도 노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연세대학원신문> 2007년 9월(제154호)에 기고.

And

그대 아직도 법을 꿈꾸고 있는가

|


그대 아직도 법을 꿈꾸고 있는가?

―되살아오는 전체주의의 망령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가 <행정수도 이전 특별법>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린 것은 지난 10월 21일이었다.
2주가 조금 넘었을 뿐이지만, 충청권을 제외한 나라 전체는 벌써 이 문제를 돌이킬 수 없는 과거사실로 등록한 후
일찌감치 망각의 손아귀에 넘겨버린 듯 잠잠하다.
그러나 우리는 죽은 관습헌법이 현실의 성문헌법을 교살한 이 사태를 하나의 개별적 이슈가 아니라
'전체주의'라는 이름의 늙은 망령이 되돌아오는 전주곡으로 읽어야하지 않을까,
저 끔직한 교향곡의 지휘자에게 야유나 물병을 집어던져야 하는 것 아닐까,
지금 야유와 물병으로 막지 않으면 나중에는 돌멩이와 화염병으로도 막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닐까?


김정일이 북한의 헌법재판소라면...


헌재의 위헌판결이 나왔을 때, 조, 중, 동을 필두로 이 나라의 거의 모든 언론매체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친 첫 번째 구호는 “일단 무조건 승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토록 재빠른 만장일치의 여론 합의―불만스런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도
실천적인 관점에서 보면 일종의 동의에 해당한다―가 근래, 정확히 말해 참여정부 들어
보기 드문 현상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 합의문구가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라는 북한 노동당의 악명 높은 선전구호와 너무 닮아있어 깜짝 놀랐다.




만약 헌재가 “남한의 김정일 위원장”이라면…?






이런 엉뚱한 의구심은 위헌판결 다음날부터 헌재로 몰려들기 시작한 각종 청원들
―‘호주제도 유서 깊은 민족의 관습이니 호주제 폐지를 위헌 판결해 달라’에서부터
성매매 방지법에 대한 위헌소송 준비,
사립학교법 등 각종 개혁법안에 대한 위헌 심사요구 등등―을 보면서 서서히 윤곽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권력의 현거주지가 어디인지에 관해 가장 예리한 감각을 가진 사람은,
기회주의자들이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한(혹은 당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눈에 헌법재판소는 단지 지배 이데올로기의 최종심일 뿐만 아니라
국가수반인 대통령의 집권 계속 여부를 결정하고 국회의 결정을
하루아침에 무효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현실의 권력기구로 부상해있다.
수동적으로만 작동하는 헌법 해석기관에 불과하던 헌재를
최강의 정치적 권력기구―그러나, 그것은
정치과정을 배제한 정치권력이 되고자 한다는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로 끌어올린 것은
도대체 어떤 힘과 메커니즘일까? 자신들의 잠재적 힘을 현실의 권력으로 실현하기 위해
헌재를 최적의 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도대체 누구일까?
헌법의 주체이자 신민(subject)인 대한민국 국민, 즉 우리 자신일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드디어 법치와 민주주의가 하나로 합치된 이상적 공화국에 살게 된 것이리라.
그러나 그 둘의 합치를 선언하는 “우리가 곧 법이다”에서 나는
“짐이 곧 법이다”라는 절대군주의 목소리가
“승복하라, 승복하라”는 반복적 리듬에 맞춰 울려 퍼지는 것을 듣는다.


헌법과 인민의 죽음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는 북“조선”식 구호를 정당화하는 것은 “당과 인민은 하나다”라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이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침잠하고 맹목적인 수준으로 내면화될 때,
결정 주체와 행위 주체 사이의 차이는 지워지고 둘 사이의 간극은 봉합된다.
마치 “나는 밥을 먹는다”라는 말에서 “내가 밥을 먹기로 결심했으므로”라는 자기의지 표현이
불필요한 사족으로 자연스럽게 생략되듯이 말이다.
결국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당이 곧 우리이므로)!”와
“헌재가 결정하면 우리는 따라야 한다(헌재의 결정은 곧 우리의 결정이므로)!”는
구호가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것은
헌재는 헌법의 해석기관일 뿐 헌법 자체는 아니며
당은 인민의지의 실현 도구일 뿐 인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헌재와 헌법의 동일시, 당과 인민의 동일시는
이처럼 도구가 주체를 지배하는 전형적인 전도현상,
즉 헌법과 인민의 물화이고 화석화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헌법과 인민의지의 죽음이다.


북한인권법과 성매매 방지법


이런 맥락에서, <성매매 방지법>과 <북한인권법>은 형식상 동일한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두 법을 실정법으로 만들어준 다수 시민의 '선(善)한'―나는 그렇게 믿는다― 의지는
그것이 법의 권위를 가지고 대상에 적용될 때,
그 의지를 뒤집는 괴물이 될 수 있음을 모르(는 척하)고 있다.
아마 이런 비교 자체를 불쾌하게 느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법안은
“법을 통한 지배”라는 전체주의적 구도 위에서 함께 논의될 충분한 소지를 갖고 있다.
두 법은 그 법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집단(북한주민과 매춘여성)의 인권신장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표면적인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성매매 방지법>과 <북한 인권법>이 양국 의회를 압도적 지지로 통과한 것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여론의 강력한 지지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것은 그 집단의 소속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이다.
즉, 북한인권법은 북한주민의 탈북을, 성매매 방지법은 매춘여성들의 전업, 즉 탈매춘을 추진한다.
거기에는 대상 집단의 현재적 정체성에 대한 혐오와 적대가 도사리고 있다.
요컨대, 매매춘과 북한은 부정되어야할 악이다.
(<북한인권법>의 입안자와 옹호자들 중 상당수가 기독교도라는 점이 우연일까?)
따라서 북한주민과 매춘여성이 이 법이 표방하는 인권신장의 진정한 대상이 되려면
스스로 자신의 현존재를 적극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 예컨대 계속 북한주민으로 남으려는 사람들과 매매춘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여성들은
이 법이 보호하고 신장하려는 인권의 범위 바깥에 방치된다. 그들은 이 법의 관심사가 아닌 것이다.

북한주민의 인권이 염려된다면, 그들은 북한을 지원해야 한다.
그러나 이 법의 입안자들과 옹호자들에게 북한은 지상에서 사라져야할 국가일 뿐이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나, 외교적 고립의 해소, 군사적 압박의 완화 등
북한주민의 인권상황을 개선해줄 여건을 마련하는 실질적 조치들에는 전혀 무관심하다.
말 그대로 매춘여성의 인권과 처지를 개선하고자 한다면
매춘이라는 직업을 둘러싼 여건을 향상시키는데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 법의 입안자들에게 이런 주장은 매매춘을 장려하자는 난센스로밖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북한 인권법이 실은 “북한 방지법”이며
매매춘 방지법은, 그 법의 집행 과정이 잘 보여주듯이, 매매춘 여성의 인권신장을 위한 법이 아니라
다만 “매매춘과의 전쟁선언”일뿐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타자에 대한 순수한 호의를 표방하는 (그 자체로는) “정의로운 법”이
얼마나 쉽게 그와는 정반대의 것,
즉 타자에 대한 극렬한 혐오와 부정으로 전도되는지 그 생생한 사례를 접하게 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나는 북한주민의 인권을 향상시키려는 시도가 필요하지만
아직 그런 시도를 지원하기 위한 법은 제정되지도 않았으며,
매매춘 여성의 인권향상 또한 동일한 처지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법의 보편성, 법의 정의에 대한 순진한 믿음이야말로
법과 그 법을 다루는 자들을 전체주의적 물신으로 만들어준다.


정치를 복원하자!





“법” 뒤에 숨어서, 혹은 “당”이나 “국가”나 “민족”을 앞세워서 “내가 곧 ‘우리’다!”라고 주장하는 자,
자기가 우리의 대표자이자 대변자라고 복화술로 말하는 자는 스스로를 제왕으로 선포하는 자이다.
이런 도그마와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길,
동시에 “너는 너고, 나는 나일뿐 ‘우리’라는 것은 없다”고 냉소주의적으로 말하며
“우리”라 불리는 기저(基底) 공동체―차라리
사회적 인간의 근본조건이라 부르고 싶은 어떤 것―를 섣불리 폐기처분하지 않는 길은
“아니, 내가 ‘우리’다!”라고 되받아 치는 것뿐이다.
우리는, 바로 이 문장처럼, “우리”를 폐기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
그럴 때, 우리는 차라리 그 위험한 주어―“우리”―가 보다 더 의식적이 될 수 있도록
꾹 눌러 진하게 써야만 한다.

역설적이지만, 전체주의와 맞서기 위해서 우리는 “전체주의자”라는 오해와 비난을 무릅써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누구인지, 정의로운 법이란 어떤 것인지 말하는 행위,
즉 시학(poetics)으로서의 정치의 복원―아니 차라리 (재)시작―일 것이다.
실은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갈등과 모순이야말로 민주정치의 핵이 아닐까?
그렇다면,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영원한 갈등을 선언하는 정치적 행동이야말로
다가오는 전체주의의 망령을 쫓아내는 진짜 민중의 푸닥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04년 11월 <연세대학원신문> 기고

And

삼성과 우리

|


“우리가 누구인줄 알아?”
―스스로를 거인이라고 믿는 한줌의 난장이들에게



사장들이 소집됐다. 회장님의 특별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나라 백성들이 도대체 우리한테 뭐가 불만이라는 거야? 원인을 분석해서 대책을 한번 세워봐!”


낡은 중세의 새로운 복귀


회장님은 일전에 뜻밖의 곤욕을 치르셨다.
박사학위를 받아주십사는 한 유서 깊은 대학의 요청을 받고 ‘명예로운’ 행차를 하셨는데
‘철딱서니 없는’ 대학생들이 피켓을 들고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봉변’을 당했던 것이다.
“노동탄압박사에게 철학박사 수여가 웬 말이냐, 학교당국 규탄한다!”
“무노조 경영―납치, 감금, 폭행, 협박이 경영철학이냐!”


회장님의 인상이 일그러졌고, 도열해있던 총장 이하 교직원들의 얼굴은 잿빛이 됐다.
수행원들은 옥체에 혹 계란이라도 날라들까 회장님을 감쌌고,
경호원이란 이름의 어깨들이 학생들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천하의 회장님 일행이 새파란 학생들 때문에 우왕좌왕하는 이 놀라운 장면 앞에 아연실색한 건 기자들이었다.
“고대학생들의 폭력사태!”
흥분한 언론은 이 해프닝을 그렇게 규정지었다.
과장, 왜곡, 뻥튀기가 아니라 그들의 솔직한 심정이었으리라.
이 ‘폭력사태’를 다룬 보수언론의 기사, 논설, 칼럼은 딱 한마디 비명으로 시작되고, 딱 거기서 끝난다.
“감히 어딜!”





