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붕시대를 살아가기(4)

|

역사의 림보, 생의 수용소에서 벗어나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셉션 Inception>(2010)에는 ‘림보(limbo)’라는 이름의 기이한 세계가 나온다. 림보는 ‘꿈 속의 꿈 속의… 꿈’이다. 두 개의 거울을 마주세우면 거울이 서로를 반영하면서 거울 속에 안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미장아빔(mise-en-abyme)의 이미지가 나타나는데, 이 영화에서 림보는 그러한 ‘반영의 반영’의 연쇄가 종국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마지막 꿈의 씨앗 같은 세계로, 거기서는 꿈과 현실의 이분법이 사라지기 때문에 자력으로는 깨어날 수 없고 림보에 침입한 타자의 도움에 의해서만 벗어날 수 있게 돼있다. 그런 점에서 림보는 천국과도 같은 무저갱이다. 어떤 이에게는 지옥 같은 악몽의 무한반복일 수도 있다. 원래 림보는 가톨릭교회의 용어로 사후세계의 한 형태, 지옥의 변방이나 가장자리, 문턱 등을 뜻한다. 이교도 성인(聖人)들이나 세례를 받지 못해 원죄를 씻지 못하고 죽은 아이(infant)들처럼 천국에는 못 가지만 지옥이나 연옥에 보낼 수도 없는 이들이 보내지는 곳으로 메시아가 최후의 심판을 행할 때 구원될 수 있다고 한다. <인셉션>에서는 약간 다른 양상으로 림보가 그려져 있다. 주인공인 콥의 아내는 모든 것이 자신의 마음에 꼭 맞고 둘의 사랑도 변치 않는 무시간적 림보에 들어가 있는데, 이 림보는 어찌 보면 자본이 자가 증식하며 모든 곳을 틈새-―미래와 과거가 그것에 의해 분절되는 시간의 틈새도, 존재의 틈새인 부정성도, 삶의 틈새인 죽음도, 관계의 틈새인 타자성도-― 없이 메워버리는 세계, 그저 행복과 발전의 물증 같은 상품들로  모든 틈새가 메워지는 바로 우리시대와 닮아있다. 콥은 이런 림보에 갇히지 않기 위해, 그의 작업장인 꿈속에 들어갈 때면 꼭 ‘토템’이라는 불리는 팽이를 지니고 간다. 그것은 자신이 손수 만들어 세상에 단 하나뿐인 팽이이고 늘 지니고 다니기에 그것의 모양과 감촉은 물론이고 무게까지 섬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꿈인지 현실인지 의심될 때 이 팽이를 돌린다. 팽이가 멈추지 않고 계속 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자기 바람대로 이뤄지는 꿈의 감옥, 림보에 갇혀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팽이가 꿈꾸는 자의 의지나 욕망과 무관하게 제 회전을 다하고 쓰러진다면, 그것은 현실이다. 팽이 토템은 오직 그만의 것이지만, 그것의 존재이유는 소유자의 의도, 희망, 의지, 꿈 등과 무시하고 제 회전을 다하는 것이다. 팽이의 회전은 물론 자연필연적 법칙에 따르는 것이지만, 꿈속에서는 사뭇 다른 의미가 덧붙여진다. 그것은 주체의 꿈에 속하지 않는 타자적 사물, 현상계 안에 침입해 그것의 꿈을 깨트리는 물자체와도 같은 실재이며, 주체가 받아들인 타자적인 것, 이를테면 그가 선택한 유한성(운명)이다. 그것은 왜상(anamorphosis)처럼 꿈의 아름다운 그림을 일그러뜨린다. 주체의 세계 내부에 들어온 저 바깥의 사물은 우리를 자폐적 꿈 바깥으로 깨고나오게 강제하는 꿈의 구멍이자 간극이기도 하다. 나는 후쿠시마가 그 끔찍한 외상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발전과 성장 시스템에 구멍을 내는 사물이며, 타자에 대한 그리움(과거)과 기다림(미래)의 능력을 상실한 채 자기 안으로 함몰해버린 인류―-그런 타자 없는 주체는, 타자성도 주체성도, 부끄러움마저도 없는 괴물로 변하며, 사실 후쿠시마 원전과 세계의 모든 핵발전소와 핵무기들은 그 괴물스런 존재의 똥이다-―에게 ‘세계’의 종말을 고지하는 타자, 그리하여 이 세계와 우리들의 시간의 끝에 우리를 끌어다 세우는 어떤 힘이라고 생각해본다. 


