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붕시대를 살아가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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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타자’ 그리고 이행의 문턱


‘멘탈 붕괴’는, 다른 유행어들이 그렇듯이, 그 시대의 증상들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이며 집합적인 직관의 표현이다. 그래서 ‘멘붕’이란 말도 개인적 상심이나 실망과는 차원이 다른 어떤 것을 가리킨다. 집합적 의식으로서의 멘탈은 합의된 상징이나 의식이 아니라 그러한 상징을 하부에서 지탱해온 집합적 무의식에 연동돼 있다. 게다가 ‘멘붕’은 타인이나 외부적 사태에 원인을 두는 게 아니다. 나나 우리의 근간을 흔드는 체험, 혹은 (멘붕이 일어나기 전까지) 믿는다는 의식조차 없을 정도로 믿었던 어떤 것이 무너질 때가 ‘멘붕’의 순간이다. 그때 우리는, 그것에 기반해서 우리 자신이 구축됐던 어떤 선험적 구조가 더 이상은 작동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런 것이 ‘멘붕’의 상황이다. 따라서 멘붕은 자기와의 결별의 시간이며 주체의 이행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의 멘탈(근본 정동)에서 다른 멘탈로의 이행이 이행하는 자에게 결코 연속성을 보장하진 않는다/못한다는 점이다. 붕괴하는 멘탈이 얼마나 근본적인 층위의 것이냐에 따라 불연속과 단절의 정도는 대단히 심각한 것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무너지는 세계 위에서 하고 있는 성찰이나 기획들은, 새로운 멘탈에 기반을 두고 형성될 자아나 세계에 관해서는 무능하고 무용한 것일 수 있다. 우리의 반성은 이행된 세계의 구성적 일부로 전혀 전달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새로운 세계가 밑거름으로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죽음과 폐허들일지도 모른다. 요컨대 멘붕을, 하나의 세계―정신적이든 실제적 세계든―의 몰락을 수반하는 이행(기실 혁명은 그런 불연속이지 않겠는가)은 하나의 소멸과 다른 하나의 생성이지, 하나가 여기서 저기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건너기가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지금의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것은 건설에의 새로운 의지가 아니라 종말에 임하는 자의 윤리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행, 무의 심연 위에서 이뤄지는 주체 소멸과 타자 생성이라는 이행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마치 죽어가는 자에게 주어진, 자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세계에 무엇을 건네줄 것인가라는 물음처럼 들린다. ‘내가 무엇을 (해)줄 수가 있나요, 그럴 필요는 있습니까? 저 무의 심연 너머에서 도래할 자들(타자들)이 나와는 어떤 척도도 공유하지 않을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바로 여기가 우리가 타자에 대해서, 또한 타자적인 것으로서의 미래에 대해서 절박하게 사유하기에 알맞은 때와 장소인 것 같다. 우리가 왜 점점 미래에 대한 감각을 잃어왔는지, 어떻게 미래나 타자에 대해 잘못 생각해왔는지, 그렇게 미래와 타자를 유실하는 가운데 어떻게 우리의 주체를 망쳐왔는지 생각해보기에 적절한 때, 그게 또한 ‘멘붕’의 시대다. 


대한민국, 증발하는 미래와 휘발하는 현재


“대한민국이란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 이것은 냉소적 발언도 아니고 예언자풍의 과장도 아니다. 그것은 현 정부의, 아니 IMF의 구제금융과 함께 신자유주의 사회개조 프로그램도 받아들인 1997년의 경제위기 이래로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운영하는 핵심 정책기조―시장을 향해 국가를, 사익을 위해 공익을, 발전적으로 해체하라!―를 일상적 화법으로 번역해놓은 것일 뿐이다.3) 눈치 빠른 한국 국민들은 그런 요점을 재빨리 간파했고 신속히 대응했다. 어떻게? 국가가 아니라 자본에, 정치가 아니라 경제에, 공적 덕성이 아니라 사적 이익에, 사람이 아니라 자산에, 불투명한 인격이 아니라 눈에 띄는 외모에, 사람들을 돕는 실력과 경험이 아니라 자신의 상품성을 드러내는 스팩과 자격증에, 아날로그가 아니라 디지털에 그리고 역사가 아니라 미래에, 선물(膳物)이 아니라 선물(先物, future)로서의 미래에… 올인함으로써! 