사장단은 회의 끝에 ‘상생과 나눔경영의 확대’라는 점잖은 대책을 내놨다
(‘확대’라는 말에는 자기들이 지금껏 ‘상생과 나눔경영’을 해왔다는 뜻이 들어있으렷다.
참으로 간교한 수사학이다).
“한국의 대표기업으로 성장한 이상,
단 1%의 반대세력이 있더라도 포용해 진정한
국민기업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박차를 가하자!”라는 구호도 함께 나왔다.
이 ‘대책’이란 것도 한 꺼풀 벗겨보면 결국 그 소리다.
“우리가 누군줄 알아? 우린 이 나라의 99%야. 감히 어딜!”
(숫자 얘기 나왔으니 한마디 해두자. 이건희 회장의 삼성그룹 지분이 얼마나 될까?
1% 안팎이다. 그 1%가 99%를 쥐락펴락 하고 있다. 이것이 족벌경영의 신비한 능력이다.
우리는 그 신비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저들이 ‘1%의 반대세력’이라 부르는 우리, 민중의 힘으로
스스로를 이 나라의 99%라 착각하는 삼성을 길들이려면 말이다.)
지레 겁을 집어먹은 대학 측에선 (시키지도 않은) 대책을 내놨다.
부총장 이하 보직교수 전원사퇴! 내 눈엔 그게 “대학교육 총사퇴”로 읽힌다.
“감히 어딜!”이란 한마디 호통에 대한 이 파격적 응답은
일부 학생들―이른바 “총학 없는 평화고대”, 즉 “노조 없는 평화삼성”의 아류들―에게서도 나왔다.
총학 탄핵안! 탄핵사유는?
‘총학이 우리대학 이미지에 먹칠을 했다. 이제 우리는 회장님께 ‘배은망덕한 놈들’로 낙인찍히게 됐잖은가.’
아, 놀랍고도 놀랍다. 새로운 왕과 신민의 체제, 지나간 줄 알았던 중세의 이 소리 없는 복귀는 말이다.


삼성을 흔들면 나라가 망한다고?

삼성은 자타 공히 우리나라 ‘대표’기업이다.
국가총생산의 17%, 국가수출의 20%, 세수의 8%, 상장사 전체 매출의 15%와 이익 25%가 삼성 몫이다.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흔들린다’는 풍문이 상식처럼 도는 것도 이런 통계수치 때문이다.
이 풍문이 다음과 같은 ‘공갈협박’으로 변질되는 건 순간이다.
“삼성을 흔들면 나라가 망한다.” 과연 그럴까?
대우가 망하고 현대가 깨지고 대기업의 방만한 문어발들이 줄줄이 토막 났을 때, 우리가 주저앉았었나?
그때 나온 소리는 오히려 정반대였다.
“재벌들이 나라를 말아먹었다! 재벌개혁만이 살길이다!”
벌써 잊었나? “I am F(나 낙제생이요)”라고 머리를 쥐어박으며 박박 써대던 그 말들을 되씹으며
“삼성공화국”, 아니 “삼성왕국”이란 말을 다시 들여다보자. 뭐라고 읽히는가?
‘삼성 때문에 나라가, 민주공화국의 정체가 흔들린다.’

이제야 뭐가 좀 보이는가? 연간 순익만 10조가 넘는 그룹의 경영권을 넘겨받으며
상속세로 고작 16억의 푼돈을 내고,
세금으로 냈어야할 돈의 일부를 ‘기부금’이란 명목으로 뿌리며 거드름을 피우는
삼성의 놀라운 ‘합법적’ 사기술이 보이는가.
언론계와 법조계, 학계와 문화계, 정계와 관가의 엘리트들을
돈과 인맥으로 싹쓸이해 첨단 이미지의 화려한 ‘삼성맨 라인업’을 구축하고,
그 뒤에선 구시대적 세습족벌경영과 강압적 ‘무노조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삼성의 교활한 경영전략이 보이는가.
정권의 특혜와 부동산 투기, 노동착취를 통해 성장했고
경쟁 중소업체들에 대한 비열한 공세 속에 독점을 강화해온 한국재벌들의 과거사가
삼성의 영광스런 현재 속에 고스란히 살아있는 게 보이는가.

IMF 이전의 재벌총수 이미지, 모든 계열사를 지배하는
권위적 ‘일자the One’의 풍모를 여전히 보존하고 있는 사람이 삼성 이건희씨 말고 또 있던가.
삼성이야말로 재벌개혁 실패의 살아있는 증거다.
그런데, 여기서 묘한 의문이 떠오른다.
삼성이 사실상 지배구조 개선―재벌개혁의 핵심사항―을 전혀 안 하고도
후기자본주의의 초우량 기업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재벌 개혁 정책의 문제는 ‘정책실행의 실패’가 아니라
실패한 또는 실패할 정책의 실행에 있었다는 뜻 아닐까.
막말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책에 과장된 수선을 떨었다,
재벌개혁이 건전한 자본주의를 가져온다는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뜻 아닐까.
결국, 삼성의 성공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확인시켜준다.
자본주의의 ‘정상적’ 발전과 ‘재벌’과 같은 독점지향적 콘체른(Konzern)은
실상 아무런 모순이 없으며
자본주의가 심화될수록 생산, 유통, 소비, 금융 거기다 매체와 교육,
심지어 정치권력까지 넘보는 거대 이익집단의 득세가 오히려 자연스럽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자본주의는 시장에 반(反)하는 제도인 셈이다.
바로 이 지점이 ‘건전한 시장자본주의’와
시민사회적 도덕관에 기댄 삼성 비판이 다다르게 될 막다른 골목이다.

Lost in translation


삼성은 이런 기업이미지 광고를 낸 적이 있다.
단조로운 60년대풍 복장을 한 여자 하나가 걷기 시작한다.
걷는 동안 그녀의 복장과 헤어스타일이 점점 세련되게 바뀌며 표정이 환해진다.
배경은 흑백 톤에서 점점 칼라로 바뀌고,
텔레비전, 전화기 등 온갖 전자제품들이 화면 안으로 들어오더니 첨단 디자인으로 진화해간다.
마침내 모든 테크놀로지가 농축된 듯 보이는 미래형 공간에 그녀가 멈춰 선다.
그리고 결정적 대사 한마디.
“기업이 생활을 바꿉니다, 삼성!”
아, 그렇구나! 지난 반세기의 일상공간과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압축재현하는 이 광고를 보며
우리는 삶의 외관과 내면을 주도하고 또 지배해온 진정한 주체가 누구였는지
단 30초 만에 학습을 완료한다(그리고 반복 노출된다).
기업이 우리의 ‘대표’ 주체다. 정치가 아니라 경제가 오늘날의 ‘대표’ 주제이듯 말이다.
그런데 ‘대표’기업이 누구였더라? 아, 삼성! 이렇게 해서
‘우리(사회적인 것)=기업(경제적인 것)=삼성(새로운 절대권력)’으로 이어지는 등식 대뜸 완성된다.
그 뒤에는 물론 ‘삼성=이건희 회장과 그 일가’라는, 다 아는 비밀이 최종항으로 숨어있으며
그 바탕에는 모든 가치를 화폐로 환산하고,
사회적으로 생산된 모든 가치를 사적 소유로 환원하는 자본주의적 계산법이 작동한다.
이 간단한 등식화, 기묘한 대표-재현(representation)의 메커니즘, 짧은 번역의 연쇄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언론은 공정성을, 대학은 자존심을, 학자는 지성을,
법조인은 정의를, 정치인은 대의를, 예술가는 상상력을,
취업전선의 학생들은 제정신을 (잃어)버리며,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 대부분이 삶에 대한 주권을 팔고 그 대가로 생존권을 벌며, 자유를 버리고 돈을 얻는다.
우리가 (잃어)버린 혹은 양도한 모든 것들이
저 사기성 농후한 등호의 연쇄를 따라 ‘다 아는 비밀’의 장소에 가 쌓이는 동안.



우리가 누구인가

독재자 박정희가 죽었을 때 “이제 우리는 다 죽게 됐다”며
땅을 치고 통곡하던 어리석은 백성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이야 그런 낡아빠진 신민의식을 가진 자들이 어디 있겠나,
세습적 족벌권력이 온존하는 이북이라면 모를까.'
천만에 말씀이다.
‘삼성 사태’를 둘러싼 세간의 냉소주의적, 패배주의적 반응들을 일별해보는 걸로도 충분하리라.
우리는 여전히 ‘대표’라는 이름의 물신과 우상들을 요구하고 또 욕망하는 것 같다.
그게 없으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일까?
하지만 여기 예외적인 순간을 담은 장면이 하나 있다.
레오 휴버만은 미국 민중사를 다룬 책 『가자, 아메리카로!』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한다.

서부의 한 집회에서 어떤 정부 관리들이 연단에 오르기 위해 군중 사이를 비집고 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외쳤다. “길을 비켜주시오. 우리는 민중의 '대표'들입니다.”
그러자 군중들이 재빨리 응수했다.
“당신들이 비켜가시오. 우리가 그 민중이요(we, the people *이 책의 원제목이다)!”

우리의 어깨를 밟고 서서 스스로를 거인이라 착각하는 난장이들에게,
언젠가 그들이 우리에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줄 날이 올 것이다.
“우리가 누군줄 알아? 우린 이 나라의 99%야. 감히 어딜!”




2005년 6월 <연세대학원신문>에 기고.

And

마르크스 용산에서 울다

|

마르크스, 용산에서 울다

―‘마르크스 패키지’와 ‘용산 망루전’ 사이에서



겨울은 갔다. 허나 아직 봄은 아니다.
봄 같지 않은 봄(春來不似春)―환절(換節), 또는 문턱(threshold)의 시간을 우리는 살고 있다.
겨울에서 봄으로의 환절기는 흔히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희망을 상징하며
그 자연적 형상은 잎이 돋아나기도 전에 피는 봄나무의 꽃들이다.
꽃은 그처럼 하나의 신호(sign)로 피어나며
신호는 그것을 살아내는 힘(생명)과 만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몸짓이 된다.
최근 우리는 ‘마르크스의 귀환’이라는 하나의 신호를 접하고 있다.
그것이 어떤 생명을 얻게 될 역사의 신호인지 아는 사람은 아직 없지만 말이다.


마르크스의 귀환


‘마르크스가 돌아오고 있다’는 풍문은 여기저기서 전해져 온다.
독일에선 <자본론> 판매량이 세배로 뛰었고,
일본에선 지난해 <게공선>(1929년)이란 계급주의 소설이 뜬금없이 수 십 만부나 팔려나갔다.
한국에서도 <자본론>이 재출간됐고 새로 쓰여진 해설서들도 덩달아 호응을 얻어가는 중이라고 한다.
‘페스티벌 봄(BO:M)’이 제3회 국제다원예술축제(3.27~4.12)로 기획한
<마르크스 패키지>
도 이런 ‘마르크스 귀환’의 한 고리를 이룬다.
패키지에는 세 개의 작품―한편의 연극과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이 묶여있는데,
독일극단 ‘리미니 프로토콜’의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과
뉴저먼 시네마의 대부 알렉산더 클루게의 <이념적 고물로부터의 뉴스: 마르크스-에이젠슈타인-자본론>
그리고 니콜라스 게이어홀터의 <일용할 양식>이 그것이다.
세 작품에 대한 분석은 이 글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힘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실재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마르크스의 귀환은 멜랑콜리나 회상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경제적 문제에 대한 실천적 응답(response)이자 책임(responsibility)의 실천인 것이다.






라깡의 실재(the Real)란 우선 상징세계의 균열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라는 낡은 의상을 다시 꺼내들게 만드는 상징세계 현재적 균열이란 무엇일까?
하도 엄청난 붕괴음을 수반한 것이어서 아직 그 균열의 소식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줄 안다.
그 하나는 월스트리트의 붕괴, 즉 신자유주의라는 세계금융질서의 파탄이고
(<자본론>과 <공산당선언>의 저자가 진지하게 재호출되는 까닭이 달리 무엇이겠는가),
다른 하나는 지난 1월 용산 재개발 현장에서 정권이 철거민들을 살인 진압한 사건이다.
전자가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경제 질서의 위기라면
후자는 민주주의 국가 질서의 결정적 파산을 가리키고 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동시에 또한 국내적으로뿐만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이전에도 간간이 있어왔던 ‘마르크스에 대한 회상’과
현재의 ‘마르크스의 귀환’을 차별 짓는 배경이다.