시간이 끝 대신 림보를 갖게 되는 것은 역사의 유한성이 사라지면서 무의미한 증식과정이 되는 것이고, 인생으로 따지면 죽음이라는 경계가 사라지면서 육체를 둘러싼 희비극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예술작품으로 따지면 근원(Ursprung)이 폐색되는 것이며, 연극 즉 행위된 것(drama)으로 따지자면, 행위의 시종이 없고 형상화와 의미화가 거듭 유산되는 사태이다. 그런 세상에선 무대와 생활이 구별되지 않고, 게임과 삶이 분별되지 않고, 사람과 아바타가 식별불가능해진다. 경계라는 이름의 타자성이 사라지면 애정은 초월성 없는 물질적 행위로 만연하면서, 에로스의 장소가 모든 곳에 확산되어 사실상 무효화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아감벤이 “예외가 상례가 되는 비(非)식별역”이라고 부른 곳, 그 외양이 안락하든 비참하든 본질상 생의 수용소(camp)인 곳에 갇히게 된다. ‘수용소’라니 너무 심한 얘긴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시적, 통시적 집단자살의 나라―-전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진행 중인 고령화 추세와 그보다 심각한 양상으로 추락 중인 출산율은 현세대와 미래세대의 통시적 집단자살이 아닌가-―는 ‘안락사의 수용소’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교육을 인적 자원 관리로 공식화하고, 그 인적 자원의 개발 및 활용을 재벌이 교육기관에 직접 지시하는―-‘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육성하라’―- 이 시대는 ‘노동 수용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미디어가 미와 욕망의 기준을 매분, 매초마다 들이밀어 압박하고 대중들이 그 모델에 맞추기 위해 살을 자르고 뼈를 깎는 온갖 의료시술에 몸을 내줘야 하는 이 성형과 미용의 광풍-―얼짱, 몸짱, 꿀벅지, 초콜릿복근 심지어 엉짱까지-―은, 비록 그것이 자발성의 외양을 하고 있다고는 해도, 일종의 ‘미적 생체실험’이 아닌가. 우리는 끊임없이 긍정하며, 무언가를 해대야 하는 조증―-자본의 미친 순환운동의 내면화-―으로 존재의 모든 틈새를 메워야 직성이 풀릴 것처럼 산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 우울증을 앓다 자살을 기도한다. 


바틀비 Occupy 후쿠시마


우리 의식을 점령한 저 “~하라”는 (자기 자신처럼 여겨지는 내면의) 무한한 긍정성의 명령에, 우리는 필경사 바틀비(Bartleby)처럼 정중한 거절을 표해야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 거절은 분명 이 세계로부터 탈퇴하는 자의 몸짓이다. 하지만 우리는 바틀비의 탈퇴를 통상적인 방향과 정반대로 이해해야 한다. 바틀비의 ‘부정(not to)’의 ‘긍정(prefer)’―I would prefer not to―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나아간 자,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간 자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악몽 같은 (“~하라”는 명령으로 가득한) 림보 상태에서 실재의 삶으로 깨어나는 자의 몸짓이기 때문이다. 질식사해가는 것은 우리이며 바틀비는 이 림보로부터의 해탈자인지도 모른다. 그의 소통불가능한 말과 태도는 누군가에 대한 명령도 아니고 심지어 자기에게 하는 명령이나 권유도 아니다. 그것이 소통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바틀비가 아니라 우리의 소통 관념이 틀려먹은 탓인지도 모른다. 나의 의도를 전달하고 상대의 의도를 전달받고 그 중간에서 적절히 타협한다는 장사꾼 식의 소통―실은 소통이 아니라 ‘협상’― 밖에 모르는 소위 시민사회적, 부르주아적 소통 관념의 한계 안에서만, 바틀비의 말이나 태도가 한없이 답답한 불통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사실 바틀비는 소통을 거절한 바가 없고 다만 자기의 존재를 지켰던 것뿐이다. <인셉션>에서 주인공이 지니고 있던 ‘토템’인 팽이처럼, 바틀비도 자기 생의 고유한 회전을 하다가 멈춰 섰던 것뿐이다. 그의 운명이 슬픈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의지나 의도가 어쩌지 못하는 존재의 필연성을 몸소 계시함으로써 우리가 ‘삶이라는 꿈’에 중독되지 않게 해준다―그런 중독의 결과는 “살아남은 자의 뻔뻔함”이다―는 큰 각성의 효력을 발휘한다(우리는 바로 그런 존재와 더불어 사는 법을 이제부터라도 배워야 하지 않는가. 누군가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다만 자기로 머무는 어떤 존재. 우리의 구성적 세계의 관점에서는 빈자리처럼, 검은 구멍처럼 보이고 왜상이나 흉터처럼 여겨지는 것―삶의 현실이 거기서 꿈을 들이쉬고 내뱉는 빈자리를 자신의 존재로 점거한 바틀비는, 소유와 건설과 상품생산과 소비라는 실정적인 세계 구성 행위와 그 행위의 산물들로 꽉 막혀버린 우리시대의 자기 폐색(閉塞)에 하나의 구원적 지점이 되지 않는가. 바로 너희 자신을 점거하라, 너의 존재가 이 림보 상태에 빠진 세계의 구멍이 되게끔 살아라! 우리는 어떻게 지금의 우리 자신이 될 것인가라고 니체는 물었다. 내 생각에 이에 대한 답은 “현존재(터-있음)가 되어라!”이다―물론 니체의 답은 ‘영원한 재귀의 운명애’를 사는 초인쯤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현존재는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간 연쇄 가운데 한 지점으로서의 현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현존재의 Da는 저기/여기(t/here) 사이를 나누는, 과거와 미래를 나누는 비시간적 시간이며 비-장소적 장소이다. 한마디로 ‘없는 곳’이며, ‘없는 시간’이다. 없는 것의 있음, 없는 채로 있음. 그것이 터-있음이며, 나는 그것을 우리가 구성적으로 봉합한 대지로서의 세계(Welt)의 봉합선이 터진 자리에, 증상의 원인인 트라우마의 자리에 머물러 있음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현존재로서의 바틀비는 무인지대(無人地帶)인 후쿠시마 원전에 사는 인간―-실제로 거기에는 아무도 살 수 없다―-이며, 아우슈비츠의 ‘무슬림’이다. 