3) 물론 지극히 역설적인 상황이긴 하다. 정부가 국가를 해체하는 주도세력이라니! 하지만 반국가적 성격을 띠는 정부―공적규제를 ‘투자유치’라는 이름으로 철폐하고, 공공서비스와 인프라시설들을 ‘효율성’이라는 미명 하에, 마치 적산불하(敵産拂下) 하듯이, 자본가계급에게 민영화, 아니 사유화(privatization!)시켜주며, 정부의 일은 자산을 지켜주는 경찰업무와 자본을 위한 서비스로 이해하는 정부―라는 이 신자유주의적 역설은 “국가기구는 계급지배의 도구이다”라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는 역설이 아니라 실은 ‘정상적’(?)인 사태다. 국가를 ‘국민 모두의 것(res publica)’이라고 여기는 공화주의적 이념은 자본주의 하에서는 현실이 아니었으며, 노골적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 아래선 상징적 질서조차 아니게 된다. 

 

그런 약삭빠름이 이제 자신들의 뒤통수를 치며 등을 떠밀고 있다. 몇 가지만 따져보자. 자산증식에 올인했던 국민들, 가령 레버리지(leverage) 신화―부채도 자산이다!―를 믿고 주식이나 아파트, 뉴타운 등에 차입투자(투기!)를 했던 이들은 2008년 월스트리트 금융위기 이후 다수가 ‘신용불량’과 ‘하우스푸어’로 전락 중이다. 가계부채가 1000조원이 넘는데 임금이 오르지도 않고 경기가 살아날 기미도 없으니 갚을 길이 막막하고 부패만 창궐할 수밖에 없다. 매달 빚 갚고 먹고사는 일도 빠듯한 처지에, 질적으로 다른 가치나 새로운 삶의 방향에 손을 대는 일은 언감생심이다. 이들에게 무슨 미래가 있을까. 그럼에도, 수백만의 중소 자영업자들(자칭 타칭 ‘사장님’들)은 글로벌 무한경쟁에서 대기업의 생존과 이익증대를 위해 노동유연화(비정규직 양산) 정책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최저임금으로 알바생을 채용하는 이점을 누리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들 중 팔할이 가게 문 열고 3년 안에 파산한다. 자영업의 다른 이름은 ‘파산자 양성업’이다. 그래도 ‘살 놈은 산다’는 소리를 해가며, 더 넓은 무대에서 더 세게 경쟁해야 한다는 초인간적 깡다구를 자랑하는 민족이 대한민국 사람들이고, 이 나라에선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이상한 애국주의가 ‘정부는 시장에서 손 떼고, 규제는 다 풀고, 기업지원은 늘려라’는 요상한 시장주의와 맞물려 잘도 돌아간다. 이런 조건에서 출산이 늘 리는 만무해서, 우리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과 가장 급격한 고령화 속도, 가장 높은 자살률이란 기록들을 줄줄이 꿰차고 착실히 사라져가고 있다. 그 위로 삼성과 현대 그리고 한류 아이돌의 별들이 빛나니 가끔 쳐다보면서 위안을 삼으시라고, 언론에서는 주구장창 떠들어대고…. 

오늘날 보통의 대한민국 국민이 돈과 탐욕의 노예는 아니다. 다만 빚의 노예다. 우리는 미래를 돈과 맞바꿨다. 그런데 ‘모두가 부자가 되고, 주가가 5000을 달성할 것’이라는 집권당의 약속과 달리, 그래도 ‘경제 하나는 살리겠지’라는 태만한 기대와 달리, 경기가 하강 국면을 급격히 미끄러지면서 투자금이 수익이 아니라 손실이 되어, 감당하기 힘든 부채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왔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미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넘치게 갖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희망이 아니라 절망의 안색을 한 미래가, 우리 눈앞이 아니라 등 뒤에 들러붙어 있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들, 특히 궁민(窮民)들에게는 별스런 미래가 남아있지 않다. 너무 많이 가져다 써버린 것이다. 심지어 4대강 개발이니 뭐니 하며 후대의 미래까지 죄다 돈으로 바꿔버렸고, 후쿠시마 사고가 터진 후에도 계속 짓겠다는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는 최근 드러난 부실하기 짝이 없는 운영 실태로 보건대, 2만년 후의 인간과 생명체들의 미래까지 몽창 인출해다가 투기판에 날릴까 두려울 지경이다. 