세계의 상처와 예술의 응답


상징세계가 기존의 지배질서를 뜻하는 것이라면,
사회적 상징세계의 붕괴란 시민적 삶 전반에 혼란과 고통,
불안과 파편화를 가져오는 일련의 불행들을 뜻하므로 아무도 이런 파국적 상황을 반길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위기를 ‘하나의 (세계에 대한 재인식과 재구성의) 기회’로 받아들여야 하는 까닭은
현재의 혼란과 고통들이 오랫동안 이 체제에 의해 고통 받던 자들에겐 일상이고 상례였기 때문이며
이제 대다수가 그러한 고통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데 있다.
이 예외적 비상상태(state of exception)에서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다는 얘기다.



   

신자유주의의 파산과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두 사건의 전조는 작년 봄 촛불시위였다.
(한미FTA와 연결된) 광우병 위험 쇠고기에 대한 무분별한 시장개방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폭력적 전개가 낳은 산물이고
촛불시위는 이러한 인간-생명-공동체의 위기에 맞선 대중들의 저항이었으니까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촛불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점점 더 거세게 타오르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겨울에서 봄으로의 환절기에 예고 없이 깨어지는 얼음판처럼 곳곳에서 균열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상징계의 틈새들에서 일어나는 저항들 사이의 연대와 소통이다.
이때 촛불이 욕망하는 소통(communication)이란 국민과 정권 사이의 원활한 소통이 아니다.
촛불이 지향하는 소통은 대중과 대중 사이의 소통,
부르주아적 환상에 포획된 ‘국민’과 그러한 체제적 자기정체성 아래 억눌린 채 고통 받는
‘헐벗은 생명(bare life)’ 사이의 주체 내적 소통, 즉 ‘꼬뮨-하기’(communization)이다.
권력은 언제나 그러한 소통을 틀 지우고 가로막는 장벽에 지나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 스스로가 자신을 컨테이너 장벽(‘명박산성’)으로 제시했을 때 이 점이 분명해졌다.
용산참사는 우리가 그 장벽을 서둘러 철거하지 않을 때,
그 컨테이너 하나하나가 우리의 삶터를 부수고 생명을 불태우는 무기로 쓰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촛불의 소통은 권력이라는 장벽의 철거이고
권력과 자본이 그어놓은 질서-명령(order)의 선들에 대한 과감한 위반을 함축한다
.
바로 여기에 예술의 과제가 놓여있다.
예술이란 서로 떨어진 주체들 사이에서 공통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
쉽게 말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기예가 아닌가.
 

예술과 정치의 동근원성


인사동 평화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망루전(亡淚展, 3.11~4.28)은
용산참사를 잊지 않으려는 예술가들의 집합적 몸짓이며
용산의 불꽃을 다른 저항의 불꽃으로 잇고자 하는 정치적 몸짓이다.
상징계의 균열로서의 실재-―사회적 신체의 찢기고 깨어진 상처의 자리―-는
그처럼 정치와 예술의 동근원성을 입증한다.
바로 이 상처의 자리에 오늘날 우리 모두의 생이 놓여 있다.
우리-거기-살아-있다, 즉 공동체(우리)는 ‘거기(da)’와 ‘있다(sein)’ 사이의 ‘삶-생명’(life)이다.
용산참사에 관한 예술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반응인 일련의 전시와 공연들은,
그래서 ‘여기 사람이 있다’라는 슬로건으로, 문턱과 경계 위에서의 생명 선언으로 표현된다. 




 


마르크스의 회귀는 <자본론>이라는 텍스트의 현실성과
마르크스라는 19세기 사상가의 현재성을 입증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마르크스라는 이름 아래 한번 나타났던 어떤 힘의 현존을 (재)확인하고
그 부활을 겨냥한다.
그 힘이란, 말할 것도 없이,
자본주의와 화폐적 교환의 상징세계 안에 유령으로 떠도는 ‘코뮨(commune)’이다.

그러한 힘의 생동이 어째서 ‘코뮨주의’라는 당파적 경향을 띠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여기서 다룰 수는 없다.
대신에 나는 공황에 시달리던 독일경제의 상황을 보며
발터 벤야민―-정치를 감성화 하는 파시즘에
감성의 정치화로 맞서고자 했던-―이 썼던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가난이 거대한 그림자처럼 자신이 속한 민족과 자기 집 위를 뒤덮어버린다면
아무도 그러한 가난과는 결코 화해하려들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는 오감을 그에게 가해지는 모든 굴욕에 항상 깨어있도록 해야 하고,
고통이 원한의 급격한 내리막길이 아니라 반역의 오르막길을 개척할 수 있을 때까지
오감을 엄격하게 단련해야 한다.” (<일방통행로> 45쪽)

감각의 기예인 예술이 나눔의 기예인 정치적 활동과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는 삶을 속박하는 어두운 힘들에 대항했던 마르크스의 인식과 저항의 선언을
실천적으로 재생시킬 수 있을 것이며,
그때에 이르러서야 우리 모두의 공통된 이름이 울려 퍼지는 역사의 봄날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환절의 시간이 묵시(apocalypse)의 광기가 아니라 희망의 몸짓으로 피기까지,
우리는 황지우의 시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가 일러주듯,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연세대학원신문> 2009년 4월호에 기고

And

선물하는 공동체

|


공동체라는 선물, 혹은
선물하는 공동체를 향하여


―지배와 소유를 가로지르는 선물의 문제는 공동체의 근원적 형상에 대한 탐색과 실천



'선물'은 쉬운 말이다. 어린애들도 그 뜻쯤은 안다(실은 아이들만이 그 참뜻을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선물 주고받는 것은 흔히 보고 흔히 듣고 다반사로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선물 받은 것 하나쯤 몸에 지니지 않은 사람은 없다. (어쩌면 우리의 몸 자체가 하나의 선물은 아닐까?)
물론, 선물이 쉽고 흔하다고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공기나 물이나 밥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선물'이란 게 학문적 테마까지야 될 수 있겠나 싶다. 그래봐야 고작 '선물'인 것을….
두말할 나위 없이, 틀린 생각이다.
언제나 그러했고, 요즘 더더욱 그러하듯이, 가장 깊은 학문의 주제는 공기, 물, 밥 그리고 몸들이다.
의당 그러해야 한다. 가장 다급하고 치열하면서도 심오한 세계의 문제가 바로 거기에 있는 때문이며,
가장 진지한 삶의 문제가 바로 그러한 것들에 뿌리를 대고 있는 까닭이다.
아니, 삶의 문제가 아니라 삶이라고 고쳐 말하자. 말하자면, 선물은 가장 진지한 삶의 문제들 중 하나인 것이 아니라,
공기와 물, 밥과 몸처럼 가장 깊은 삶 그 자체이다.
이제 우리가 하려는 말들은 우선 여기서 출발하고, 어쩌면, 마침내 여기로 돌아오게 되리라.
"선물, 그것은 가장 깊은 삶이다!"

선물은 왜 가장 깊은 삶인가


선물 속에서 인간의 삶, 문자 그대로 "사람 사이"(人-間)에서 더불어 삶"의 깊은 심연을 보게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더불어 삶"의 "더불어"는 "함께 있음", 무언가를 "함께 함"을 뜻한다.
"함께(cum)"는 이미 둘 이상의 서로 구별되는 동일자를 전제한다.
개별적인 동일자들이 자신의 동일성을 넘어서 타자에게로 개방되고 사회적인 것으로 나아가게 될 때,
이 모래알을 찰흙으로 뭉치게 하는 마법의 요체는 단순히 "함께 있음"(공동존재, mitsein)이라기보다
"함께 함이 있음"(공동 실천) 혹은 "함께 나누어 함, 함께 나누어 가짐"(分有, partage)이다.
여기서 존재는 운동 혹은 실천과 구분되지 않으며 거기에는 이미 존재자성을 넘어서는 존재,
존재 너머의 존재가 있다(그런 게 아니라면 운동은 어찌 운동일 수 있겠는가).
기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언제나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고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
사람과 사람 아닌 것들 사이에서도 언제나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다.
있다는 것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그것은 우선 '시간'이라는 것과 그것의 존재방식에 의해서 증명된다).
그래서 하이데거와 레비나스는 존재(Sein)를 동사형이나 술어의 차원(Es gibt/ I’l ya)으로 표현하고 싶어했다.
존재의 사건성(Ereignis)을 강조하는 하이데거의 'Es gibt'(그것이 준다)에 잘 드러나듯이,
선물은 이 동사형의 존재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 "함께 함"이라는 문제와 더불어 선물의 존재는 철학적, 사변적 영역을 성큼 넘어서 버린다.


타자와의 교통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이러한 움직임을 "교통(Verkehr)"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 말에는 물류의 운송과 교통, 사회적 교제 그리고 경제적 거래라는 뜻이 모두 들어있는데, 맑스는 한발 더 나아가,
언어적 소통(communication)을 여기에 연결시킨다. 유물론자 맑스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는 "순수(reines)" 의식이란 없으며, 그것은 언제나­-이미(always-already)
물질적 의식이고 관계 속의 의식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신은 애초부터 물질에 붙들려있다는 저주스런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바,
여기서 물질은 운동하는 공기층, 음성, 요컨대 언어라는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언어는 의식만큼 오래됐다―언어는 실천적인 것,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그에 따라 비로소 나 자신을 위해서도 존재하는 현실적 의식이며, 의식과 마찬가지로 욕구에서,
또 다른 인간과 교통하고자 하는 절박한 필요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초고에서는 삭제된 다음과 같은 문구에 주목하자.
"내 주위에 대한 나의 관계가 바로 나의 의식이다."(『독일이데올로기』)
이처럼 노동, 생산을 비롯한 경제적 거래(교환), 사회적 교제 그리고 언어적, 정신적 활동(의식)의 가장 밑바닥에
타자와의 교통이 동사형의 존재로서 전제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거기에 잠정적으로 "선물"이라는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면,
이제 선물은 역사적 사회의 (불)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핵심적 물음으로,
공동체의 존재방식에 대한 윤리적-­정치적 물음으로 승격된다.


사회의 (불)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선물­: 지배의 문제


마샬 살린즈는 현명하게도 선물 논의를 사회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라는 홉스의 논의에 연결시키고 있다.
그는 『석기시대 경제』에서 모스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홉스의 명제를
"만인 사이의 만물의 교환exchange everything between everybody"으로 대체했다
는데
『증여론』의 정치 사회학적 의의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 지적은 모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그의 숙부 에밀 뒤르케임의 중요한 선언을 숙고하는데도 대단히 의미 깊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뒤르케임은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에서 사회의 가장 심층에서 울려나오고 있는 목소리를 "살기 위하여!"라는 명법(命法)으로 요약했었다
(나는 여기서 “또 다른 사람과 교통하고자 하는 절박한 필요”라는 맑스의 언명이 반향되는 것을 듣는다).
"살기 위해서 사회는 충분한 도덕적 동조가 필요할 뿐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되는 최소한의 논리적 동조도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이성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고 이성의 제안들을 수락하도록 하는
매우 특수한 권위의 근원인 것 같다."

