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붕시대를 살아가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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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무치의 전성시대


우리에게 미래가 없어졌다는 것은, 그처럼 ‘단순히 경기전망이 어둡다거나, 잘 살게 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거나, 신분상승의 기회가 구조적으로 막힌 계급사회가 고착되었다거나, 자연환경이 황폐해져 불안하다거나, 인심이 나날이 각박해진다거나 하는 등등의 얘기가 아니다. 아니, 그 모두가 맞는 말이지만 보다 심층적인 문제가 있다.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만남이 없이는 시간의 구조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죽음을 통해 주어진 미래, 사건의 미래는 아직 시간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는 미래, 사람이 수용할 수 없는 미래는 시간의 한 요소가 되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현재와 관계를 맺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두 순간의의 결합은 어떠한 것인가? (…) 미래와의 관계, 즉 현재 속에서의 미래의 현존은 타자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상황에서 비로소 실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상황은 진정한 시간의 실현이다. 미래로 향한 현재의 침식은 홀로 있는 주체의 일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관계이다. 시간의 조건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 속에 그리고 역사 속에 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 강영안 옮김, 시간과 타자, (문예출판사, 1996) 92~3쪽.)


 요컨대 시간은 타자의 현상이다. 시간, 특히 미래는 주체가 유한성 가운데 끝나는 한계 너머 타자의 터이다. 나는 미래를 살 수 없다―나는 현재만을 살 수 있다. 미래는 오직 타자의 땅이(이며, 그것은 없는 땅a-topos이)다. 그런데 왜 주체는 미래를 외면할 수 없는가? 타자를, 또한 타자의 터인 미래를 (가져다쓰지 않고) 남겨두는 것은 주체에게 왜 중요한가? 타자가 없이는 주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자를 제거하는 것은 곧 주체를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이것은 사랑의 교훈이기도 하다. 고로 미래가 없다는 것은 타자(의 터)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며, 이제 주체도 없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 과정을 역으로 되짚어보면, 한국에 미래가 없어진 까닭은 주체의 실종, 그리고 그에 따른, 혹은 그에 앞선, 타자의 소멸에 기인함을 알 수 있다. 

누군가 곧장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지난 한 세대는 타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 관용 등이 어느 때보다 목청 높여 외치지 않았던가. 주체의 패러다임에서 타자의 패러다임으로, 주도적 사상의 방향이 바뀌지 않았는가.’ 그것은 포스트모던 사상의 주체 비판이 가진 커다란 실수였다. 이들은 주체와 타자의 (종합 없는)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했다―결국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했다. 주체는 타자 혹은 비동일자와 ‘시차적인 변증법’의 관계에 놓여있다. 주체라는 종이의 앞면을 찢어버리면 타자라는 뒷면도 함께 찢어진다. 주체는 타자를 담는 한에서만, 타자와 외밀한(extimate) 관계를 맺는 한에서만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죽음’이라는 타자성을 상실할 때, 삶도 함께 잃어버리게 된다는 역설을 일깨워준다. 


“죽음의 미래는 우리에게 미래를 규정해준다. (…) 만일 현재에서 모든 기대를 제거해 버린다면 현재와의 어떠한 공통 본성도 미래는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미래는, 미리부터 존재한 영원의 품속에 안겨 있는, 그래서 우리가 그곳에서 가져올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미래는 절대적으로 다르고,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바로 이렇게 볼 때 참된 시간의 현실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현재 안에서는 미래의 등가물을 절대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거머쥘 수 있는 가능성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레비나스, 같은 책, 96쪽)

 