얼마 전 뉴스에서 용산 개발이 본격화된다는 뉴스를 보았다. 화면에서 개발 후의 모습을 담은 조감도를 보았는데, 거인처럼 둘러선 최첨단 초고층 건물과 호텔, 쇼핑센터, 아파트, 공원들 사이로 한강에서 이어지는 수로가 있고 그 위로 요트와 유람선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어려서 본 21세기 미래도시의 경관과 흡사했다. 30조를 들여서 몇 년 내에 완공할 예정이란다. 두바이가 망하고 코앞의 송도 신도시 일대가 완성도 되기 전에 쇠락해가는 꼴을 볼 때, 얼마나 실현 가능성이 있는 꿈인지 난 모르겠다. 그런데도 용산 재개발 지역은 서울에서 유일하게 아파트값, 땅값이 오르는 지역이다. 의심 따위는 접고, 용산지역이 조감도가 고스란히 곧장 걸어 나온 듯한 휘황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다 해도, 나는 그게 하나도 좋아보이질 않는다. 그건 역사와 기억과 사람 냄새가 말끔히 지워진 진공으로 나를 질식시키거나, 혹은 테마파크의 동화 속 건물들처럼 뒷맛이 아주 황량한 가면성(假面性)을 엿보인다. 우리는 거기서 ‘남일당’과 거기서 불타 죽은 철거민들의 분노나 원한, 남겨진 소망 혹은 영혼의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엔 기억의 주체들이 과거와 상봉해 상대를 어루만지며 시간을 보낼 어떤 자리가 없다. 자본의 위용을 구현하는 새 용산의 청사진은, 테마파크는 연극의 무대장치처럼, 앞으로는 꿈을 발산하지만, 그 얄팍하고 경박스런 외양 뒤로 쓸쓸하고 무거운 허무를 감추고 있다. 용산에 지어질 최첨단 호텔과 쇼핑몰들은 북한이 선전용으로 지어놓은 아파트와 정반대인 것 같지만, 실은 동일한 본질을 갖는 풍경이다. 두 곳 모두 사람이 살면서 환경과 생기를 주고받는 게 아니라, 생명 없는 과장된 외양이 삶을 짓누르고 인간을 지워버린다. 거기서는 돈이 많든 적든, 다 뜨내기처럼 보인다. 머물 수 있지만 살 수는 없는 곳, 살아도 호화로운 감옥 독방이나 다를 바 없는 곳― 둘 다 선전시설에 불과하다. 하나는 당과 사회주의 이념이라는 추상물을 위해 사람이 봉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돈이라는 추상물의 증식을 찬미하기 위해 사람이 봉사하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생명을 빨아들인 물신이 무한 증식하는 곳, 거기서는 역사가 기억을 잃어버리고 일회용품처럼 변한다. 


과거는 지나간 것들, 이젠 없는 것들, 타자들의 나라다. 우리는 과거를 그것이 타자일 경우에 한해, 타자로서만 가질 수 있다. 그렇게 타자와 만나는 능력을 기억이라고도 부르고, 추억(그리움)이라고도 부른다. 그렇기에, 과거를 간직할 능력을 갖지 못하거나 타자와 접촉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미래다운 미래도 경험하지 못한다. 미래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타자의 땅이기 때문이다. 타자가 없는, 타자성을 모르는 자들에게 미래는 그저 현재의 기대의 연장일 뿐이고, 현재의 청사진을 실현할 공간일 뿐인 것처럼 보인다. 타자를 타자로서 만나는 능력이 없으면, 미래는 설레임이나 예감이나 희망으로 다가서지 않는다. 타자로서의 미래는, 또한 과거의 타자성은 그렇게 현재의 주체에게 자신들과 함께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을 요구하고 그 방법을 숙련시킨다. 어떤 능력인가? 현재 안에, 주체 안에 타자의 자리를 마련하는 능력과 방법이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 그들의 부재를 통해 우리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듯이 말이다. 그렇게 부재하는 어떤 것과, 그것이 없는 채로 지금 여기서 만나는 사랑의 기예(그리워할 줄 알고, 왠지 모를 예감에 설레며 기다릴 줄 아는 능력)가 또한 시간을 사는 기예이고 힘인데, 이제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그 ‘타자의 자리’를 돈으로 채우고 상품으로 메우는 것으로, 투자와 회수의 전략, 생산과 소비의 기술로 대체해왔던 것이다―이것이 자본의 시선이고 자본의 감각이며, 우리 앞에 그토록 현란한 물질적 풍요와 기술적 힘을 과시했다가, 어느 날 공황이라는 이름과 함께 거품처럼, 가증스런 사기꾼처럼 사라져버리는 자본의 존재 방식이다. 가장 뼈아픈 상실은 바로 이것―주체와 타자의 변증법적 연애술을 우리가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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