뒤르케임의 이 언명을 사회가 항구적인 전쟁상태, 즉 그것의 불가능성에서 벗어나 안전과 평화라는 가능성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나를 넘어서는 것, 우리보다 우월한 어떤 것(즉, 초월적 타자)에 대한 복종, 자유의 양도가 불가피하다는
『리바이어던』의 또 다른 변주로 이해하기란 쉽다.
그러나 뒤르케임은 사회를 국가와 동일시하지 않았으며, 양도된 권력에 기반한 지배의 체계로 보지도 않았다.
 






토템이라는 한갓 사물이 제의를 통해 어떻게 숭배의 대상, 살아있는 힘이 되는가를 분석하면서 뒤르케임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 보이지 않는 실재성, 부분들의 합 이상의 무엇임과 동시에
"공동의 실천 가운데서만" 현상하는 힘,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분명하게 체험되는 힘이라는 점이었다.
그것이 종교의 가능성이다. 이런 생각은 홉스의 문제의식을 미묘하게 변화시킨다.
주목해야할 것은 "초월적 중심의 불가피성"이라는 홉스의 문제의식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그러한 중심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공동실천, 다시 말해 "초월적 중심의 (행위) 내재성"이라는 바로 이 차이이다.
즉 "살기 위하여"는 저 위에서 들려오는 초월적 권력의 위협―"죽지 않기 위하여, 혹은 살고 싶거든"이라는 위협적 명령이 아니라,
"더불어 살기 위하여"라는 아래로부터의 요청으로, 연대성의 실천적 존재론으로 고쳐 읽는 일이다.
내재적 초월성, 혹은 외심성(外心性, extimate)이라는 사회적 존재의 역설

모스의 선물-교환(gift-exchange)이라는 주제에서도 이어진다.
 
사실 모스는 '선물-교환' 속에 들어있는 권력의 작동, 지배의 계기들을 간과하고 있지 않다. 모스는 독일어 "Gift"는
"선물"이라는 뜻과 함께 "독(毒)"이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선물을 받는 것이 예속의 계기가 되기도 하며, 포틀래치에 나타나는 선물의 무상증여와 분배는
사회적 지위의 보존과 권위의 생성이라는 보상을 얻게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선물증여는 위세를 과시하며 권위와 (비대칭적으로) 교환된다.
나아가 모든 선물은 이러저러한 보답을 통해 사실상 교환의 질서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선물이 위장된 경제적 교환이라면,
이때 경제는 이미 물질의 교환이 아니라 상징적 교환의 차원에서만 올바르게 이해된다(보드리야르).
혹은 공리주의적 이해타산의 제한경제가 아니라 그러한 계산을 넘어서 작동하는 일반경제의 차원에서만 납득될 수 있다(바따이유).
증여가 언젠가 더 큰 부와 명예, 지위의 형태로 회수될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이익추구의 전략적 행위라면,
이러한 전략은 합리적이 아닐뿐더러, 고정된 주체의 의도로 환원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게 된다.
왜냐면 이 증여의 모험은 당장 일어나는 명백한 상실과 미래의 불확정적인 이익 사이에
시간, 보다 정확히 말해 주관적 기대를 실현시켜줄
보이지 않는 힘―이 힘은 타자에 귀속된다―으로 채색된 시간의 개입을 전제함으로써
주체의 동일성을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체가 있다면 그것은 증여자나 수수자가 아니라 선물이라는 기이한 물건(매개체),
아니 그 물건에 스며있는 사회적 관계의 망(網) 자체일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레비-스트로스가 『증여론』에서 읽어낸 "구조주의자 모스"의 얼굴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교통의 방식, 즉 사회 구성체의 역사를 착취 혹은 소유양식의 문제로 보았던 맑스를 떠올려야 한다.
순수한 교환이나 순수한 선물이란 것은 없다.
그것 주위에 대한 그것의 관계가 바로 선물인지 아닌지 여부를 결정한다.

선물과 교환 뒤에 숨은, 소유의 문제


데리다는 『주어진 시간1: 위조화폐』의 제사(Epigraph)에서 "태양왕" 루이 14세의 정부였던
마담 맹트농의 편지에 들어있는 "시간을 준다"는 표현을 문제 삼는다.
"어떻게 시간을 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다만 시간의 와중에 있는 것들, 그 시간 동안에 벌어진 일들을 준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시간 그 자체는 누군가―설령 그게 왕일지라도―취할 수도, 누군가에게 귀속될 수도 없는 것인 만큼,
그 자체로는, 줄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대목은 모스가 『증여론』에서 소개한 폴리네시아 원주민의 "하우(hau)"에 관한 언급을 떠올리게 한다.
증여하거나 증여 받은 선물의 영혼인 "하우"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하우의 증여/수증자는
소유자가 아니라 기실 전달자, 기껏해야 잠정적 보관인이나 일시적 사용자, 점유자에 불과하다.
여기서 "준다"는 것은 단순히 "전달한다(transmit, deliver)"는 것이지 소유물 혹은 소유권을 "양도한다(assign)"는 뜻이 아니다.
양도자는 증여의 능동적 주체이나 전달자는, 우편배달부처럼, 증여도 할 수 없고 주체도 될 수 없다.
그가 주체라면, 절반 이하의 주체이거나, 과정 혹은 길―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는― 위에서만 주체인 척할 수 있을 뿐이다.
"하우가 여행한다(travel)"는 표현은, 따라서, 애니미즘적 비유가 아니다.
사정이 이럴진대, 이 "하우"의 사태를 (우리의 통상적 어법에 따라) "선물의 증여-수수"라고 이름할 수 있는가?
모스는 포틀래치 관습을 구성하는 세 가지 실행 항목―주어야한다, 받아야 한다, 되주어야 한다―이 "자발적이면서 동시에 의무적"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선물교환"이라는 언뜻 보기에 자연스럽지만 실은 모순적인
―왜냐면 선물은 정의상 대가 없이 주는 것이어서 되 돌려받기 위해 주거나 보상을 받을 경우,
즉 교환으로 변질될 경우 무효가 되므로― 표현과 함께 "선물의 역설"을 보여준다.
이제 우리는 선물의 가장 어려운 역설을 하나 추가해야만 한다.
즉, 선물하는 사회는 선물을 모르며, "선물"이라는 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니체의 짜라투스트라가 "주는 덕(Herschsucht)"을 "이름 붙일 수 없는 것(unnameable)"이라고 말했던 이유이다.
모스도 알고있었듯이, 포틀래치는 근대적 합리성의 개인주의적이고 경제주의적인 범주들을 가지고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며,
선물주기는 (시장)경제의 시선 아래서는 이름할 수 없는 것,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사유 재산과 사적인 축적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경제적 질서 안에서 "선물"은 공동체적 삶의 신경망을 이루는 것이 되기보다는
이례적인 사항, 명절이나 특별한 이벤트를 위해 준비되는 예외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선물의 증여가 이름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되려면, 사유재산과 “개인성(individuality)으로서의 주체성”에 관한
우리의 상식적 범주들이 먼저 의문에 부쳐져야한다.

선물하는 공동체


흔히 공동체(community)로 번역되는 라틴어 '코뮨(commun)'은 "함께", "묶음"을 뜻하는 접두어 "cum"과
선물을 뜻하는 "munis"가 결합된 것이다. 요컨대, 공동체란 "선물을 주고받고, 함께 나누는 사람들의 묶음"이다.
이런 맥락에서, "공산주의"라는 번역어를 갖고있는 코뮤니즘(communism)의 실천과 관련하여,
"선물"이라는 용어는 사적 소유제의 지양, 법의 권위와 지배(주권)의 불가피성을 극복하는 연대성의 발현을 지시하고 있다.
요컨대 그것은 법과 돈이 없이 살아가는 사회를 가리킨다. 그것은 잃어버린 유토피아에 대한 낡아빠진 의지의 복권인가?





문제는 우리가 교환을 선물로 전환하는 것, 주고받는 것을 "선물"이라고 독단적으로 결정해 주관적 믿어버리거나
아니면 상호 주관적 믿음 속에서, 나아가 이러한 믿음의 객관화, 체계화, 제도화(곧, 물화reification)를 지향하는 속에서,
선물 혹은 증여의 공동체라는 이상을 실현하는 것 또는, 결국 같은 얘기가 되겠지만,
사적 소유가 나타나기 이전의 원시 공동체라는 잃어버린 낙원을 복원하는 것이, 정확히, 아니다!
(물론 프랑스의 모스(Movement for Anti-Utilitarian Social Science)그룹이나 자본주의 비판자들,
특히 만사를 교환의 질서 하에 두고자하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낭만적 좌파들이나
모든 좌파들이 공유하는 낭만성의 윤리적?정치적 실천들은 중요하며 어떤 방식으로도 폄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선물에 관한 논의는 오히려 바로 이러한 운동들이 취해야할 올바른 태도와 전략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선물의 인식(그것이, 부르디외의 말처럼, 언제나 오인된 인식(mis-recognition)이다)이든
교환의 인식(보드리야르가 『불가능한 교환』에서 지적했듯이, 이 또한 오인된 인식이다)이든,
그것은 그 자체로 결정될 수 없는 것이며, 언제나 맥락 속에서만 의미효과를 가지는 것이다.
요컨대, 선물이냐 교환이냐를 이론적으로 결정하려는 시도는, 맑스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정확히 표명한 바 있듯이,
"순전히 스콜라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우리의 실천은 이런 것이어야 한다. 주어야 한다, 준다는 생각 없이! 받아야 한다, 되주어야 한다는 생각 없이!
니체가 권고했듯이, 줌과 동시에 망각해야 하고, 망각과 동시에 받아야 한다.
줌과 받음을 통해 형성되는 이 네트워크에서 모든 교통을 채권과 채무로 기억하는
그 (교환)권력의 저 기억의 중심―기억은 모든 형이상학, 나아가 자의식의 기초이다―을 말소하는 것이며,
문제는 바로 이 혁명적 실천이다.


<연세대학원신문> 2003년 9월호에 기고


 

And

사랑과 노동-코뮨을 코뮤니케이팅하는 뫼비우스의 띠

|


지난겨울 케이블 티브이에서 재방송되는 <커피프린스 1호점>을 넋놓고 시청하다가, 정신이 번쩍 나는 대사 한마디를 들었다. “사장님... 사랑해요.” 온갖 우여곡절 끝에 여주인공 은찬(윤은혜)이 한결(공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나온 말이었다. 사장님 사랑해요? 이 무슨 어용노조 현수막에나 어울릴법한 문장이란 말인가. 물론 이 드라마에서 한결에 대한 은찬의 호칭은 내내 ‘사장님’ 아니면 ‘형’이었으므로 거기서 “한결씨 사랑해요”가 튀어나왔다면 도리어 어색했을 것이고 나의 이런 과민반응은 ‘오버’로 느껴지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사장님 사랑해요’가 과연 호칭상의 편의에서만 나온 것일까? 한결이 ‘커프 1호점’의 사장님이 아니라 종업원이거나 백수였어도 그 드라마의 매력이 ‘한결같이’ 유지됐을까?