  

운명이 없는 세계는 꿈에서 꿈으로 이어지다 림보라는 출구 없는 고독에 감금된다. 어쩌면 동물들은, 인간이 죽음을 죽는 것처럼, 꿈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삶에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메타의 경계선이 없다. 그래서 동물의 생은 우리가 자신의 삶을 대하듯 그런 대상-구성적 삶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런 대상적-구성적 삶의 일부이자 외부인) 꿈도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저 동물들의 꿈-삶처럼 꿈과 현실의 경계인 메타성과 타자성을 상실해가고 있는데,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우리 생활의 체제 자체가 자기 바깥과 한계를 지워버린 채(성찰성의 조건을 막아버린 채) 자가-재생산(auto-poiesis)이라는 일차원성의 미몽에 빠져 익사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미친 자본주의에게 공황이 재앙인 채로 축복이듯이, 우리의 문명에게 후쿠시마는, 틀림없이 악몽 같은 재난이지만, 그렇게 재난인 채로 축복일지 모른다. 

우리는 후쿠시마라는 저 검은 구멍을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 회화사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문명사의 가능성의 조건을 가리키는 ‘성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저것은 인간의 한계, 지성의 한계, 과학과 이성의 한계, 인류의 죽음충동을 고지하는 것이며, 삶 안에 들어와 있는 죽음 자체가 우리 눈앞에 놓여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완고하게 점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스럽다(sacer).” 여기서 “성스럽다”는 것은 우리가 후쿠시마를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우상화하거나 초월적인 인격신이 우리의 탐욕에 내린 벌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 물론 아니다. 다만 저 종말의 기표가 우리의 문명을, 지난 수십년 어쩌면 수백년 동안 갇혀있던 자본증식의 꿈, 성장과 개발의 림보로부터 깨어나도록 강요하는 운명적 힘이자 그로부터 새로운 타자적 이행을 실현해야할 구멍, 상징적 진리가 없는 실재(the Real)에 직면하게끔 강요하는 토템(운명)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후쿠시마 이후 비로소 우리의 집합적 삶의 시간들이 미래와 진보라는 신화가 아니라, 회광반조(回光返照)하는 자의 시선에 비친 세계 속을 흐르는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나타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인간은 원래 이런 종말의 시간―그게 얼마나 길지는 아무도 모른다―을, 아니 시간의 끝을, 목적 없는 사랑의 시간을 살게끔 피조(被造)되었다는 것을 후쿠시마라는 이름의 재난이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  



계간 <문학동네> 2012년 여름호에 기고한 글

And
prev | 1 | 2 | 3 | 4 | 5 | ··· | 27 |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