미래가 없다는 말은, 물론 관용적인 표현이다. 그것은 뭔가 긍정적인 기대를 할 수 없다거나 사정이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는 말을 더 강도 높게 하는 것이다. 미래란 말을 문자 그대로 시간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거기엔 두 가지 해석 가능성이 남는다. 미래를 맞이할 주체가 없어진다는 게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발 딛고 있을 장소나 세계 자체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두 경우 모두 결과는 같다. 미래가 없는 곳엔 무(無)가 남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이해는 곧장 이상한 물음을 불러일으킨다. 미래란 원래 없는 것이 아닌가, 없음으로써만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언제나 현재를 살 뿐이고 미래를 산다는 것은 그저 관용적인 표현(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를 현재의 삶의 동력이자 방향타로 삼는다는 뜻)이지 우리가 어떻게 미래를 살 수 있는가. 그러니 미래란 현재와의 연속성을 갖는 한에서만 직관할 수 있고, 따라서 현재나 주체와 완전히 절연된 것으로서의 미래, 요컨대 절대적 타자로서의 미래란 본디 없거나 있다하더라도 우리와는 모든 면에서 무관한 것, 따라서 없는 셈 쳐도 상관없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생각은 칸트의 ‘물자체’나 규제적 ‘이념’ 같은 용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런 것들을 부인하는 사회, 다시 말해 ‘죽음’과 같은 타자의 자리, 주체가 자신을 근본적으로 다른 자로 환승시킬 수 있는 이행의 자리를 지워버릴 때, 그런 시대는 삶도 죽음도 아닌 이상한 비식별(非識別, indiscernable)의 영역에 스스로를 차폐(遮蔽)하게 된다. 그렇게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주체-타자의 변증법, 최소한의 간극을 메워버릴 때, 인간에게서는 부끄러움(shame)이 사라지고,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전성시대가 열리게 된다. 바로 타자적 미래를 팔아치운 한국사회처럼 말이다.  


"사도마조히즘은 양극 시스템으로, 즉 무한한 감수성(마조히스트)이 그만큼 무한한 무감동(사디스트)과 마주하고 주체화와 탈주체화가 양극단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고유하게 속하지 못하고 부단히 순환하는 시스템으로 나타난다. (…) 규율과 쾌락의 무구별(이때 두 주체는 순간적으로 합치한다)이 바로 부끄러움(shame)이다. 그리고 성난 가학자가 재미있어 하는 피학자에게 ‘말해 봐, 이래도 안 부끄러워?’하면서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끄러움이다. 즉, ‘너는 네가 네 자신의 탈주체화의 주체인 것을 깨닫지 못하니?’" (조르조 아감벤, 정영문 옮김,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새물결, 2011) 163쪽)


부끄러움이 이처럼 내가 나 자신의 탈주체화의 주체인 것을 깨달음이라면, 부끄러움이 없는 시대에는 어떤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사도마조히즘적 정치상황, 즉 권력자들의 사디스트적 패악과 그들에 대한 국민들의 마조히스트적 지지가 부단히 순환하는 이 빌어먹을 시스템에는 과연 ‘함께 썩어가는 자들의 동류의식’ 이상의 것이 있으며, 이는 미래라는 시간의 증발과도 상관된 문제다. 이명박 정권이 집권기간 내내 드러내온 후안무치함은 저들을 권좌에 올려놓은 한국사회가 타자의 자리인 간극, 자기를 타자화할 수 있는 반성의 간극, 그리움과 기다림을 향유할 시간의 간극, 주체-타자의 변증법적 관계 속에 스스로를 이행시킬 자기지양의 힘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음을, 그 모든 능력을 자본의 무한한 자가-증식 과정 속에 매몰해버렸음을 가르쳐준다. 이제 무엇이 이 악몽의 순환고리를 깨트려줄 것인가? 나는 ‘후쿠시마’가, 지구적인 금융공황과 더불어, 한국사회와 한국이 그중 한 고리를 이루고 있는 자본주의적 지구문명에 예기치 못했던 단절을 가져오게 되리라(그렇게 돼야 하리라), 그럼으로써 우리가 상상했던 모든 것들과 다른 시간, 다른 세계가 그 단절을 통해 우리 앞에 열리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비록 우리가 우리인 채로는 거기에 들어설 수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오직 희망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희망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에.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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