 <커프 1호점>에서 은찬과 한결의 가족들은 사랑과 돈의 관계에 대해, 오직 은찬과 한결만 모르(는 척 하)고 있는 많은 진실들을 들려준다. 이를테면 은찬의 동생과 엄마는 둘 사이의 관계를 알고 난 후 ‘땡잡았다, 우리한테도 뭔가 떨어지는 게 있겠네.’ ‘그런데 혼수준비는 어쩌지?’라는 둥 노골적인 대사를 읊는다. 이런 현실적 문제들을 무마하기 위해 은찬에게는 2년간의 이태리유학과 커피전문가(barista) 자격증이 필요했다(물론 드라마에선 둘 사이의 연애 기간보다 훨씬 더 긴 그 2년이 단 10분으로 처리되며, 그림을 좋아하던 은찬이 왜 화가가 아니라 커피전문가가 되어야 했는지는 불문에 부쳐진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는 “사장님 사랑해요”가 ‘현실적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으며 아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셈이다. 남녀 간의 낭만적 연애감정과 계층적 위계라는 냉정한 현실 사이의 간극―이 고전적이면서도 여전히 현실적인 장애는 그렇게 10분간의 해외유학과 자판기커피보다 쉽게 따낸 자격증으로 봉합된다. 때문에 시청자들은 ‘사장님 사랑해요’와 ‘한결씨 사랑해요’가 결국 같은 말이라고 쉽사리 믿는다. 아니, 믿고 싶어 한다. 거기에 딴지거는 사람에게는 ‘괜한 트집’이라며 화를 낸다. 요컨대, ‘내 착각을 너의 진실로 방해하지 말란 말이야!’1)

1) 나라고 왜 달콤한 환상의 향유에 괜한 흠집을 내고 싶겠는가. 나 그렇게 모난 사람 아니다. 그렇지만 유권자의 과반수가 이런 ‘묻지마 환상’을 투표소까지 가져가시는 바람에 우리는 2메가바이트짜리 ‘사장님 대통령’을 모시고 분통을 터트리며 5년을 견뎌야한다. 문제는 드라마를 즐기고 말고가 아닌 것이다. 개그는 개그이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면 좋겠는데 그게 잘 안되니 문제라는 거다. 그런 분별이 잘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시청자의 멍청함이나 유권자의 어리석음 탓이 아니다. 그건 안방극장과 정치판과 투표소를 잇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우리시대의 지배적 환상과 욕망 탓이고 그런 환상을 키우는 경제적 상황, 아니 차라리 체제적 상황 탓이다. 우리가 짚어 봐야할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내가 흠집 내기로 작정한 것은 바로 그 환상의 현실적 근거이지 <커프 1호점>이 아니다.


최근에는 한 주말드라마(<조강지처클럽>)에서, 바람난 남편에게 버림받은 이혼녀가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새출발을 도와준 연하의 재벌집 아들―둘 사이에는 미묘한 애정의 기류가 흐르고 있다―에게 “본부장님은 저의 구세주세요”라는, 현실에서라면 듣기 힘든, 아니 들어주기 힘든 민망한 고백을 하는 걸 엿들었다. ‘사장님 사랑해요’와 ‘본부장님은 저의 구세주세요’라는 두 대사에 내 신경이 곤두선 까닭은 그것이 너무나 허구적이어서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너무나 적나라하게 현실적이고, 포르노만큼이나 외설적이다.2) 

2) 사람들이 허구를 좋아하는 까닭은 그것이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대리-실현해주기 때문이라는 건 맞는 얘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허구적 꿈들은 현실의 욕망을 정확히 재현하는 것이어야지, 비현실적인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드라마는 환상적이지만 드라마가 재현하는 것, 즉 드라마 속 환상을 이끄는 욕망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선 대중적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 대중은 현실에 지쳐 티브이를 켜거나 극장을 찾는 자들이지 현실을 모르거나 잠시 까먹기로 작정한 바보들이 아니다. 사람들이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티브이를 켜는 이유는 대타자가 지배하는 현실을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지배하는 대타자가 혹시 자신을 잊어버릴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현실과 티브이 속 현실의 차이는 현실에선 내가 대타자의 눈에 드는데 대체로 실패하는데 반해, 티브이 속 현실에선 자애로운 대타자가 나의 사랑스런 대역(代役)과 성공적으로 결합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처럼, 티브이는 대중을 바보로 만드는 상자일뿐만 아니라 바보 같은 대중의 현실을 담아 보여주는, 교활하리만치 영민한 상자라는 점을 대중문화비평가 한시도 잊어선 안 된다. 

문제는 어디서 발생하는가? 드라마가 아니라 드라마가 재현하는 현실적 욕망과 그 욕망에 의해 뒤틀리는 현실 위에서 발생한다. 몇 해 전 우리는 <중앙일보>기자들이 비자금 문제로 검찰에 출두하는 홍석현 씨를 위해 “회장님 힘내세요”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신문지상에서 시위 비슷한 걸―가령 노무현 정권 흠집 내기 기획기사 따위―펼치는 걸 보았다. 비슷한 장면은 최근 삼성특검 문제로 홍석현 회장이 검찰에 출두할 때 다시 한 번 반복됐다. 기자들의 ‘회장님 힘내세요’와 은찬의 ‘사장님 사랑해요’는 표현만 다를 뿐, 동일한 욕망을 뒤통수에 달고 있다. 은찬과 마찬가지로, 문제의 현수막을 내건 기자양반들은 회장님에게 사랑받기 위해 자신들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아마 회장님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일방적으로 베푸는 ‘가진 자’와 거기에 부응하려고 기를 쓰는 ‘못가진 자’ 사이의 연애감정과 연대감―이런 것들이 사랑과 노동의 불가피한 결합양태일까?

*    *    *

  사랑과 노동
- 코뮨을 코뮤니케이팅 하는 뫼비우스의 띠 

수수께끼 하나. 마르크스가 다음과 같이 묘사한 것은 무엇일까? "나를 인간의 삶과 결합시키고 사회와 결합시키며, 자연과 또 다른 인간과 결합시키는 끈, 모든 끈을 풀기도 하고 다시 맬 수도 있게 하는 끈…."
답은 화폐다. 『경제학-철학 수고』의 세 번째 초고에서 마르크스는 화폐를 ‘보편적 연결수단이자 절연(絶緣)수단’이라고 쓰고 있다. 마르크스답다고? 진짜 마르크스다운 얘기는 이 대목 바로 뒤에 나온다. 청년 마르크스는 노트에 다음과 같은 알쏭달쏭한 문장을 끼적거려 놓았다. “화폐는 진정 ‘보조’화폐일 뿐이며, 진정한 결합수단은 (…) 사회의 화학적 힘이다.”
인용문에서 (…)으로 표시된 부분은 악필로 유명한 마르크스의 초고에서 식별할 수 없는 어떤 단어(들)이다. 화폐를 ‘보조적’ 지위로 밀어내는 사회의 ‘진정한 화학적 힘’, 연결과 절연의 참된 끈을 마르크스는 도대체 무엇이라고 썼던 걸까? 마르크스주의 역사 동학(dynamics)인 유물론은 표면상 계급투쟁을 분석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혁명을 이끄는 이 ‘화학적’ 에너지에 대한 탐구가 지속되고 있다. 나는 그 ‘(…)’을 ‘사랑’ 혹은 ‘노동’, 보다 정확히 말해 사랑과 노동이 만드는 코뮤니케이팅(꼬뮨-하기), 즉 동사형으로 존재하는 ‘꼬뮨’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사랑과 노동의 상호소외

오늘날 사랑과 노동에는 흥미로운 모순이 딸려 다닌다. 모두들 각론에 몰두하지만 누구도 총론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먼저 사랑의 각론들을 보자.
사람들은 우연하거나 운명적인 만남에서부터 뜻밖이거나 필연적인 이별에 이르기까지, 연애사의 온갖 세목과 정서적 요동들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 관심을 쏟는다. 결혼을 둘러싼 각종 이벤트들에도 거의 목을 매는 분위기여서 ‘짝짓기’는 이제 ‘중매’라는 수공업적 단계에서 각광받는 전문산업(mating system)으로 격상되었다. 하지만 정작 ‘사랑’이란 말에는 다들 고개를 갸우뚱한다. 사랑? 아직도 그런 걸 믿느냐는 분위기다. 물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진지한 사랑과 헌신적 결혼―우리시대의 공식적 이데올로기―을 자기 삶이 지닌 진정성의 시험대로 간주하기는 한다. 그러나 모든 공식 이데올로기가 그러하듯 우리는 다만 믿는 척할 뿐이어서 아무도 그런 시험대에 자기 생을 올려놓는 모험을 하려들지는 않는다. 

노동 쪽도 사정은 비슷하다. 일자리와 연봉의 등락은 언제나 초미의 관심사이나 노동 자체는 기피, 혐오, 염증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높은 연봉을 주는 일자리’이지 더 이상 일이나 노동은 아닌 것이다.  비정규직을 비롯한 각종 노동문제는 그저 ‘정치권’이 다뤄야 할 골칫덩어리처럼 여겨지고, 파업이나 노동운동이 벌어져도 ‘임금인상을 위한 집단이기주의’ 정도로 치부된다. 요컨대, 별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노동시간과 노동강도는 세계최고 수준에서 떨어질 줄 모르고 있고 ‘비정규직’으로 상징되는 노동환경은 악화일로를 벗어날 줄 모르고 있다. 그렇다면 사랑 없는 연애와 결혼, 노동 없는 일자리와 연봉의 추구는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사랑이나 노동이라는 이념과 사랑과 노동의 구체적 행위, 사건들 사이에는 누구나 알고 있는 커다란 간극이 놓여있으며 우리는 이 간극을 지배하는 연결과 절연의 매체가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 바로 돈이다. 사랑과 사랑-유사 행위들을 매개하는 것은 돈이고 노동과 노동-관련 사안들을 끊어놓는 것도 돈이며, 노동과 사랑을 연결하는 것도 돈이라는 일반적 등가물이다. 문제는 화폐라는 이 고약한 매체가 원활한 소통이 아니라 불통과 왜곡, 착복을 일삼는다는 데 있다. 하지만 손발도 마음도 없는 화폐가 절로 그런 짓을 저지를 수는 없다. 따라서 화폐라는 물신이 아니라, 그것을 작동시키는 사회의 물적, 정신적 구조―사랑과 노동을 제물로 삼는 ‘등가교환’이란 제의를 통해, ‘자본’이라는 모호한 신의 제단에 ‘잉여’라는 공물을 쌓는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신앙체제를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3) 

3) 자본주의는 시장질서이거나 경제논리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뭔지 아직 잘 모르고 있다. 시장논자들은 왜 국가를 축소하라느니 말라느니 떠들기만 할 뿐, 국가를 폐절하자고는 감히 말하지 못하는가(심지어 그들은 국가의 행정이 경제의 원활한 운용과 기업의 이익을 도와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라는 뻔뻔스런 요구를 하지 않는가. 최소한 전봇대라도 뽑아주는 성의를 보여야 만족하지 않는가). 국가라는 합법적 폭력이 화폐의 신용과 소유권의 신성함을 보장하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단 하루도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경제(를 굴리는)권력의 체제이고 국가는 이 권력의 필수불가결한 도구인 것이다. 국가에 대한 시장주의자들의 공격은 실상 국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도구를 장악하려는 위험함 대중의 힘, 즉 민주주의에 대한 도발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사랑과 노동의 황무지


노동과 사랑은 사회적, 개인적 삶의 가장 큰 줄기여서 (‘노동이 사라졌다’느니 ‘사랑은 없다’느니 하는 헛소리들과 달리) 우리는 여전히, 일하고 사랑하며 살아간다. 우리 삶의 시간은 노동과 사랑으로 점철돼있고 지배적 현실과 이데올로기는 그걸 망치는 것으로 점철돼있다. 이를테면 이렇다.
경제생활을 소득과 지출로 나눌 때,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임금노동자들은 노동에서 소득을 얻고 (자기애와 가족애가 포함된)사랑 쪽에서 지출을 한다. 반면, 자본가와 기업은 사랑(을 미끼로 한 상품)을 팔아 소득을 얻고 노동을 열악하게 만듦으로써 지출을 줄인다. 그래서 자본과 기업이 헤게모니를 쥔 사회에선 자기애, 가족애, 성애 등등 사랑의 온갖 형태들이 이스트를 잔뜩 넣은 빵처럼 부풀려지고 이제 사랑은 초자아의 의무적 명령처럼 스트레스의 원천으로 변질된다(“너 아직 솔로니?” “인생을 즐겨라!”). 노동 또한 사회의 물적, 정신적 재생산 동력이라는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채 (사랑하는 나, 연인, 가족이 요구하는)상품 소비를 위한 돈을 버는 ‘고역의 장소’로 추락한다. 그 결과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사랑의 증거로 보험금만 남기고 지상에서 사라지는, 생명보험 광고의 가장(家長) 이미지다.



노동(사라진 가장)과 사랑(과장된 평화와 행복)이 돈(보험금)을 통해 연결되는 이 끔직한 광고는 우리시대의 가장의 욕망―‘가족이라는 짐을 벗고 훌훌 이 세상을 뜨고 싶구나’―과 가족의 욕망―‘돈만 남기고 꼰대는 사라져주었으면 좋겠어’―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양손으로 노동과 사랑을 지배하고픈 금융자본의 욕망과 자기 이미지(잘생긴 신사로 등장하는 자애로운 보험회사 직원)의 표현이다. 
 
자본이 더 많은 잉여를 뽑아내려고 기를 쓰는 곳에서 사랑은 독버섯처럼 화려해지고 노동은 곰팡이처럼 음침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사랑과 노동의 대지는 '황무지'로 변해가고 사람들은 잔인한 계절을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 누가 이것을 인간의 숙명이라 말하는가. 잔혹한 신처럼 군림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보이지 않는 손의 주인들, 가야할 때를 모르고 버티는 노회한 왕과 그의 부패한 신하들이 아닌가. 우리가 요즘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총체적 권력체제는 바로 이 죽어가는 왕, 즉 자본주의 체제의 말기 증상이다.

노동과 사랑의 주고받음


노동은 인간의 사회적 존재방식이다. 공장이나 회사에서의 일, 임노동만을 노동이라 생각하는 상식적 노동 이미지와 달리 마르크스는 노동을 사회를 가능케 하는 인간적 매개활동의 총체로 이해했다. 이때 노동이란 자급자족을 위한 생계유지 활동이 아니다―그건 동물들도 다 하는 일이다. 노동이란 우선 그 산물이 타자에게 유용한 한에서 자신에게도 의미 있게 되는 그런 활동들을 가리킨다. 노동에는 그처럼 원초적으로 사랑의 계기(조건 없는 증여/수수)가 포함돼있다. 인간은 노동하는 인간이고 노동은 (의식하든 못하든) 타자들에 대한 일반화된 사랑의 표현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다른 모든 사회와 마찬가지로, 노동 없이는 유지될 수 없으며 노동은 사랑 없이는 시작될 수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사랑과 노동을, 보다 정확히 말해 ‘사랑의 노동’과 ‘노동 속의 사랑’을 사회의 일반질서이자 구성적 문법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째서 그런가? 자본주의는 등가교환과 예외로서의 잉여만을 알뿐, 그 자체가 잉여인 교환, 즉 선물의 논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을 모른다.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타산적 개인주의자들은 더 많이 주고 더 적게 받음으로써, 또한 누구도 예외 없는 그 부등가의 질서에 의탁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성취되는 참된 등가(궁극적이고 인간적인 평등)의 풍요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늘 궁핍과 피해의식에 시달린다. 자본주의에게 사랑은 풀 수 없는 방정식이고 견딜 수 없는 무리수이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사랑에 젖줄을 대고서만 자신을 유지할 수 있으면서도 결코 그것을 일반적 질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착취하거나 악용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을 잉여가치를 뽑아내기 위한 ‘자원’으로만 보는, ‘더 많은 잉여의 산출, 더 많은 자본의 축적’을 ‘발전’이라 부르는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행태들에서 너무나 잘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사랑을 마시고 인간적 얼굴을 하게 되면 자본주의는 독약을 삼킨 짐승처럼 죽어버릴 것이다.

노동과 사랑을 산다는 것

여기서, 뜬금없어 보이는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돈 주고 사랑을 살 수 있나? 없다! 그건 자신은 웃지 않으면서 거울 속의 내가 미소 짓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랑은 사랑을 주면서만 받을 수 있고, 오직 사랑과만 교환(증여/수수)할 수 있다. 사랑은, 선물과 마찬가지로,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면 내 마음이 기쁘다는 정도의 얘기가 아니다. <증여론>에서 마르셀 모스가 관찰한 바 있듯이, 선물증여는 증여자에게 사회적 위신과 권위를 가져다준다. 그는 선물한 것들과 등가의 것들을 조만간 돌려받지 않지만, 그런 타산과는 다른 방식으로 증여의 순간에 곧장 무언가를 돌려받는 묘한 계산대 위에 선다(이런 계산을 하는 것은 증여적 사회이지 증여의 수행자들이 아니다). 그가 받는 것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만족만이 아니라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가 가지는 위상의 객관적 확인이다. 사랑도 이와 같다. 사랑을 준다는 것은 그가 타자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사랑하는 자’)를 유지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랑을 준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사)준다는 뜻인가?

  


라캉은 사랑이 ‘두 개의 결핍이 만나는 것’이며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어떻게 주는가? 데리다는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에 대한 비판서인 『주어진 시간: 위조화폐』에서 “시간을 준다”는 마담 맹트농의 편지 구절을 오래 붙들고 늘어지는데, 이때 자신이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시간을 준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생(의 시간)을 바친다는 뜻이다. 삶의 시간은 준다고 줄어들지 않고 주지 않는다고 소유하거나 축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바로 이 ‘삶의 시간’의 증여이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증여라기보다 전달의 ‘몸짓’이며 교통의 ‘행위’이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은 삶의 방식(way of life)이며 몸을 붓으로, 시간을 물감으로 삼아 타자의 세계에 그리는 생의 무늬(紋畵)이다. 우리는 오직 그 타자의 캔버스에만 자신의 생을 남길 수 있으며, 우리 생은 타자의 사랑이 남긴 무늬를 모두 지우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백지와 같다. ‘사랑을 준다’는 것은 결국 타자를 향한 사랑의 몸짓을 ‘살아간다’는 것이며 우리는 그러한 살아감을 통해서만 사랑을 ‘돌려받는다.’ 사랑의 수행자(agent)는 증여가 곧 수수인 사랑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을 뿐 사랑을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노동도 이와 마찬가지다. 노동은 (임금의 형태든 뭐든) 계량화되어 되돌려 받는 것으로는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과 마찬가지로 돈으로 노동을 살 수 없으며 그것을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도 없다. 노동은 오직 노동과만 교환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품앗이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노동 속에서 사랑의 계기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노동은 인간이 세계를 향해 자신을 내어준 생의 시간의 총량, 즉 삶 자체이기 때문에 그 대가로 세계 전체를 향유하고 세계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길 기대하며, 세계 전체가 자신의 노동의 산물을 향유하며 기뻐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사랑이 그리움 속에서 타자를 향해 가는 생의 증여/수수라면 노동은 그 사랑의 능동적 표현이자 실현이고 우리는 노동을 통해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한다. 그러한 사랑과 노동을 통해 우리는 화폐를 ‘보조’수단의 지위로 끌어내리고, 비로소 코뮨을 코뮤니케이팅하는 생의 주체로 스스로를 변모시킬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3월. <연세대학원신문>에 기고.


 

And

오페라의 유령과 프롤레타리아

|


 

오페라의 유령과 프롤레타리아

1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유령이…”
―칼 마르크스, 『공산당선언』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공산당 선언』 첫 문장을 끄집어내는 것은 분명 “생뚱맞은” 짓이다. ‘유령이란 단어가 나온다는 우연한 공통점을 빼면, 둘 사이에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질문 아닌 질문 앞에서, 나는 정색을 하고, 다음과 같이 대답 아닌 대답을 내놓고 싶어진다. 오페라의 유령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닌가.


2
Christin: Who was that shape in the shadow? Whose is the face in the mask? (…)
Phantom: Stranger than you dream it―can you even dare to look or bear to think of me.
―Phantom of the Opera, 1막 6장

“뭐, 오페라의 유령이 프롤레타리아라고?” 귀를 의심할 분들의 마음을 다소나마 진정시켜드리기 위해, 얼마 전 SONY사의 이데이 노부유끼 회장이 신제품 발표회장에서 한 말을 한마디 들려드릴까 한다. “이 제품에는 우리의 혼(魂)이 담겨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는 뜻을 일본식 관용어법으로 전달한 것일 테지만, 노부유끼씨의 근엄하고도 진심어린 표정을 봤다면 누구라도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픈 유혹을 느꼈을 것이다. 첨단기술이 동원된 21세기형 신제품을 소개하는 자리에 등장한 이 토테미즘적 발언, 이 원시적 사유구조는 너무나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혼을 가진 물건이라니! 하지만 너무 웃지는 말자. 컴퓨터가 갑자기 다운됐을 때, “야, 너 왜 그래? 이 녀석 또 말썽이네.”라고 말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게다가 당신은 지금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있지 않은가. 그저 까만 글자들이 쭈르륵 찍혀있을 뿐인 이 종이 위에서, 어항 속의 물고기만큼이나 조용한 이 책이라는 물건 속에서….
스피노자의 유명한 표현대로 “책장 속의 개는 짖지 않는다.” 하지만 소통(communication)하는 인간은 누구나 그 종이 위의 “개”가 짖는 소리를 듣는 귀를 갖고 있으며, “개”라는 글자가 빨간 혀를 빼물고 털 많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이제 이 이상한 눈과 귀들의 세계로, 무대 위에서 유령으로 떠도는 어떤 자의 거처, 밤이 그 캄캄한 눈을 감음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하는 신비롭고 무시무시한 지하미로(this labyrinth underground where night is blind)로 내려가 보자. 거기서 우리는 음향(sound)이 아니라 음악(music)을 듣는 귀를 갖고 있기에, 늙은 라울 후작처럼 애상어린 어조로 그저 물건에 불과한 음악상자(musical box)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친구여, 우리 모두가 죽어 사라진 후에도 너는 여전히 노래를 부르고 있겠지…”(프롤로그, 경매장 장면)


 3
Phantom‘s voice: Look at your face in the mirror―I am there inside!
―Phantom of the Opera, 1막 3장

어디가 입구인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이상한 눈과 귀가 붙어있는 우리의 또 다른 몸(our the other body), 우리의 타자의 몸(our the Other's body)이 마치 혼을 가진 듯 살아 움직이는 사물들과 대화를 나누며 섞여 사는 세계, 유령의 지하세계로 들어가는 문은 어디에 있는가? 놀랍게도 거울이, 거울 달린 비밀 문이 아니라, 거울 자체가 바로 그 문이다. 그러니까 거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오페라의 유령>의 환상적인 의상실 장면으로 가보자.




크리스틴은 의상실에 혼자 앉아있다.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막 끝낸 벅찬 밤이다. 의상실 뒷벽에는 커다란 전신거울이 비스듬히 걸려있다(만약 그 거울이 훨씬 더 크다면, 관객들은 거기 비춰진 자신의 얼굴을 발견할 수도 있으리라). 어디선가 굵은 음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무월광의 밤처럼 캄캄한 거울 표면 위로 희끄무레한 물체 하나가 하나 떠오른다. 사나흘 물속에 가라앉았다 떠오른 익사체의 피부처럼 희뿌연 실루엣. 그것은 이내 상아빛 가면에 검은 망토를 두른 남자로 변한다. 거울에서 그 형상을 본 크리스틴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향해, 정확히 말해 객석의 관객들을 향해, 돌아선다. 마치 화장대 거울을 통해 사랑하는 이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놀란 여인처럼 포옹이라도 하려는 듯 크게 팔을 벌린 그녀는 그 형상에게 말을 걸고 노래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크리스틴 앞에 있는 그가, 그녀가 보고 있는 듯한 어떤 인물이, 우리 관객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거울에 그 반영상이 비춰지고 있다면 의당 그 자리에 있어야할 어떤 실체가, 제자리에 없는 것이다. 그녀의 포즈로 미뤄 보건데 거울 바깥, 그녀와 우리(관객) 사이 어디쯤에 있음이 분명함에도 우리의 가련한 육안은 오직 거울 안에서만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문턱,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 서있는 이 기이한 존재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안다(고 착각한다). 유령! 그는 오페라의 유령이다. 하지만 이 손쉬운 답에 이르기 전에, 주어진 답으로 우리 자신을 속이기 전에, 수수께끼를 하나 풀어보도록 하자.

 

 4
Phantom/Christine(duet): the Phantom of the opera is there inside your/my mind….
―Phantom of the Opera, 1막 3장

그는 그림자처럼 붙어있다. 내가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며 병들었을 때 아파한다.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의 내 불쾌한 입냄새, 지저분한 습관, 온갖 너저분한 말들과 가장 은밀한 쾌락조차 그는 기꺼이 감내한다. 나를 인도하는 손이며 나를 지켜주는 보호자(guide and guardian), 교사이자 수호천사인 그는 나를 위해 음모를 꾸미고 경쟁자를 제거하며 살인마저 서슴지 않는 악마이기도 하다. 때로 나는 그에 대한 두려움을 가눌 길이 없다. 허나, 누가 그처럼 내 승리와 영광을 단 한 올의 질시 없이 기뻐하며 내 비참한 고난의 마지막 한 줌까지 함께 괴로워해줄 것인가. 그와 나의 영혼, 그와 나의 목소리는, 빛나는 지상과 어두운 지하 어디에서든 하나로 묶여있어 떼어낼 수가 없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 그것은 당신뿐이라고, 그와 나는 서로에게 고백한다. 그는 누구인가? 부모인가, 아니면 운명의 연인? 힌트를 하나 드리겠다. 나는 그를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고 오직 거울 속에서만 그를 볼 수 있다. 내가 거울을 들여다볼 때면 그는 마치 그 자리에서 영원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내가 그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거울에서 고개를 돌리면, 그 순간 그는 귀신처럼 사라져버린다. 나는 오직 마음속에서만 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답은? 쉽다. 그는 바로 “나”, 우리 각자의 나 자신이다. (다만 그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나가 아니라 내 바깥의 “거울 속의 나”, 나의 “또 다른 나”이다.) 그런데 크리스틴이 유령에게 부르는 노래, 유령이 크리스틴에게 바치는 행위가 모두 이 문제적 관계, 즉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 사이의 관계와 일치한다면? <오페라의 유령> 전체는 이 기묘한 한 쌍, 이 잘못된 동행(our strange duet―1막4장, the wrong companions―2막5장)의 이야기라면…?1)


 5
“노래를 부를 때면 나는 나 자신을 잊어버려요.”

―가스통 르루, 『오페라의 유령』 크리스틴의 편지 중에서…

크리스틴과 유령에게는 서로를 부르는 똑같은 명칭이 하나 있다. 음악 천사(angel of music)가 바로 그것이다. 둘은 바로 이 이름으로 서로를 호명한다(그것은 단지 이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이들이 상대에게 부여한 초월성의 지위이기도하다). 당신이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의 이름이 당신과 똑같다고 한번 상상해보자. 당신이 고백했던 사랑의 말이 상대의 목소리를 통해 고스란히 되돌아온다면, 그때 당신은 어떤 기분일까? 둘은 서로 열렬히 소통하지만 두 사람의 부름과 응답에는, 마치 나르시스와 에코의 대화처럼 지극히 역설적인 면이 있다. 그 사랑의 언어는 상대방을 절대적인 존재―“오직 당신만이…”―로 호명하는 순간에도 자기-지시적이다. 모든 사랑은 결국 나르시시즘이며, 사랑의 환상은 자기애(自己愛)의 상호교환에 불과하다는 냉소적인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 정확히 그 반대다. 그 사랑의 메아리 속에서 혼란에 빠져 허둥대는 것은 (“거울 너머의 나”처럼 나의 언어와 행위를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는) 상대가 아니라 거울 바깥에 그토록 확고하게 서있던 나의 정체성 혹은 자기동일성(identity)이기 때문이다. 거울을 한참 들여다보면 점점 선명해지는 것은 거울 밖의 내가 아니라 거울에 비춰진 나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현실의 나는 유령과 같은 존재로 화하여 그 메아리의 파장 위를 떠돌게 된다. 조금 전에 나는 크리스틴과 유령의 사랑은 현실의 내가 ‘거울 속의 나’와 맺는 어떤 관계일지 모른다고 말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관계가 호수에 비친 자기 이미지 속으로 익사하는 나르시스가 아니라 에코, 사랑하는 이의 말들을 반복하는 가운데 점점 투명하게 자신의 몸뚱이를 비워가다가 마침내 하나의 목소리로 화하는 에코의 몸뚱이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자신이 아니라 상대에게 매혹되어 자신의 육체성을 반향(反響)하는 목소리로 승화시켜가는 이 사랑의 몸짓은, 에코라는 말이 연상시키는 공기의 아름다운 떨림, 즉 음악의 탄생에 가 닿게 된다. 예술 중에서 음악만큼 절대적이고 자기-지시적인 것은 없다. 문학에서는 가장 자기지시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시(詩)가, 회화에서는 어떤 대상의 재현이길 멈춘 추상화가 바로 이 음악성을 담고자 애쓴다(예컨대 칸딘스키). 그러나 좋은 시와 추상화는 나르시시즘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무언가를 가리키지 않는 대신, 자기-지시를 통해, 무언가가 “된다.” 그 무언가는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자기가 아니라 자기 아닌 어떤 것의 절대적인 현존을 담는다. 그러므로 “음악의 천사”는 크리스틴과 유령이 서로를 부르는 이름임과 동시에 바로 자기 자신, 육체적 현실성이 지워진다는 끔찍한 공포 속에서 점점 더 선명해져오는 “또 다른 나”를 부르는 이름이다.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곳에 있는 내 등처럼, 문득문득 그게 나인지 의심스러워질 만큼 낯선 나. 적어도 사랑의 시간들에, 현실의 나를 압도하는 내 바깥의, 거울 속의 나. 그것은 크리스틴에 대한 사랑 속에서 자신의 저주받은 육체를 지워가는 오페라의 유령이고, 혼을 가진 사물들의 세계와 소통하는 통로이며, 우리를 사랑하는 이에게로 떠밀어가는 불가항력적인 힘인가? 게다가 왜 프롤레타리아란 말인가? 이제 우리는 거울에서 가면으로, 음악에서 역사의 무대로 다시 올라가야만 한다.


6
거울 속의 이미지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행위는…인간세계의 존재론적 구조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던 리비도의 역동성을 드러낸다.

―자크 라깡, <주체기능 형성 모형으로서의 거울단계> 중에서

우리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바로 자기애이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비극적 결말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가 바로 이것, 사랑의 진정한 도달 불가능성이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사랑에 도달하고자 하지만 실은 자기만을 사랑할 뿐이며, 고독하게도 이 달콤 씁쓰름한 자기애에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는 세속적 환멸의 지혜는 여기서 정반대로 뒤집혀져야 한다. 우리는 자기에 대한 사랑―완전한 사랑의 이상으로서의 “거울 속의 나”―에 도달하고자 하지만 실은 언제나 타인만을 사랑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실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타인에게 “거울 속의 나”를 투사하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거울 속의 나”가 거울 밖, 현실의 나에게 투사됨으로써 나는 비로소 나를 하나의 온전한 실체로 자각하게 된다. “거울 속의 나”라는 상상적 자기-이미지는 내가 만들어낸 허구적 구성물이 아니라 (거울 밖에 있는) “나”라는 허구적 구성물의 존재론적 중핵(core)이다. 
 우리가 행복한 합일이라는 사랑의 꿈을 실현하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에게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내 마음 속에 있는 “내 바깥 거울 속의 나”에게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거울 속의 나와 악수를 나눌 수 없고, 내 등과 포옹을 할 수도 없듯이, 나는 나에 대한 사랑을 결코 완성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차라리 이 합일 불가능성 자체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사랑을 부르는 다른 이름은 리비도이다. 끊임없는 욕망 속에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이 에너지는 삶의 힘이며 사랑의 힘이다. 이 욕동의 힘, 역동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자연인가? 그러나 동물들을 움직이는 힘과 인간을 인간되게―“인간답게”가 아니라― 움직이게끔 하는 이 힘은 자연이 아니라 사회, 적어도 사회적 자연으로부터 비롯된다. 사회적 자연은 먼저 자연적으로 주어지고 나중에 사회적으로 획득될 때, 비로소 실현된다. 그것은 마치 기억을 창조하는 일, 과거를 찾아 미래로 나가는 일처럼 역설적인 과정이다. 그러므로 리비도적 자아로서의 우리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자신의 등을 찾아 나선 여행자와도 같다. 그것을 항상 떠메고 다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쩌면 이 비유는 그리 쓸만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등은 신체 일부가 아니라 우리가 걸어온 생의 길, 타인의 삶의 앨범 속에 들어있어 우리자신은 결코 볼 수 없는 우리의 얼굴들일 것이므로.


7
Phantom/Christine(duet): Your/my spirit and your/my voice, in one combined
: the Phantom of the opera is there inside your/my mind….

―Phantom of the Opera, 1막 6장

같은 가사를 함께 노래하는 라울과 크리스틴의 이중창(1막 10장, 오페라하우스 지붕 장면)과 언제나 “너/나”로 갈라져있어 불편한 간극을 지워내지 못하는 유령과 크리스틴의 이중창을 비교해보면, 전자가 달콤하지만 왠지 과장된 느낌을 주는 반면, 후자는 거친 표면과 우울한 배면 사이로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울림을 전하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달콤한 거짓―“우리는 이제 하나예요”―과 고통스런 진실―“당신과 나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사이의 대조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달콤한 거짓, 즉 환상으로 기우는 마음을 결코 어떤 이유에서도 비난할 수 없으며, 막을 수도 없을 것이다.
라울과 크리스틴의 사랑은 두 사람의 행복한 합일처럼 보이지만, 실은 두 개의 목소리가 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에 불과하다. 이 우연한 동시성에서, 하나의 노래란 물론 각자의 나르시즘적 환상이다. 말하자면, “이제 우리는 하나예요”라는 노래는 “당신과 나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이 부르는 환상의 노래이다. 두 개의 목소리가 하나의 노래 속에 뒤섞이는 것, 요컨대 절망적인 노력 속에서 진정한 합일의 과정을 실현하는 것은 오히려 유령과 크리스틴의 불행한 사랑에서다. 서로에 대한 무지, 거기서 비롯되는 호기심, 오해와 눈속임, 알몸의 실체와의 끔찍한 대면, 서로에 대한 두려움, 치졸한 질투, 잔혹한 음모, 기회주의적 번민, 처절한 배신, 치사한 애원, 눈물어린 키스, 진심어린 용서와 희생적인 화해, 외면상 고독과 구별되지 않는 구원의 시간 등등 사랑의 모든 장면들을 일련의 드라마로 빚어내는 것은 라울이라는 “현실의 환상”이 아니라 유령이라는 “환상의 실재”인 것이다. 라울의 잘생긴 외모는 사실 가면이며, 유령의 추악한 얼굴이라는 현실을 지우면서 크리스틴에게 다가서는 도구(사물)가 되고 있는 가면이, 또한 그 가면으로 표상되는 음악이 오히려 진정한 삶과 사랑의 얼굴이다. 다시 한번 호수에 비친 나르시스의 잘생긴 얼굴에서 에코의 지워져가는 육체로!
어떤 시인의 말처럼,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이성복,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중에서) 사랑은 우리가 대상에게 마음대로 베풀거나 거두어들이는 어떤 감정이나 행위가 아니다. 사랑이라 불리는 그것은 “너/나”를 갈라놓는 저 비스듬한 빗금(bar), 거울 속의 나와 거울 밖의 나를 갈라놓는 단단한 벽이자 투명한 문으로서의 거울 자체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를 누군가에게로 데려간다. 그리고 우리가 ‘거울 속의 나’를 실현하는 것은 바로 이 타인과의 사랑의 도정 자체에서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사는 것이 아니라 ‘거울 속의 나’의 형상으로 내 앞에 서 있는 타인을 위해, 타인을 향해 살아간다. 유령은 바로 이 “나의/너의, 하나로 묶인” 삶의 시간에 부여된 형상이 아닐까.   


 

8
오페라의 유령은 정말로 존재했다.
오페라의 유령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믿어왔던 것처럼, 예술가들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지거나
감독들의 미신 때문에 생겨난 것이 결코 아니었다. (…)
그렇다. 오페라의 유령은 살이 있고 피가 흐르는, 살아있는 존재였다.
비록 그가 진짜 유령, 혹은 죽은 자의 그림자를 완벽하게 흉내내기는 했지만 말이다.

―가스통 르루, 『오페라의 유령』 중에서

혼을 가진 듯한 물건, 마르크스는 그것을 페티쉬(fetish)라고 불렀다. 물신(物神), 드물게 연물(戀物)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연물(戀物)은, 문자 그대로 풀면, 사랑하는 물건이란 뜻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물건 사이에 사랑하는 사람-물건, 그러니까 사람 모양의 물건인 인형을 놓아보면, 대뜸 피그말리온(Pygmalion)의 신화가 떠오른다. 자기가 만든 조각과 사랑에 빠진 저 유명한 전설속의 예술가 말이다. 피그말리온의 전설은, 그 여인상을 감각적 이미지 전반으로 확장시켜본다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어 돌아온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나 얼마쯤 피그말리온이다. 자기가 만든 이미지와 사랑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 오랫동안 물신주의 비판은 이 환상의 베일을 벗겨내고, 그 가면 뒤에 숨은 진짜 얼굴―자기 자신이라는 실체―을 보여주는 일로 간주돼왔다. 하지만 물신주의 비판은 그처럼 단순한 거짓/진실의 이분법에 의존할 수 없다. 마르크스의 물신주의 비판은 상품 뒤에 숨은 것은 추상적 노동시간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노동자들이여, 상품의 가치의 실체는 바로 당신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다. 왜냐면 추상적 노동시간이란 결코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며, 그 추상적 노동시간의 정치적 주체인 프롤레타리아 또한 실증될 수 있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추상적 노동시간과 마찬가지로 이미 실재하는 것이지만, 언제나 그것이 되고자 애써야할 어떤 것이라는 점에서, 앞서 말한 사랑의 진정한 목표(거울 속의 나)와 같다.) 자본론은 “상품 물신” 속에 들어있는 가치라는 이름의 “혼”의 정체를 밝히는 일에 바쳐진 책이랄 수도 있는데, 거기서 마르크스가 밝혀낸 물신의 비밀은 추상적 노동시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추상적 노동시간의 주인은 물론 프롤레타리아이다. 그러니까 “상품”이라는 베일을 벗겨냈을 때 우리가 만나게 되는 “작품” 속의 유령이 바로 프롤레타리아인 셈이다. 아마 여러분은 내가 “상품”과 “작품”을 제멋대로 혼용하고 있다고 불평할지 모른다. 오페라(opera)라는 말이 원래 공들여 만들어진 것 일반, 즉 “작품”을 뜻하는 라틴어 오푸스(opus)의 복수형이란 점을 상기시키는 것은 이 불평을 해소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상품과 작품의 구분은 매우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라.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나아가 입장료 없이는 단 일분도 감상할 수 없는 오늘날의 모든 공연예술들은, “상품”인가 “작품”인가? 진정한 예술을 선사하고 싶으나 흥행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는 작가와 제작자에게, 또 극장 문을 나서며 자신이 체험한 감동의 질과 자기가 지불한 비용의 양을 은밀히 저울질해보는 관객에게, 이 질문은 실로 트라우마적이지 않은가? 상품과 작품 사이, 바로 그리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이라 불리는 모든 물건들의 운명이 흐르고 있지 않은가? 바로 이 불쾌한 질문, 심연과도 같은 경계선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무언가를 부인하고 망각해야만 한다. 무엇을?


9
Phantom: I am the mask you wear….

―Phantom of the Opera, 1막 4장

바로 노동과 노동의 시간들이다. 그리고 살이 있고 피가 흐르는 살아있는 존재(생명)로서의 노동시간이란 시계가 아니라 우리 몸을 흐르는 시간, 한마디로 삶이다. 삶은 또한 좋건 싫건 내게 주어진 것이란 점에서 또 내가 누군가에게 그것들을 그냥 주지 않고는 흐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선물받은 시간이며, 나의 삶을 타인에게 데려가는 사랑의 시간이라는 점에서 선물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타자에게 나를 합일시키는 달콤한 파시즘―이 말은 “여러 개의 나뭇가지를 하나로 묶는다”는 뜻의 fascio에서 나왔다―의 환상이 아니라 “거울 속의 나”가 현실의 나를 타인에게로 이끄는 구체적 삶의 여정 그 자체이다. 우리는 소멸해가지만 그 소멸이 바로 “또 다른 나”의 삶을 매순간 영원한 구원으로 승화시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때, 바로 우리가 걸어온 타자와의 사랑의 길 위에서 우리는 누구나 (계약과 교환의 주체인 부르주아가 아니라 노동의 주체인) 프롤레타리아이며, 유령은 바로 그처럼 흔들리며 나아가는 삶의 형상이다. 그것은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자아라는 현실성의 허깨비보다 더 진실하고 인간적인 허깨비, 즉 가면의 현실성이기도 하다. 유령의 사랑과 분노가 깊은 공감이 울려주는 까닭은 그가 반으로 쪼개진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초라한 현실을 가리는 환상의 가면이 아니라, 환상적 현실을 가리는 진실로서의 가면이다. 그런데 그것은 왜 가면이어야 할까?
『공산당선언』은 파리에서 부르주아와 손잡은 노동자들의 봉기가 입헌군주제를 무너뜨린 1848년 혁명의 해에 간행되었다. 『마르크스 평전』의 저자 프랜시스 윈은 이 저작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아이러니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공산당선언』은 인간 역사상 가장 널리 읽힌 정치 팸플릿일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오해하기 쉬운 제목도 없다. 그런 당은 당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정치 무대를 뒤흔들고 있었음에도 아직 존재하지도 않던 당을 위한 선언. 프롤레타리아는 바로 그렇게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한다. 마르크스가 정확히 표현하고 있듯이, 하나의 유령으로서! 그러나 그 유령이 유럽의 정치무대에서 하나의 분명한 실체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던 봉기는 프롤레타리아를 배반한 반동적 부르주아들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됐고 무려 2만명이 학살당한 1871년 파리꼼뮨을 정점으로 급격하게 지하로 숨어들어갔다. <오페라의 유령>의 배경이 된 19세기 중엽 오페라와 예술은 아직도 피가 마르지 않은 프롤레타리아의 시체들 위에서 춤추고 노래할 수밖에 없었다. 가스통 르루의 소설에는 유령의 거처로 내려가는 길이 “한때 코뮤니스트들의 비밀통로로 쓰였던 곳”이라고 쓰여 있다. 낡은 예술은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시체들의 악취를 견뎌낼 수 없었고, 자신의 위선을 고발하는 유령들의 악몽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페라의 유령은 시종일관 회상으로 이루어져있으며 현재로 회귀하지 않고 과거형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멜랑콜리에 사로잡혀있다. 오페라의 좋았던 옛시절은 돌아오지 않는다. 음악과 춤, 미술이 드라마라는 서사적 뼈대 위에 살과 옷을 입히는 공연예술의 왕좌는 이제 뮤지컬로 대체되었다. 어떤 면에서,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오페라의 유령이란 19세기 오페라의 태내에서 자라고 있던, 그러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음악과 무대를 선보이는 미래의 예술로서의 뮤지컬을 뜻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이것이 웨버가 <뮤지컬의 유령>이 아니라 <오페라의 유령>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인 것 같다. “타인을 향해 나아감”, 즉 사랑의 길로서의 유령. 그것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쨌든 현실로부터의 돌아섬, 시간을 거스르는 회상, ‘거울 속의 나’를 향해 현실에서 거울 쪽으로 돌아서는 역설적 반전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삶을 배신해야 삶에 복무할 수 있는 예술의 비극적 운명이다.  
우리 각자의 “거울 속의 나”는 현실의 개별적 우리의 소유물이나 부속품이 아니다. 그것은 천개의 강 위에 자신을 아로새기는 하늘의 하나의 달이 아니라 천 개의 강 위에 떠있는 천 개의 달(月印千江)이다. 그러나 이 천 개의 달은 모두 달이라는 점에서 하나다. 그것은 저 하늘 위에 떠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기 때문에 붙들 수 없는 달, 마음이라는 강물 위에 떠있는 그리움의 달이다.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지배체제는 자신의 태내에 그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미래를 가진 계급을 잉태하고 있다고 말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의 유령이며, 문화상품들 속에 들어있는 숨은 영혼으로서의 예술작품이다. 그리고 그 혼을 불러오는 푸닥거리를 우리는 간단히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초혼(招魂)의, 혁명의 푸닥거리는 우리가 “거울 속의 나”라는 타자로 하여금 현실이라는 환영을 지우며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다른 나”의 길을 걷게 할 때, 그리고 오직 그 길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순수하게 직접 체험되는 삶은 유령의 노래처럼, 항상 불회귀점(point of no return)을 통과하는 삶일 수밖에 없다. 흔히, “진정한 생은 오직 현재를 살뿐”이라고 말할 때의 그 카이로스의 시간 말이다. 그것은 또한 왜 마르크스가 이 노동시간, 이 타자를 향한 삶을 “추상적”이라고 불러야했는지 가르쳐준다. 추상적 노동시간,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유령적 삶이며 모든 공들인 노동의 산물, 즉 오페라에 내재한 영혼의 실체이기도 하다. 

(*2006년 가을. <더 뮤지컬>에 "오페라의 유령과 예술의 대중"이란 제목으로 기고했던 글의 초안이다. 기고문은 분량 상 대폭 수정될 수밖에 없었고 프롤레타리아에 관한 대목들이 빠졌다)


 

And
prev | 1 | 2 | 3 |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